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2)
기사단의 이름과 문장.
명분과 허례에 집착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명성, 이른바 이름값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한다.
송곳니 하면 적의 숨통을 노리고 날아드는 송곳니가, 붉은방패 하면 방패 안에 맴도는 열성이 느껴지는 것처럼.
"이름과 문장이라…… 중요하지. 멋대가리 없이 지으면 부르기도 싫거든."
잠시 고민을 했으나 송곳니와 검은 늑대에 익숙해진 세월이 길어 바로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일단 생각을 더 해 보는 쪽으로 하자고. 당장 시급한 문제는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투브에게 말했다.
"살펴봤어?"
-다 별로야.
"네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야?"
-아니야. 그 로하나스인지 누군지 하는 애송이 기준으로 맞춘 거야.
백작 가문에는 100명의 기사단이 허용된다.
원래 카몰을 다스렸던 스타리옷 유제프 후작 가문에는 강철바위 기사단이라는 150명의 기사가 있었지만, 스타리옷 유제프와 스테판 유제프 부자(父子)가 죽고 아예 후작 가문 자체가 사라지자 이들의 거취가 붕 뜨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토지를 수여받아 카몰 내의 자작이나 남작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봉급을 받기 때문에 영주들처럼 엄격하게 계약관계를 따질 생각은 없었다.
또한 강철바위 기사단은 개개인의 역량보다는 집단 전술에서 탁월한 면을 보이는 기사단이기 때문에, 개인의 역량 및 집단 전술 모두 최상위권을 다투는 송곳니 기사단과 매일같이 훈련해 온 내 눈에는 다 자격 미달이었다.
그래서 후한 퇴직금을 제시하며 기사단을 해체시킨 참이었다.
나는 저들의 원래 주인과 껄끄러운 사이이니 저들 입장에서도 억지로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어차피 카몰에는 다른 유제프들이 많다.
저들을 받아 줄 곳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 창설될 내 기사단의 단원이 되고 싶다고 남은 자들을 투브에게 살펴보라고 한 참이었다.
그리고 투브는 눈에 든 사람이 하나도 없는지 저렇게 말하는 것이고.
"데리고 온 송곳니 20명은 분명 큰 힘이지만 앞으로 80명을 더 모아야 해. 만만치 않겠어. 어중이떠중이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만들고 싶지 않아."
-니네 아버지한테 좀 더 떼 달라고 하지 그랬어?
"자식이 분가할 때도 안 내준다는 게 잘 키운 기사단원이야. 20명이면 엎드려 절해도 모자라."
기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산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먹고 자고 수련하고 대련하는 것이 기사의 일상이다.
생산성만 따지면 7살짜리 빵집 도제보다 못한 것이 기사인 것이다.
전쟁이나 하다못해 영토를 둘러싼 국지전이라도 자주 있으면 모를까, 지금 같이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에는 한 달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것이 기사단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제한된 기사단 정원을 채우지 않거나, 심지어는 기사단을 아예 두지 않는 가문들도 있었다.
여하튼 이 엄청난 유지 비용 때문에 기사 하나를 키워 내면 저택의 기둥 하나가 뽑혀 나간다는 말도 있는 판에, 다른 기사단도 아니고 송곳니 기사단을 20명이나 내게 내려 준 것은 아버지가 통 큰 결정을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기사들이 자신이 계약한 것은 원래의 주인이니 아무리 핏줄이라지만 못 따라가겠다 하면 강요를 할 수 없었으나, 내 경지를 체험한 송곳니 기사단원들이 많아 필요한 자들만 골라 올 수 있었다.
"기사단 모집 공고를 내야겠네. 한동안 북적거리겠어."
-그렇게 한다고 사람들이 모일까?
"송곳니 기사단이었던 사람과 한솥밥을 먹을 기회야, 그것도 현역이랑. 솔깃한 사람들이 꽤 많을걸."
알버트를 쳐다봤다.
"그리고 무패의 호위에 대한 소문이 생각보다 많이 퍼졌던데? 알버트와 검을 나누어 보고 싶은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으니 흥행이 좀 되지 않겠어?"
***
"이름이 뭐지?"
내 물음에 앞에 선 남자가 작은 체구를 바로 하고 답했다.
"그레인 홀입니다."
이 남자는 가장 처음 스토나 백작의 장부에서 가문 발전금 내역을 찾아낸 관리였다.
가문 발전금은 장부에 적히기는 하지만 세금보다는 가문의 비자금 성격이 강해서 잘 공개하려 하지 않고, 찾아보려고 하는 품목도 아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내려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게 성과를 들고 왔다.
스토나 지역이 내 직할령을 제외하면 카몰에서 가장 큰 영지임을 생각하면 살펴봐야 할 품목이 1~2개가 아닐 것인데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다 살폈다는 얘기다.
단순히 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실력이 좋았다.
현재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공작 작위를 이어받았다면 제뉴인에 있는 많은 영주들의 충성과 일편단심으로 가문을 위해 일하는 가신들을 그대로 흡수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능력 좋은 녀석들을 내 것으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걸린다.
일단 당장 주위 있는 놈들을 내 것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나이는?"
"32살입니다."
"관직에는 언제부터?"
"19살부터 하급 관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천? 아니면 청탁?"
하급직은 귀족들이 자신의 인맥을 꽂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일 처리를 편하게 하고 관에 줄을 만들어 두기 위함이었다.
내 말을 들은 그레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시험 보고 통과했습니다."
다행히 어디 끄나풀은 아니었다.
"출신은 평민이겠군? 귀족 자제들은 숫자 놀음을 좋아하지 않거든."
"그렇습니다."
귀족과 연이 닿아 있지 않은 데다가 평민.
왜 아직까지 아무도 채 가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로 탐나는 인물이었다.
"스토나 백작의 약점을 잡아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저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관직에 큰 뜻이 있나?"
관직은 그나마 능력 중심이기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많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일 뿐, 고위직으로 갈수록 귀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세무와 같이 딱 봐도 머리 아프고 귀찮은 분야가 그레인과 같은 '교육받은 평민'들이 활약하는 분야였다.
"배운 것이 이것밖에 없어 하는 것이지 큰 뜻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관직은 축재(蓄財)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됩니다. 이렇게 외지로 나와 있으면 수당도 괜찮게 쳐주는 편입니다."
분명 머리가 트인 사람일 것인데 일부러 본질을 향하지 않는 것이, 내가 먼저 말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아, 해 주지.
"내 밑에서 일할 생각 없나? 아쉬워서 그래."
"하나 저는 지금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라……."
"내가 가신으로 삼는다고 하면 큰 문제가 없을 거야."
"가족들이 다 수도에……."
"거참, 걸리는 것이 많은 사람이네. 봉토 조금 떼 주고 소출권을 줄게. 당연히 제국에서 받는 봉급보다는 많을 거야. 대신 카몰 전체의 금전과 생산물 흐름을 파악해야 할 거야."
"재무 관리관입니까?"
"하는 일은 그렇지.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이름 딱 박아 주지는 못해. 왜 그런지는 알지?"
그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서 일하던 관리들이 그 정보를 사사로이 귀족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리를 그만두면 맡고 있던 직책에 따라 다르지만 5년에서 10년 동안은 귀족의 아래에 들어가 비슷한 업무를 맡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나 귀족들이 공식적인 직위를 주지 않고 '가신이다.', '영지 경영에 필요한 고문이다.' 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 됐네. 바로 눌러앉으면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1년 정도 뒤에 수도 올라가서 사표 써. 사유는 의심 안 받게 적당히 잘 만들어 내."
"장기적인 타지 파견으로 인한 건강 악화 정도면 웬만해서는 괜찮을 겁니다."
이 남자…… 나와 죽이 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빛 교환해 보니 확 느껴졌다.
"좋아, 경과 보고서에도 일 더럽게 못한다고 써 놓을 테니까 무조건 그만두고 내려와. 우린 이제 한배를 탄 거야."
그레인이 꾸벅 절을 하고 나갔다.
일단 하나 확보.
***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응접실에 들어가며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인사했다.
좋은 인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번 얼굴을 익힌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발드 지하임.
수도방위병단 제1마법대대 소속 조사관.
마나 없는 마법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마법사 이상의 마법 지식을 지니고 있는 남자.
"축하 인사라도 드려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각하."
나발드가 일어나 예를 표했다.
"축하 인사는 무슨,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다고. 수도는 좀 한가한가 봐, 여기까지 내려오고?"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응? 무슨 소리지? 과거에서 나발드는 쭉 제1마법대대 소속이었는데?
"라네아 가문의 그 사고와 모의 전투……. 각하를 집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발드가 지레 발을 뺐다.
손을 저었다.
"상관없네. 우연과 사고 아닌가."
"죄송합니다. 그 두 일이 있은 후에 제1마법대대에서 마법사 및 마법 사고를 전담하는 부서가 분리되었습니다."
"처음 듣는군."
"제국 내 마법 사고를 수사 및 연구한다고 해서 임시로 제마수라 불립니다. 사고를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후 처리와 역학조사에 힘을 쓰게 될 것입니다."
젠장, 이것도 내 업보다.
없었던 기관이 생겨 버렸다.
나발드의 집요함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 조심해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책임자인가?"
"과분하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출세했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라스에 나타난 사교도가 마법사였다는 정보를 듣고 가는 중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그 정보는 예전에 위로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지금 와서?"
나발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원래 좀 정리가 된 이후에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정청이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정청이 왜?"
"원래 발달한 마법은 기적이나 이적에 가깝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사정청 측에서는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다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1마법대대였을 때도 은근히 견제하더니, 아예 독립해서 나오니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풍깁니다."
나는 놀라서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발달한 마법은 기적에 가깝다.' 나발드는 이번 사교도 사건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이타르의 마법을 보고 사람들이 멋대로 그를 신으로 삼고 행동했다.
아마 나발드 자신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뒤통수에 소름이 올랐다.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고생이 많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말씀만 들어도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발드가 떠난 뒤, 응접실의 의자에 앉아 가만 생각하다 혼잣말을 했다.
"망할,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오는구먼."
아직은 내 기반이 튼튼하지 않다는 방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