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3)
나발드는 그라스에 머물면서 사제들에 대한 조사를 이어 갔고 내게 간간이 보고서를 올려 보냈다.
엄밀히 따지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나 이미 여러 번 얽혔기에 내 심기가 상하지 않을까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나 또한 괜한 의심을 사지 않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때때로 필요한 것이나 요구 사항이 없는지 확인했다.
"제마수는 다음 주 중으로 철수할 예정이라 합니다."
"별달리 책잡힐 만한 건 없었지?"
"그럴 겁니다. 이전에 사정청이 악착같이 뒤졌는데도 이렇다 할 단서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쪽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조심해. 사정청과 견정관은 충심으로 움직이지만 나발드 지하임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남자야."
"명심하겠습니다."
끼익.
나와 알버트만 있는 집무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밖에 서 있을 시종이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사람이 보이지도 않으니, 투브가 들어온 것이었다.
사실상 내가 작위를 수여받는 것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이 누구인가 따져 보면 아마 투브가 아닌가 싶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신묘한 애완동물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기에 그 누구도 성내에서 투브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도에 있을 때는 그래도 내 방을 비롯한 저택 내부에만 있는 것이 다였지만, 가끔 격무에 시달리다 밖을 보면 느긋하게 그늘에서 배를 까고 자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분명 잠을 안 자도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 일부러 좋은 자리를 찾아 낮잠까지 자고 있을 정도면, 너무 한가해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정도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한 번은 하루 종일 안 보이길래 어디 갔다 왔냐고 했더니, 당당하게 기사단 숙소라고 했다.
'네가 거길 왜 갔냐?'고 다시 물으니 기사단원들은 자기를 반겨 줘서 좋다는 뻔뻔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여하튼 제일 팔자가 늘어진 건 투브였다.
-야, 밖에 조용 좀 하라고 하면 안 되냐?
"밖에 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으니까 그러지.
"지하 연무장 가서……."
자연스럽게 수도의 몬트라우 저택 지하에 있던 연무장을 언급하려다가 말았다.
내가 거처로 삼고 있는 구(舊) 유제프 후작 성의 지하에는 연무장이 없어서 현재 하나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안 자도 된다며. 자지 마."
-잘 필요가 없다는 거지 잘 수 없다는 게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도 충분히 시끄럽네. 내려가서 한마디 해.
실제로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옷이 철그럭거리는 소리, 말이 푸르릉대는 소리, 무기를 손질하는 소리 등등 마치 전쟁터 같은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참아. 사나흘 정도는 이럴 거야."
내가 카몰에 내려오고, 영주들의 기강을 세운 게 벌써 네 달 전이었다.
그동안은 기본적인 업무 파악과 영주가 사라진 그라스, 케이신리의 뒤처리 및 행정 체계를 새로 개편하는 것에 몰두했었고, 정식으로 가문의 기사단을 충원하겠다고 황실에 보고한 것이 두 달 전이었다.
황실은 내 요청을 허용해서 제국 내의 관공서와 군부대에 내가 지정한 날짜가 적힌 공문을 내려보냈고, 그 날짜가 내일이었다.
따라서 현재 성 외부의 공터에는 며칠 전부터 당도하기 시작한 기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소란스러움이 싫어 바깥 도시에서 머물고 있는 기사들도 있을 테니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제법 올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이 왔네. 무패의 호위가 궁금하긴 한가 봐?"
옆에 있는 알버트를 보고 말했다.
황제에게 직접 봉작을 받았다 해도 기사단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신생 영주에게 몸을 의탁하고 싶어 하는 베테랑 기사는 없다고 봐도 좋았고, 따라서 금전을 풀거나 상대적으로 정식 기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기사들을 중심으로 운영해 가야 했다.
그에 따라 신생 영주가 세력을 만들고 성장할 시간을 주기 위해 봉작을 기준으로 10년간 모의 전투 신청이 금지되어 있기도 했다.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아마 도련님의 위엄과 송곳니의 명성을 듣고 모인 것이겠지요."
"그럴까? 그 거친 히베아 기사들을 다 꺾은 사람이 있는데?"
앉아 있던 의자에서 뒤로 기지개를 쭉 켜면서 말했다.
"그래도 알버트를 노출할 수는 없지, 기사도 아니니까. 하지만 내게는 최강의 눈!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
투브를 바라보며 말하는데 투브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안 도와준다.
"왜!"
-약 만지는 꼬맹이면 충분했지! 네가 쓸 사람들이니까 네 눈으로 보고 네가 결정해서 골라.
"저비스를 잘 키운 덕에 네가 반지 삼킨 것도 큰일 없이 넘긴 거잖아!"
-반지는 내가 끼지 말랬는데 네가 덥석 끼는 바람에 그 사달이 난 거 아냐!
"반지 안 꼈으면 거기서 죽었어!"
-내가 안 데리고 나왔으면 넌 뼛조각 하나도 안 남았어, 인마!
투브와 얼굴을 맞대고 성을 내고 있으니 알버트가 말렸다.
"도련님,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정하시지요."
알버트는 내가 투브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또한 투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마 알버트 눈에는 내가 투브를 앞에 두고 혼자 화를 내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큼……. 너 내가 데려오는 애들 보고 놀라지나 마라."
-눈이 옹이구멍은 아니길 빈다.
당장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20명의 기사들이 내게 예를 갖췄다.
"됐고, 너네 저기 온 기사 중에 동문들 있지? 선배, 후배 상관없어. 아는 대로 다 뱉어."
***
"먼 길을 와 주셔서 고맙소."
목소리에 오러를 담아 주위에 말했다.
나는 지금 도시 바깥의 들판에 만들어진 작은 단상에 올라서서 말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기사들이 모여 어떤 방식으로 모집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본 결과, 일종의 비무 대회를 통해 실력자들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마련한 장이었다.
자신만의 비밀이 노출된다고 생각해서 환영하지 않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여기서 이름을 떨치면 설령 기사단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기사단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으니 대다수는 반기는 추세였다.
"이틀 동안 기마전, 맨손 격투, 지상 전투를 시험해서 인원들을 정리한 뒤, 이후 합격자들 간의 비무를 시행할 예정이오. 비무 우승자는 바로 신생 기사단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설령 일찌감치 탈락했더라도 내가 구상하는 기사단의 색과 맞으면 받아들일 것이니 최선을 다하길 바라겠소."
내 말이 끝나자 기사와 시종 외에도 임시로 만든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비무 대회 형식의 기사단 충원은 드문 일이라 다른 지방에서까지 날짜를 맞춰 이것을 보러 온 사람들도 많아, 도시의 숙박업소와 음식점은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었다.
'그래, 돈 펑펑 써라. 이걸 다 사비로 준비했는데 나간 만큼은 들어와야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주머니를 풀었대?
'내 기사단 만들자고 세금 쓰면 평판이 바닥을 쳐요, 안 쳐요? 또 이렇게 자기 돈 안 들이고 놀게 해 주면 사람들이 좋아 죽어요. 기분 좋아지면 돈을 펑펑 푼다니까?'
-그럼 그렇지.
사람들이 잠잠해지자 내가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기사가 가져야 할 덕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의리와 믿음이라 생각하오. 기사들이여, 대회 기간 동안 접근해서 자신의 기사단으로 오라고 하는 귀족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내게 말하시오. 그대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높게 치겠소."
내 말에 따로 마련된 곳에 앉은 귀족들 중 몇이 내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기사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흔치 않으니 아마도 구경을 핑계로 와서 어디 건질 만한 기사가 없나 보는 놈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구 좋으라고? 절대 안 돼.'
귀족들을 향해 있던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앞으로."
내 말이 떨어지자 20명의 송곳니 기사단이 완전무장을 하고 나와 내 앞에 섰다.
송곳니 기사단의 상징인 검은 갑옷을 입고 서 있는 20명의 기사들의 기세가 앞에 서 있는 300명의 기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신생 기사단의 주축이 될 이들이 심사관이 되어 첫 번째 관문에서 그대들을 평가할 것이오."
기사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흘러나왔다.
너무 난이도가 높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살짝 도발을 걸어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상대하기 어렵겠지만, 이들에게 합격점을 받기만 해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니 꼭 이겨야 한다는 법은 없소."
명백하게 자신들을 아래로 보는 듯한 내 발언에 몇몇 기사들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래야 좀 보는 맛이 있지.
"모두 후회 없이 각자의 기량을 펼쳐 주길."
내 말이 끝나자 다시 한번 함성이 하늘을 뚫을 듯이 울려 퍼졌다.
송곳니 기사단을 비롯해서 운집해 있던 기사들이 각자 배정받은 장소로 뭉쳐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준비되는 동안 잠시 내려와서 투브에게 물었다.
"어때? 좀 쓸 만해 보이는 기사가 있나?"
-은근슬쩍 떠보는 거 반칙이다.
"나는 하나 본 거 같은데?"
-누구?
"물어보는 거 반칙이다."
황금 덩이가 굴러들어 왔다.
***
"흐아앗!"
검이 매섭게 검은 갑옷의 빈틈을 노렸다.
태앵!
검의 날카로웠던 기세는 태산보다 더한 진중함으로 앞을 막고 있는 검은색 방패에 막혀 기운을 잃었다.
그리고 방패의 주인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채로, 왼손에 차고 있는 방패만으로 자신을 찔러 들어온 검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쿠당탕!
검은 방패를 들고 있던 로하나스의 기세에, 반격은커녕 방어도 급급했던 기사가 바닥에 넘어졌다.
로하나스가 자신에게 검을 찔러 왔던 기사의 흉갑에 방패 끝을 대고 말했다.
"종료입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
구경꾼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로하나스가 마련된 경기장 밖으로 나와 옆의 시종에게 투구를 벗어 건넸다.
"완전무장 하라니까 왜 경갑옷 차림으로 그러고 있어?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투구를 한쪽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각하!"
그제야 자신의 투구를 받은 것이 시종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깨달은 로하나스가 놀라 소리쳤다.
"많이 컸네. 나랑 대련할 때는 작은 방패였는데 지금은 꽤 큰 방패 쓰고."
로하나스는 지상 전투 시험관 중 하나가 되어 지원자들을 심사하는 중이었다.
나보다 2살이 많으니 로하나스도 16살이다.
아직 정식 기사가 되려면 몇 년 남았지만, 아버지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의 전력은 웬만한 기사를 능가하고 있을 것이다.
"저도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하하!"
"그래 보이네. 그건 그렇고, 어때? 좀 괜찮은 기사들 있어?"
"없지는 않지만, 전체 비율로 보면 아주 적습니다. 저와 호각인 기사가 하나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저보다 못합니다. 눈을 좀 낮춰서 제게 진 기사들도 일단 비무까지 좀 올려 보내야 하나 하고 생각 중입니다."
"그래, 그건 뭐, 네가 알아서 하고. 어차피 그렇게 해 줘도 올라가서 걸러질 놈들은 다 걸러져."
"그렇습니다."
그때 맨손 격투에 있던 지원자조가 지상 전투조와 자리를 바꿨다.
"저 조가 마지막입니다."
"그래? 거의 마무리되어 가나 보네."
맨손 격투조를 바라보던 내가 살짝 웃었다.
"로하나스."
"예."
"너도 그 얘기 아냐, 알버트 얘기? 그 무패의 호위인가 하는 거."
"예, 알버트 경께서 각하와 함께 여행하시면서 히베아 영주들의 기사를 모두 꺾었다고 들었습니다."
"붙어 보고 싶지 않아?"
실제로 그 소문이 퍼진 후 수도에 있을 때나 이렇게 내려와 있을 때나, 기사들은 목검 대련이라도 좋으니 알버트와 검 한 번만 섞어 보게 해 달라고 내게 사정사정해 왔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그 대련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것은 어찌하여 물어보십니까?"
손을 들어 맨손 격투조의 한 기사를 가리켰다.
두터운 중갑을 입고 투구 가리개를 내려 얼굴과 체형을 잘 알 수 없는 기사였다.
"저 기사 이기면 알버트랑 대련하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