신의 사자 (3)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신을 카르남이라 소개한 이 남자는 변환 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같은 말 했다. 노인, 이타르, 변환 인자. 하지만 나, 없다."
카르남은 20년 전에 납치되어 온 아이가 맞았고, 아주 띄엄띄엄 제국어로 자신의 의사를 내비쳤다.
오래전 아이 때 납치되었는데도 제국어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야. 이 남자는 너랑 이타르와는 달리 훤히 읽혀.
'그게 변환 인자랑 상관이 있는 거야?'
-가설이야. 변환 인자가 내 시선도 정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어. 내 눈에 읽히지 않은 사람은 너와 이타르, 단둘뿐이니까.
'그럼 왜 주위에서 마법이 잘 쓰이지 않는 거지?'
-나야 모르지. 어쩌면 변환 인자로 인한 착각이 아니라 정말 무효화 마법이라는 특수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야? 얼굴에 이상한 그림 그린 이 녀석이 무효화 마법사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일단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타르를 언제 봤어?"
"오래되었다. 나 아이."
"네가 아이일 때?"
카르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카르남은 25살 정도 되는 것 같으니까 길게는 20년, 짧으면 10년 정도인가? 시간이 좀 흘렀어.'
"네가 변환 인자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온 거야?"
"맞다. 갑자기 나타났다. 아니라고 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더 북쪽으로 올라갔어?"
"아니다."
카르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쪽 향했다. 정기와 마나 섞는 방법 말했다. 다 기억 못 한다."
"정기가 뭐야?"
카르남이 바닥에 누워서 칼을 자신의 목에 대는 시늉을 하다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팍 밀쳐 내며 일어났다.
"아까 상황이잖아."
"그래!"
"내가 아까 누워 있었고…… 오러!"
"그래! 오러! 여기서는 정기!"
오러를 정기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타르의 기억은 마나와 오러를 섞는 방식을 포기했다고 했지만, 최근의 이타르는 마나와 오러를 섞는 방식에 다시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마법 도서관이 아니라 마검사를 찾고 있지? 마검사를 찾는 일은 알버트한테 일임한 것 아니었어?'
잠시 고민하는 동안 카르남이 손바닥을 위로하고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손을 들고 그가 말했다.
"마나."
이번에는 왼손이었다.
"정기."
마치 저울질하듯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두 가지 어렵다. 왜냐?"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었다.
"마나 어렵다, 늘리기. 정기 마나보다 쉽다, 늘리기."
투브가 처음에 캐슬린을 보고 마나는 식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때에 맞추어 화분을 갈아 주면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을 했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도 마나는 어린 시절 발현하는 마력의 총량에서 늘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에 반해 오러는 개인별로 질, 양, 속도, 총량의 차이가 있지만, 어릴 때부터 꾸준히 훈련하면 차츰차츰 늘어나는 성질의 것이었다.
"말했다, 이타르. 균형 중요하다."
올라가 있던 카르남의 왼손이 내려갔다. 이미 내려가 있던 오른손은 그대로인 채였다.
"누른다, 정기. 맞는다, 균형. 여기까지 기억."
머릿속에 저비스의 말이 스쳐 갔다.
-끓여도 없어지지 않고, 붉은방패 기사단이 30분 이상 오러를 운용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감자.
오러를 억누른다.
억누르는 정도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 동안은 아예 없어지는 정도로 만들 수 있다.
사교도들에게서 나왔으며 그들에게는 맹신하는 신이 있다.
단정하기에는 이르고, 연관성도 지금은 불투명했다.
하지만 이타르라면, 그 이타르라면 말도 안 되는 식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났다.
투브와 카르남, 둘 모두가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왜?
"돌아가야 해. 돌아가서 사교에 대해 밝혀야 해."
-무슨 소리야? 설명을 좀 해 봐.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나중에 설명할게. 확실하지도 않고, 지금 말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아."
아직도 나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카르남이 보였다.
'이 녀석은 정말로 무효화 마법사인가? 이용 가치가 있을까?'
대장벽 너머의 삶을 잘 아는 데다가 마법과 주술까지 모두 쓸 수 있는 존재다.
더 이상 삶에 변수를 추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녀석은 변수를 뛰어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제국 안에서 정착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어."
일단 카르남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집 얘기를 꺼냈다.
카르남이 고개를 저었다.
"오래됨. 내 집 이곳이다."
그리고 치마처럼 늘어져 있던 다리 부분의 옷을 걷었다.
오른 다리가 왼 다리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얇았다.
"나, 약하다, 함께 움직임, 잡힌다."
"그 말, 후회 안 해? 너는 위험한 존재야. 널 죽일 수도 있어."
이타르에 대해 알고 있으며, 무효화 마법사일 수도 있다.
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카르남의 힘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카르남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치고는 너무 담담한데."
담담하던 카르남의 입이 열렸다.
"이름이 뭔가?"
그러고 보니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고 있었다.
"시안."
"시안, 나 배웠다, 주술. 보인다, 너의 기운."
"헛소리는 죽어서 해."
마나 소드를 손에서 만들었다.
카르남의 시선이 닿자 마나 소드가 힘을 잃고 흩어지려 했다.
정신을 집중해 마나 소드의 형태를 유지했다.
"어째서 한탄, 어째서 절망, 어째서…… 분노. 그것들 파괴한다, 시안 너를."
"닥쳐."
"너의 기운 크다, 강하다, 셀 수 없다, 눈부시다, 찬란하다. 그것들, 사라진다. 너의 분노 때문에."
"닥치라고!"
마나 소드를 휘둘렀다.
주륵.
카르남의 목에서 흐른 피가 마나 소드를 타고 흘렀다.
마나 소드는 카르남의 목에 상처만 냈을 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르남의 눈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의 분노 이유 모른다. 하지만 도울 수 있다, 너의 분노 해결."
"마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이곳에서 나의 위치, 다르지 않다. 사람들 숭배한다, 주술사."
뿌득.
이를 갈았다.
"신이 있으면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
"아래쪽에 사는 애들을 만나고 왔는데, 걔들은 나보고 신의 사자래. 웃기지? 나도 같은 인간인데 말이야. 더군다나 나는 신이 아주 싫단 말이야."
빠르게 쏟아 내는 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듯, 카르남이 표정을 찡그렸다.
"내 분노는 내 방식대로 해결한다. 그리고 네게 건넬 두 번째 제안은 없어."
마나 소드를 그대로 내리그었다.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은 카르남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데구루루 굴렀다.
***
언덕 아래 유탓카 부족의 거주지에서 거대한 불이 올랐다.
부족민들이 자다가 뛰어나와 움집과 천막에 불이 붙지 않게 불이 난 곳 근처의 건물들을 부수고, 불붙은 움집에 흙과 눈을 마구 퍼다가 뿌렸다.
한밤중의 불로 소란해진 틈을 타, 투브와 함께 여유로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언덕에서 기다리던 알버트가 내게 강철 검을 주며 물었다.
스륵.
허리에 강철 검이 담겨 있는 검집을 잘 고정시켰다.
"내려가야 해. 이타르는 더 올라가지 않은 것 같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교와 얽혀 있는 것 같아."
"사교라면 이번에 다녀오신……?"
"맞아. 자세한 건 가면서 얘기해 줄게. 저쪽은 지금 정신없는 것 같으니 가자고."
"알겠습니다."
알버트가 지도를 폈다.
우리가 그동안 올라온 경로가 대략적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알버트가 앞서고, 나와 투브가 뒤를 따랐다.
불이 치솟으며 만들어 낸 그림자가 우리 앞으로 길쭉하게 늘어졌다.
-괜찮아?
투브가 나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걱정해 주는 거냐?"
-착각은. 말하는 본새 보니까 멀쩡하네.
원래 머리가 비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르남은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타르의 존재, 이타르가 한 말.
뿐만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그의 능력도…… 위험했다.
저비스를 처음 봤을 때의 감정을 느껴서 같이 가자고 권유하기는 했지만, 제거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그 같은 위험 요소를 눈앞에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살인에 무뎌지는 건가.'
두 손을 들어 눈으로 보았다.
"하!"
가당치도 않은 생각에 외마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장군이었다.
내 명령 한마디에 수천수만의 적병이 죽었고, 불가피하게 아군을 희생시킨 적도 있었다.
내가 직접 죽인 사람도 수도 없이 많았다.
살인은 지독히도 익숙했다.
전장에 나선 후 하루하루가 살인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쟁이며, 내 발걸음이 닿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전장이다.'
그때는 무너져 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제국을 위한다는 얄팍한 명분 아래 살인을 정당화했었다.
'나를 위한 것이다.'
위선과도 같은 이유보다 몇 배는 더 직관적이고 딱 떨어지는 이유였다.
분노가 나를 파괴할 것이라는 카르남의 말이 머리에서 울렸다.
'개소리!'
나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분노는 파괴된 나를 일으켜 세우는 토양이자 양분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성공적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그렇다고 실패라고 하기에는 얻어 온 것이 많은 북부행도 벌써 네 달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밖에서는 냉철한 제뉴인 공작이지만 집에서는 어머니에게 꼼짝 못 하고, 어머니는 늘 그렇듯 아버지를 휘어잡고 있었다.
캐슬린은 제국 대학으로 편입했고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아깝다며 제국 대학에 있는 기숙사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북부 여행을 다녀온 뒤, 송곳니 기사단원들은 나와 알버트가 가지고 돌아온 히베아제 강철검을 매우 부러워했으며, 아버지의 명으로 매일 기사단원들과 함께 체력 단련 및 수련을 하게 되자 정말 질리지도 않고 돌아가며 내게 대련을 요청해 왔다.
로하나스가 가장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던 것 같다.
캐슬린과 같이 제국 대학으로 편입한 저비스는 바쁜 와중에도 내게 자신의 이런저런 연구 결과를 보내오곤 했다.
마법약학은 영 내 취향과 맞지 않아서 괜찮다고 몇 번을 사양해도, 나를 고용주쯤으로 여기는지 신약의 용도와 개선점을 줄줄 쓴 편지를 길게 보내곤 했다.
말미에는 꼭 '투브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약은 잘 먹이고 계실 거라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저도 꼭 데려가셔야 합니다. 이미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휴학계도 품고 다니고 있습니다.'와 같은 집착 어린 말이 들어가 있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조회가 끝나면 들어가셔야 합니다."
얄츠 이나타, 황실 시종장이었다.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작위 수여식을 앞두고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대뜸 말씀하시는 분도 흔치 않을 겁니다. 저는 공자님을 뵈면 대범하신 것인지 무심하신 것인지 헷갈리곤 합니다."
"달달 떠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얄츠 백작이 작게 웃더니 곧 표정을 바로 했다.
안에서 오러 실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짐이 오늘 그대들을 모은 것은 새로운 귀족 가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허리를 숙인 얄츠 백작이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문이 열리면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황제가 귀족 및 관리들과 정사를 논하는 정전(正殿)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고 각자 고개를 숙이고 옆 사람과 수군거렸다.
"나가시면 됩니다."
얄츠 백작의 말에 정전의 중앙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다 모여 있군그래.'
관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도에 올라와 있는 귀족이라는 귀족은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몰트 비텔스바흐 궁정백, 바네사 발터 후작……. 홈 위샤인 백작이 보이지 않는군.'
내가 죽을 때 같은 방에 있었던 레이바 비텔스바흐, 지크프리트 발터, 스와라 위샤인의 부모나 가까운 혈족 되는 사람들이었다.
'위샤인 가문은 아직까지는 지방의 그저 그런 백작일 테니, 당연한 건가.'
앞으로 걸어가자 7공작 가문의 가주와 대리인도 보였다.
몬트라우, 바크하임, 그랑베르트, 노체, 에베, 루지온, 리히트까지 일곱.
눌하스 바크하임, 산탄다르 공작이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껄껄거리며 웃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아버지의 어깨를 세게 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산탄다르 공작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라면 내게 작위와 영지가 수여되는 것이 정말 극비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올라앉은 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가 내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시안 몬트라우. 폐하의 은덕과 자비, 영광 아래 살아가는 제국의 일원이며, 폐하에게 충성하며 폐하를 보필할 자입니다. 또한 제국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된 자입니다."
"짐을 보필하고 제국을 빛낼 자가 스스로 내 앞에 이르렀으니 이는 큰 기쁨이다."
얄츠 백작이 꼭 외워야 한다면서 옆에서 달달 볶기도 했지만, 지난 생에 해 봤던 것이라 작위 수여식의 정해진 대화가 막힘없이 줄줄 나왔다.
황제가 내관에게서 검을 받아 들고 단을 내려왔다.
"짐은 그대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하고자 한다. 그대의 아비와 어미가 누구였든, 새로운 가문의 개조(開祖)가 될 것을 짐이 명하노라."
그 말에 대전이 다시 한번 웅성거렸다.
'그럼 장자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캐슬린 공녀님이 제뉴인 공작이 되는 건가요?' 하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황제의 다음 말에 그런 수군거림은 쏙 들어가 버렸다.
"제국령인 카몰을 영지로 수여하노라. 시안 몬트라우, 그대는 이제 카몰 백작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