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4)
챙!
검이 방패에 부딪쳤다.
작은 불똥이 생겼다 사라졌다.
잠깐의 충돌이었지만 로하나스의 얼굴이 달라졌다.
"흠!"
"……."
로하나스의 방패를 향해 검을 내리친 기사가 흥미롭다는 듯이 거리를 벌려 로하나스와 간격을 유지했다.
여전히 얼굴을 투구 가리개로 가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중갑의 기사가 로하나스를 향해 검 끝을 겨눴다.
"어이! 잠깐!"
내 외침에 로하나스와 중갑의 기사 모두 살짝 긴장을 풀었다.
내가 기사를 향해 물었다.
"당신! 정말로 입단이 목적인가? 내가 알기로 그대는 주인을 섬기지 않는 자일 텐데."
"……."
"목적을 말해. 나는 그쪽이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는 입장이야."
중성적인 목소리가 투구 가리개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입단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당신과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나?"
기사가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네. 역시 특이해. 그럼 이렇게 하자고. 당신 앞에 있는 기사를 제압해. 그럼 내가 나서지. 미리 말하지만 로하나스는 아버지께서 직접 길러 낸 유일한 기사야."
그 말에 중갑의 기사가 고개를 조금 돌려 로하나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중성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로하나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압은 죽이는 것보다 배는 어렵다.
게다가 수많은 기사들이 가르침을 청하는 웨폰 마스터, 제로 몬트라우가 직접 가르친 기사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분노할 만도 했다.
"대신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줘야 해. 어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쪽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거야."
중갑의 기사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저 기사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 건 확실해. 다만 지금의 성취를 확인해 보고 싶어. 로하나스의 성장도 확인할 좋은 기회야.'
다른 조들은 평가가 끝났는지 다른 쪽에 마련되어 있던 기마전과 맨손 격투 쪽에 있던 기사들과 관중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나와 있는 것뿐만 아니라 두 기사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긴장감을 보고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보는 눈도 많아졌군. 15분! 한쪽 손에서 무기가 떨어지거나,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 나오면 끝나는 것으로 하지? 동의하나?"
"예."
"……."
로하나스가 답하고 중갑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비무 전, 1차 관문의 마무리는 이것으로 하지. 송곳니 기사단원들은 로하나스가 맡아야 했던 다른 기사들을 빠르게 시험하도록. 마무리되면 다시 둘을 올리겠어."
내 옆으로 다가온 로하나스에게 말했다.
"쉽게 보지 마라. 상대는 만만치 않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느새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소의 안색으로 돌아온 로하나스가 차분하게 답했다.
-저 기사는 얼굴을 보지 않아서 읽어 낼 수가 없네. 뭔데? 알려 줘!
'물어보는 건 반칙이란다.'
***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나고 완전무장을 한 로하나스와 중갑의 기사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관중에게까지 전해지는 듯,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크게 내는 사람이 없었다.
"각자에게 약속한 조건과 보상을 어길 생각은 없다. 각자 최선을 다해 주길."
중갑의 기사가 긴 대검을 앞으로 내밀어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로하나스는 등에 메고 있는 단창을 한번 점검한 후, 방패를 올려 그 위에 검을 얹었다.
나도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자세였다.
"시작이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갑의 기사가 땅을 박차고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입고 있는 갑옷의 무게만 해도 엄청날 텐데 대검까지 쓰는 기사가 먼저 달려들었다. 중갑의 기사가 오러를 아주 효율적으로 다루거나, 그렇지 않다면 운용할 수 있는 오러의 양이 엄청나다는 소리였다.
관중이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귀를 메울 듯한 소음 속에서 중갑의 기사는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대검을 로하나스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오러 실린 검이 공기를 가르며 만들어 내는 검풍(劍風)이 휘몰아쳤다.
로하나스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대검의 힘이 집중되는 타격점을 혼란시켜 힘을 분산시키려는 좋은 시도였다.
"그걸로 되려나?"
말을 하는 순간 로하나스의 방패에 고루 퍼져 있던 오러가 방패 위의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정확히 대검이 방패를 가격하는 지점에 생긴 점이 푸르게 빛났다.
"일점(一點)!"
알버트가 지하 연무장에서 나무 인형을 박살 내며 보여 줬던 기술이었다.
아주 작은 지점에 오러를 집중시켜 효율과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기술, 로하나스는 그것을 방어에 응용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재능과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인가.'
이전 생의 로하나스는 군인으로 10년을 떠돌았는데도 결국 송곳니 기사단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현생의 로하나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성장했으니,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과 노력이 어우러져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쉬이익!
대검과 방패의 충돌 지점으로 공기가 빨려 들었다.
그리고…….
쿠와아아!
엄청난 양의 바람이 주위로 휘몰아쳤다.
관중은 얼굴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모여 있는 기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비무장 위의 둘을 보고 있었다.
나 역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둘의 결투를 계속 바라봤다.
"하아아아아!"
성공적으로 대검을 막아 낸 로하나스가 공세로 돌아서서 중갑의 기사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방패와 검의 유기적인 움직임에 기사의 대검은 간신히 급소만 방어할 뿐, 처음과 같은 기세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갑의 기사도 당하고만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오러를 끌어모으더니 대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로하나스가 예상했다는 듯이 방패를 대검의 검로에 미리 대기시켰다.
콰앙! 콰앙! 콰앙!
분명 접촉은 한 번일 텐데 폭음이 세 번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변칙적인 공격에 로하나스의 방패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동작에 멈춤이 없었는데 오러만 움직여서 연속적으로 때려? 엄청 정교하게 오러를 다루는데?
마치 투브의 말을 들은 것처럼 알버트도 한마디를 보탰다.
"다른 부분은 다른 기사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오러를 다루는 세밀함과 정밀함은 굉장합니다."
"재밌네."
팔꿈치를 밀어 넣어 방패와 팔을 밀착시켜 주는 고리에서 로하나스가 팔을 뺐다.
방패가 로하나스의 팔에서 스르륵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비무장이라고 해 봐야 시간이 많이 없어 땅을 고르고 구역만 구분 지어 놓은 곳이다.
방패가 땅에 부딪혀 흙먼지가 작게 일었다.
풀썩.
이어서 로하나스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한손검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뒤이어 등에 매여 있던 단창을 꺼내 들었다.
"공격하겠소."
말을 꺼내기 무섭게 로하나스가 중갑의 기사 앞으로 몸을 날리더니,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흉흉하고 예리한 기세로 창을 찔러 나가기 시작했다.
***
"허억……. 허억……."
로하나스가 거친 숨을 쉬지 않고 뿜어 댔다.
"……."
대검을 든 중갑의 기사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미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숨을 쉴 때마다 갑옷이 크게 움직였다.
게다가 갑옷 이곳저곳이 로하나스의 창에 맞아 우그러져 있었다.
웬만한 공격은 맞아도 특유의 곡면이 흘려 내는 것이 판금 갑옷이다.
로하나스의 공격이 얼마나 패도적이고 우악스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로하나스도 갑옷의 한쪽 어깨 보호대가 부서지고, 투구 끝이 휘어져 있었다.
격전의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며 열광하던 관객들도 어느새 진지해진 분위기에 침 넘기는 소리도 조심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내가 일어나 말했다.
15분의 제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뒤집어 둔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다 떨어져 내린 지는 이미 꽤 되었지만, 둘의 실력을 보기 위해 일부러 전투를 중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지속은 둘에게 해만 될 것 같았다.
"더 할 수 있습니다!"
어금니를 악문 로하나스의 외침이었다.
"아니, 넌 알고 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뒤의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의 단언에 로하나스는 분하다는 듯이 단창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중갑의 기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뒤로 돌아서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쳤다.
"오늘은 여기까지요! 내일은 진정한 비무가 이루어질 것이오!"
긴장감과 압박감 때문에 쥐 죽은 듯 있던 관객들이 내 말에 해방구를 찾은 듯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
그날 밤, 내 침소에서 투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마구 물었다.
-반칙이야! 분명 이전 생에서 알고 있는 인물일 거야! 맞지!
"나는 모르는 일인데?"
내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모르는 체하자 제 분을 못 이긴 투브가 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으아아아! 사악한 놈! 아니, 그놈은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야! 읽어 낼 수가 없어!
"하나 알려 줄까?"
내 말에 투브가 내 앞으로 달려와서 눈을 빛냈다.
-뭔데?
"아마 이변이 없다면 비무 우승자는 그 기사야."
투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닐걸.
"뭐야, 봐 둔 사람 있어?"
-당연하지. 나도 눈이 있는데.
"누구?"
오늘 송곳니 기사단원들이 지원자들을 시험하고 내게 보내온 서류를 투브 앞에 쫙 펼쳐 놨다.
수백의 지원자들 중 비무장에 설 수 있는 것은 16명뿐.
-이렇게 보면 몰라. 얼굴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로하나스와 붙은 그 기사는 아니야?"
-아니지. 그 기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으니까.
"누구지?"
내가 모든 시험장을 다 가 볼 수는 없었기에 지원자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투브는 제멋대로 이곳저곳을 누볐기에 정보량에서 차이가 난다.
기사단원들에게서 들은 얘기를 떠올려 봐도 내가 알고 있는 중갑의 기사에게 비견될 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긍금하냐?
투브가 슬그머니 물었다.
-너는 그 중갑의 기사가 비무에서 우승할 거라는 얘기지?
"확실해."
-내일 내가 찍은 놈을 알려 줄게. 둘 중 누가 우승하나 내기해.
"내기? 내가 내기하면 그렇게 안 좋은 눈으로 보더니, 내기? 무슨 바람이 불었대?"
-할 거야, 말 거야?
대검을 쓰는 그 중갑 기사를 투브는 읽어 내지 못했고, 나는 중갑 기사의 과거 위력을 알고 있다.
누굴 골랐을지는 몰라도 내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좋아, 하자고. 그런데 뭘 걸 수 있는데?"
-음…… 걸 만한 게 없는데…….
"네가 지면, 내가 원할 때 널 탈 수 있게 해 줘."
그 얘기에 투브가 자세를 낮추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별것도 아니잖아!"
-별게 아니라니! 자존심이 있지!
"그럼 이기면 되겠네, 안 그래? 네가 본 기사가 무조건 우승이라며."
이제는 발을 뺄 수 없는 영역에까지 와 버렸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인 자에게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는 사나이의 승부였다.
-좋아, 대신 내가 이기면 기사단 이름을 투브 기사단으로 하고, 가문 문장을 내 발자국으로 해. 또 이 도시 중앙에 내 동상을 세워.
"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거야, 엔데의 그 동상?"
-할 거야, 말 거야!
이젠 지든 이기든 오기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