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믿음 (1)
"누가 왔다고?"
내 시큰둥한 물음에 알버트가 건조하게 답했다.
"와이트 하울링, 링스톤 백작입니다."
"어디 보자."
책상에 펴져 있던 카몰 지도를 쭉 훑어 내렸다.
"여기 있네, 링스톤.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오래 버텼나 몰라?"
링스톤이라 적힌 곳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그 위에 15를 썼다.
지도에 그려진 10개의 백작 영지마다 각자 다른 숫자가 쓰여 있었다.
누이론트 0, 팔스타인 9, 링스톤 15, 스토나 30 등등.
스토나 백작에게 쳐들어가 가문 발전금을 핑계로 협박을 한 것이 1주일 전이었다.
너는 계속 뻗대고 나는 네 세금 착복을 위에다 보고할 것인가, 무마시켜 줄 테니 얌전히 몇 년간 세금을 더 바치면서 나 죽었소 하면서 살 것인가의 기로에서 스토나 백작은 후자를 택했다.
카몰 내에서 원래 내가 소유한 영지들 이외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스토나 백작이 무너지자 다른 백작들도 줄줄이 백기를 들었다.
"다른 백작들도 근처에 머물고 있지? 다 불러와 봐."
일찌감치 온 백작들도 있었으나 나는 대기하라는 말만 했을 뿐, 나와 대면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
누이론트, 스토나, 팔스타인이 빠진 카몰 지역의 백작들 7명을 모아 놓고 내가 그들에게 선언했다.
"내가 세율 조정을 말한 날로부터 그대들이 내게 온 날짜에 10을 더한 숫자가 2년간 각 영지에 부과될 세율이야. 단, 누이론트의 0과 스토나의 30은 변동 없음으로 한다. 이대로 나 시안 몬트라우, 카몰 백작과 봉신 계약을 맺든지, 마음대로 할지 선택해. 계약을 안 맺겠다? 기존의 스타리옷 유제프 후작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된 나와의 계약을 지속할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판단, 해당 영지의 영주에게 부여된 세습 권한을 회수하겠어. 또한 황제 폐하의 정식 인가를 받은 정통성 있는 제국의 귀족에게 반기를 들었으므로 기존의 제국 질서에서 이탈하려는 것으로 파악, 이적 행위로 규정짓고 전투태세에 들어간다. 이미 4군단 사령관, 페제 베이카 장군에게도 전달된 사항이야."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가…… 각하, 그것은 너무 과한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나이 어린 영주가 와서 기강 좀 잡으려고 했는데 세습권 회수니 전투태세니 나오니까 막 일이 커졌다 싶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패기와 각오도 없이 잘도 백작 자리에 올라 있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영민들 착취한다는 소리 나왔다가는 가만 안 둔다. 각 가문마다 중앙에서 따라 내려온 관리 보낼 거니까 걸리기만 해 봐. 관개수로 정비나 도로 정비 같은 공공사업을 하면 그 액수만큼은 세금에서 차감해 줄 의향 있으니까 알아서들 판단해. 강제 동원은 금지다.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농사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해라."
세율을 높이면 죽어나는 건 영민들이다.
얼마간의 부담은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부담을 줄이고 나은 생활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제한조건을 걸었다.
공사가 행해지면 인력과 돈이 돌고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종국에는 내게로 모일 것이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봉신 계약, 안 할 놈은 나가."
무장을 하고 나라를 뒤엎으려는 반란도 진압한 나다.
이런 어설픈 저항은 귀여운 축에도 못 끼었다.
7명의 백작이 순서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에 입을 맞췄다.
'백작들이 스스로 항복해 오니까 케이신리 땅을 떼어 줄 필요도 없네. 처음에 장부에서 가문 발전금 발견한 그 관리 이름이 뭐였지? 똑똑한 녀석이야.'
-으휴, 사내새끼들한테 저런 걸 받아야 해?
***
그는 여행 중 이름 없는 땅에 잠시 멈추어 쉬었다 전해진다.
그의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 이름 없는 자가 당도했으니 그것 또한 기이한 동시에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다.
오랜 여정에 지친 그는 사람들과 동화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보였다.
그는 자체로 마법의 정수였으며 근원이었다.
그가 지닌 믿기지 않는 능력에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 불렀다.
자신은 신이 아니다, 그저 여행객이다, 그가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미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 단정 지었다.
그리고 신의 존재가 퍼져 나갈까, 서로서로 입단속을 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를 했지만, 신이라는 단어는 무시한 채로 답했다.
어느 한 사람이 물었다.
"신이시여, 무엇을 찾아 여행하던 중이셨습니까?"
그가 답했다.
"내 후계자를 찾는 것이었네."
어느 날, 남자가 작은 씨앗을 가져와 기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후계자는 자연적으로 나지 않는 것 같으니, 한번 만들어 볼까 하네."
그것을 본 사람이 물었다.
"신이시여, 당신의 후계자는 식물입니까?"
그가 허허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다네. 사람이지. 다만 오러와 마나를 같이 쓸 수 있는 사람이라네. 그것도 둘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림이어야 하지."
답을 들은 사람이 다시 물었다.
"신이시여, 그런데 어찌하여 식물을 기르십니까?"
그가 답했다.
"이 식물을 잘 길러 오러를 천천히 성장하게 하는 식물로 만들려고 하네. 내 후계자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키우는 것일세."
그는 자신이 행하는 마법이 아주 위험하다는 이유로 마나의 축복이 깃든 몇 명만 그 식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신의 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마나의 축복이 깃든 아이들이 제국에 발견되기 전에 숨겨 신의 정원사가 되게 했다.
군에서 은퇴한 마법사들도 종종 얼굴을 비쳤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사라졌다.
애지중지 가꾸던 식물들은 모두 말라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슬픔에 빠졌다.
그러던 중 정원에서 발아한 아주 작은 감자 싹 하나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 남긴 증표로 삼았다.
그리고 신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신의 정원사 역할을 했던 마법사들은 사제가 되어 신의 놀라운 기적을 전파하고, 신이 남긴 감자를 기르기 시작했다.
감자는 마력을 섭취하고 성장이 아주 느린 대신, 먹으면 일시적으로 오러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사제들은 신에게 '돌아올 이'라는 뜻의 '아텟'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이것이 전부요."
어두운 감옥, 전신에 멍과 상처가 가득한 사내가 얻어맞아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4군단에서 잡아 둔 사교의 사제였다.
나는 지금 그를 독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황자를 습격한 건 뭔데?"
"신께서 하시던 혼잣말이 있었소."
"뭔데?"
"서비어를 막아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놈의 다 해져 가는 옷의 멱살을 틀어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놈의 손과 발에 묶여 있는 마력 구속구가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 한마디 때문에 황자를 죽이려 들어?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야!"
둘밖에 없는 지하 감옥에 내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커헉!"
기력이 쇠한 남자가 기침을 하자 입 밖으로 피가 주륵 흘렀다.
몇 방울이 튀어 내 소매를 적시고 얼룩을 만들어 냈다.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 퉁퉁 부은 눈두덩이 사이로 눈을 빛냈다.
"신께서 남기신 한마디요. 이유는 모르지만, 신의 명이라면 서비어를, 제국을 막아야 하오."
사제의 눈에서는 광기가 흘러넘쳤다.
멱살을 다시 한번 틀어잡고 어금니를 악물며 말했다.
"그는 신이 아니야."
사제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도 또박또박 내뱉었다.
"당신이 신을 뵈었어야 하오. 그분은 우리의 상식과 기준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마법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셨소. 신께서는 그것이 마법이라 하셨지만, 옆에서 본 나는 그것이 마법이 아니라 생각하오, 그것은 기적이오."
쌕쌕거리면서 숨을 고르던 그가 다시 말했다.
"신은 이 불평등한 세상을 참다못해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오. 그리고 우리에게 암시하신 것이오. '서비어를 죽이고 제국을 멸망시켜 이런 불평등한 세상에 평등을 가져오라.'고. 또한 당신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 우리의 의지가 약해질까 먼저 모습을 감추신 것이오."
"서비어를 죽이고 제국을 멸망시켜?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신의 의사는 직접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오. 무수한 암시와 비유 속에 내리는 것이 그의 뜻이니, 서비어를 벌하지 못한 당신의 과오를 우리 앞에서 말하셨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요, 의무인 것이오."
"네 멋대로 해석한 거잖아!"
사제가 우월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신을 보셨소? 나는 신을 뵙고 말을 나누었소. 그분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자가 나일 것이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논리였다.
-진정해. 이놈은 미친놈이야.
투브의 말에 당장이라도 이 정신병자 놈을 흠씬 두들겨 패고 싶던 감정을 조금 추슬렀다.
놈의 멱살을 놓자 일어설 힘도 없는지 바닥으로 무너지더니 간신히 등을 벽에 대고 앉았다.
'이타르가 왔던 것은 확실해.'
-내가 들어도 이타르야. 뒤처리를 확실히 하지 않고 떠난 것 같은데.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이겠지. 다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아, 이놈을 조금 더 캐야 해.'
목소리를 한층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럼 그 신은 어디로 간 거지?"
"말없이 오신 것처럼 말없이 떠나셨소. 남겨진 우리는 신께서 내리신 과업을 수행하며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릴 뿐이오."
이 사제라는 놈은 대화를 할수록 짜증이 솟게 만드는 재주를 지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골통을 부숴 짜증 나는 대화를 멈추고 싶은 충동을 다시 한번 잠재웠다.
"사제, 아니 정원사는 너 하나가 아니지?"
고통 속에서도 잘만 떠들던 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 뒤에 그가 다시 말했다.
"다른 사제들은 당신들이 죽였소, 모를 뿐이지. 나 혼자 남았소."
"거짓말은 적당히 해."
"정말로 다 죽었소!"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던 사제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꺾었다.
"나는 너희가 습격한 곳에 있었어."
목이 뒤로 꺾인 채 가쁜 숨을 쉬고 있던 사제의 숨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너는 그곳에 있던 마법사가 아니야. 그 녀석이랑은 파장이 달라."
마법사는 똑같은 마법을 써도 사람마다 변환할 수 있는 마나의 정도와 양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고유한 파장이 남는다.
내가 가급적이면 마법을 쓰지 않으려 하는 큰 이유이기도 했다.
제국에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의 파장이 남아 있으면 충분히 곤란해질 수 있었다.
"거…… 거짓말, 당신은 마나의 축복이 깃들어 있지 않아. 나는 알 수 있어."
마법사라면 좋든 싫든 일반인과는 다른 기운이 흐르고, 같은 마법사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오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오러를 익힌 것은 티가 나지만 변환 인자의 힘으로 마나가 마치 몸 안의 오러처럼 흘렀다.
따라서 육안으로 보기에 나는 마법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네가 그리 숭상하는 신에게도 마나의 축복이 깃들어 있던가?"
"그분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되오!"
쿨럭거리며 거친 숨과 함께 피를 내뱉은 놈의 귀 옆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내가 마나를 다룰 수 있다 하면, 어떻게 되지?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후계자는 오러와 마나를 같이 다룰 수 있다며?"
그리고 놈의 머리채를 놨다.
사제가 비틀거리며 다시 벽에 등을 댄 뒤에 조소를 품었다.
"어설픈 거짓말로 나를 현혹하려 하지 마시오. 신께서는 자신의 후계자라면 그 증거를 들고 올 것이라 하셨소."
손을 휘둘렀다.
서걱!
놈의 가슴팍에 있던 옷이 잘려 나갔다.
이미 넝마가 된 옷이 잘려 앞으로 열렸다.
내 손에는 마나 소드가 들려 있었다.
사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묶여 있는 손 대신 어깨와 팔꿈치로 퉁퉁 부은 눈을 비볐다.
오러로도 무형의 기운을 뿜어낼 수 있지만 이렇게 완벽하고 정교한 형태의 무기는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마나 소드를 사제의 목에 겨누고 말했다.
"나는 신의 정통성 있는 후계다. 이것을 보았으니 의심을 거두리라 믿겠다. 신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왔으나 이미 떠나신 뒤였다. 아는 모든 것을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