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67화 (67/180)

선택과 집중 (5)

부웅!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 끝이 멈춰 있지 않고 미미하게 흔들렸다.

로하나스는 오러를 운용해서 떨리는 손을 보조하려 했으나, 이미 계속된 훈련으로 지쳐 버린 정신과 육체는 몸 안에서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오러를 밖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젠장!"

더 이상은 목검 한번 휘두를 힘도 없는 로하나스가 연무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연무장의 찬 바닥이 등을 비롯한 몸 뒤를 훑었다.

미친 듯이 뛰며 온몸으로 피를 밀어 보내는 심장의 쿵쿵거리는 소리만이 로하나스의 전신을 울렸다.

이제야 해가 뜨면서 밖으로 슬슬 드러나기 시작한 어스름한 새벽, 로하나스는 비슷한 때가 기억났다.

그의 스승, 제로 몬트라우 제뉴인 공작이 훈련하다 나자빠진 그에게 물었었다.

"어떻게 하면 강해진다고 생각하느냐?"

엉거주춤 일어난 그때의 로하나스가 말했다.

"오러를 상대보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왜.

왜 그래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로하나스는 입이 막혔다.

"……."

제뉴인 공작이 놓여 있던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와서는 로하나스의 머리를 반으로 가를 듯이 내리쳤다.

움직일 기력도 남아 있지 않던 로하나스는 전신을 압박해 오는 기세에 눈을 감아 버렸다.

스륵.

코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로하나스는 살짝 눈을 떴다.

도끼가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서 일절 흔들림 없이 멈추어 있었다.

도끼날에 잘려 나간 머리카락 몇 올만이 로하나스의 코와 얼굴에 붙어 있었다.

"오러는 중요하지만, 절대로 주가 돼서는 안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몸이다. 몸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 미세한 것을 보조하는 것이 오러다. 신체는 한계가 있고 오러는 한계가 없어 보이니 기사들은 쉽게 오러로 눈을 돌리지. 그러나 오러는 답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것도 답이 될 수 없지."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신체도 제대로 모르면서 위력만을 위해 오러를 사용하는 것은 독에 불과하다. 움직임 하나하나를 생각하고 탐구해라. 극한에 이른 움직임을 오러가 보조할 때,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효율적이며 파괴적이다."

마치 유령처럼 뒤로 물러난 공작이 도끼를 원래의 자리에 올려놨다.

'몸은 주(主)고 오러는 부(副)다.' 이것을 마음에 품고 노력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원숙한 기사들도 이르기 힘들다는 일점의 경지를 로하나스는 정식 기사가 되기도 전에 맛보았다.

그러나 로하나스의 마음에는 기쁨보다 호기심이 먼저 생겼다.

'과연 지금의 나는 예전의 어린 주인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로하나스는 자신 정도면 또래 중에서는 겨룰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몇 년 전, 시안이 보여 주었던 압도적인 경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호기심과 호승심.

이 둘 때문에 시안이 백작이 되어 내려간다고 했을 때 아무 미련 없이 송곳니를 벗어나 그를 따르겠다고 자원했다.

하지만 지금 꼴이 뭔가.

얼굴도 모르는 기사에게 15분 내에 제압할 수 있다는 소리나 듣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혀를 놀리는 녀석을 이기지도 못했다.

분했다.

자신의 실력을 멋지게 증명할 기회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분했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무의 기본이라고 수도 없이 배우고 익혔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젠장!"

로하나스가 어금니를 질끈 물며 내뱉었다.

그때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냐?"

시안이었다.

놀란 로하나스는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온몸에서 고통의 신호를 보내는 근육 때문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치고받고서 다음 날 아침까지 훈련을 하고 싶냐? 무식하기는……."

로하나스의 옆에 시안이 털썩 주저앉았다.

***

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지만 로하나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기사의 길을 걷고 있고 나이에 비해 높은 성취를 이루어 냈지만, 16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열 받냐? 짜증 나고, 막 그래?"

로하나스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살아 보니까, 우리는 항상 우물 안에 있더라.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말 있잖아, 딱 그거야. 내가 좀 뭘 해냈나? 싶으면 그 정도는 더 일찍 해내고 이미 더 높은 곳에 있는 놈들이 많더라고. 이게 참 뭣 같아, 안 그러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로하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전 생의 로하나스도 꽤나 괄괄한 성격이었지.

"근데 그 사람한테는 그 사람의 길이 있고, 너한테는 네 길이 있고, 나한테는 내 길이 있는 거야. 어쩔 수가 없어. 분해도 그냥 잊고 내 할 일 해야지 어쩌겠어. 저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죽일 거야, 어떻게 할 거야? 뭐, 사고를 당해서 죽었다고 치자. 그럼 그만한 다른 사람이 없을까? 득실득실해요."

이번 삶에서 특히나 느끼고 있었다.

이타르나 알버트까지 갈 필요도 없이 투브, 황자, 황제, 크루슈 산맥 안쪽에 있는 상상도 안 되는 괴물들. 모두 각자의 전력을 다하면 내가 상대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너는 어리잖아. 발전 가능성이 차고 넘친다는 것 아니겠냐?"

로하나스의 입 주변이 꿈틀거렸다.

"뭔데, 말해 봐."

"각하께서도……."

이런 나는 현재 이 녀석보다 2살이 어리다.

그런데 너무 노인네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나 보다.

괜히 민망해져서 핑계를 댔다.

"그래! 나도 어리지! 나도 더 발전할 거고 성장할 거야. 주군보다 못한 기사가 될 거야?"

로하나스의 눈에 오기와 열망이 끓어올랐다.

"절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더 노력하고 더 갈고닦아라."

중히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니.

로하나스의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분노를 네 발전의 동력으로 삼되 그 분노에 먹히지 마라."

일어서서 하늘을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져 있었다.

기사단이 아침 훈련을 하려는 듯 숙소에서 하나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이! 이놈 좀 데려가!"

기사단원들에게 크게 소리치고 로하나스에게 말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다음 주부터 알버트가 기사단 고문이야. 짬짬이 도와줄 거야. 지금도 내 비서 일로 바쁘니까 큰 기대는 말고."

로하나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른 기사단원의 부축을 받아 숙소로 가는 로하나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되뇌었다.

"분노에 먹히지 마라……. 내가 할 말은 아니었나……."

***

"나랑 장난하자는 거 아니지?"

-내기 지면 너를 등에 업고 다니고 생겼는데 장난인 것 같아?

내 물음에 투브가 거칠게 답했다.

투브가 봐 둔 인물은 아무리 살펴봐도 비무에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기사들의 신상 정보가 담긴 종이를 펄럭거리면서 몇 장 넘겼다.

이름 칼 모예드, 나이 38세, 경력 적사대(赤沙隊) 13년, 각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적사대라면 하마렐리온 드와이트, 사힘 변경백이 통솔하는 여러 부대 중 하나다.

사힘 지방은 사막 지형이 많아 기사 운용이 힘들어 그곳만의 독특한 여러 편제가 존재한다.

즉, 엄연히 말하면 이 칼 모예드라는 인물은 오러는 쓸 수 있을지언정 기사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안경 하나 맞춰야 하는 것 아니야? 기사도 아닌 양반을……."

-기사에 기준 있나? 수련 좀 하고, 오러 운용할 수 있고, 남들보다 강하면 기사지. 자격증 시험이라도 쳐야 하나?

틀린 말은 없었다.

기사단 구성은 전적으로 주인의 몫. 편법이었지만 모의 전투 때의 스테판처럼 오러를 티끌만큼도 지니지 않은 사람도 기사단의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기사단이라 할 수 있으니 기사에 대해 엄격한 조건은 없었다.

"말은 탈 줄 아나?"

어제의 심사지를 살펴보니 기마전이 중상으로 합격이었다.

기사단원들 기준으로 자신보다 조금 못하면 중상을 줬기에 나쁘지 않다는 소리였다.

"낙타라도 타고 다녔나? 기묘하네."

-잔말 말고 기술자 불러서 동상 만들 준비나 해.

"등에 안장 얹을 준비나 해라."

어제의 심사 결과에 따라 총 16명의 기사가 비무를 펼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상 전투로 시작, 낙마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복이 나오기 전까지는 3분간 더 공방을 펼친다. 그러고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는 경우는 말에 탄 기사가 내려와 지상 전투로 이어진다. 어떤 무기를 써도 상관이 없고, 말을 공격하는 것과 상대를 죽이는 것만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감정이 격해져 해를 입힐 것 같거든 개입하라고 알버트에게 미리 말해 둔 상태였다.

알버트 정도라면 기사들을 제지하는 정도는 쉬운 일 축에도 못 들 것이다.

"시작하지."

***

"둘, 앞으로."

진행을 맡은 남작 하나가 결승전 상대가 될 2명을 불러 올렸다.

중갑의 기사와 칼 모예드, 2명이 가볍게 비무장 위로 올라왔다.

'사힘 지방 사람이 아니었군. 이민족인가? 아니면 페르타 왕국 사람?'

중갑의 기사는 올라올 것이라 믿었기에, 나는 비무가 진행되는 내내 칼 모예드의 역량을 파악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칼 모예드라는 남자는 보고 있으면 홀릴 것같이 기묘한 창술을 사용했다.

자신이 먼저 공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상대의 공격을 방어한 뒤 역습하는 식이었는데, 마치 공격해 오는 사람의 힘에 자신의 힘을 아주 약간만 더해서 그대로 돌려보내는 듯한 방식이었다.

창을 들고서 오러든 완력이든 관계없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힘을 가볍게 몸짓 몇 번으로 되돌려 보내는 모습은 마치 체조를 하는 것처럼 유연하고 우아했다.

하지만 나는 제국 밖의 세계를 겪어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저 우아함 속에는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에서 피가 치솟게 할 악독함이 감춰져 있다는 걸.

또한 칼 모예드는 쓰는 무예의 특성상, 자신의 힘을 많이 내보일 필요가 없었다.

수도에서 이곳 카몰까지, 여유롭게 왔을 때 3주가 걸렸다.

카몰에서 사힘까지는 세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사힘과 그 주변 이민족, 혹은 근처 왕국에서나 볼 수 있는 수를 경험한 기사들은 많지 않다.

칼 모예드의 독특한 기술과 여유로운 운영에 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

'감추고 있는 것이 많아. 첩자인가? 아닌데. 사힘 변경백 아래에 10년이 넘게 있었다고 했는데?'

뭔가 사연이 있는 인물 같았다.

-첩자건 밀정이건, 약속은 지켜라.

'네가 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당당하냐?'

아래의 남작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중갑의 기사에게 말했다.

"결승전 이전에, 투구를 벗고 주최자이신 카몰 백작께 예를 표하시오."

중갑의 기사는 머뭇거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남작이 엄하게 기사를 윽박질렀다.

"어서!"

고민하던 중갑의 기사가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투구를 들어 올렸다.

기사가 투구를 한쪽 옆구리와 팔 사이에 끼우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오!"

관중의 찬사가 터졌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정도의 금발, 새하얀 피부, 에메랄드빛 눈동자, 날 선 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

투구 아래에서 내가 알던 것보다 젊은 모습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던 투브가 내게 말했다.

다급한 말투였다.

-저런 걸 데리고 있겠다고? 제정신이야?

'감상은 됐고, 이래도 네가 이길 것 같냐?'

투브의 답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졌네……. 개새끼.

그건 너고, 인마!

새로운 기사단

기사와 마법사는 분명 강력한 전력이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숙련된 기사 하나가 전력으로 달려드는 군인 서넛 정도는 너끈히 상대한다.

마법사는 어떤가.

긴 준비 시간이 필요하고 발동 이후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 빠지기는 하지만, 안전한 위치에서 대규모 마법을 발동할 수만 있으면 한 부대 정도는 몰살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군인 다섯이나 한 부대라는 한정된 상대가 아니라 수천, 수만의 인원이 달려든다면?

그들도 사람인지라 결국 패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사와 마법사가 전황을 유리하게 가져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만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나지는 않는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예외는 지금 칼 모예드의 기묘한 창술을 거침없이 대검으로 깨부수고 있는 저 중갑의 기사, 오델리아 탈린카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독특한 존재였다.

강자를 찾아 죽이는 것. 그것이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과거의 삶에서 강자들이 있는 곳은 전장이었기에 그녀는 항상 전장에 있었다.

수많은 가문과 제국, 왕국의 뜨거운 영입 요청에도 불구하고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기사단에 속하지 않았다.

1인 용병이 되어 강자가 있는 반대편에서 강자의 목숨만을 노렸다.

그래서 그녀는 기사로 불리기에 충분한 용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기사로 불리지 않았다.

분리 운동 초기, 제뉴인 근처 지역의 영주들과의 전투에서 나를 찾아온 오델리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적당한 돈과 잘 곳만 제공해 주면 같은 편이 되어 싸우겠다던 그녀는, 전장에서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은 채 오로지 상대편 기사단에서 이름난 기사들의 목을 취하러 다녔다.

그때만 해도 그녀의 이름이 퍼지기 전이었기에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저 전장에서 자신을 막는 병사들을 잡초처럼 베어 내는 그녀를 보고 감탄했을 뿐이다.

전투에서 승리한 날 밤, 뺨에 긴 자상(刺傷)을 입은 그녀에게 가서 물었다.

"무엇을 위해 그리 싸우시오?"

오델리아가 나를 흘끗 보고는 말했다.

"앞에 강한 적이 있어 싸우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약속된 보수를 지급했고, 다음 날 그녀는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 이후로 많이도 전장에서 부딪혔었다.

분리 운동이 차차 진압되어 가면서 제국은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질서를 확립했기에, 각지의 제국파 영주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반란군의 기사들은 죽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아지고 우리 쪽의 기사들은 비교적 많이 살아남았다.

강자의 위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델리아의 칼끝은 우리를 향했고, 제국의 많은 기사들이 오델리아의 대검을 피하지 못해 죽어 나갔다.

로하나스도 몇 번이나 오델리아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나중에는 악명이 너무 퍼져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도 오델리아가 상대편에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기가 꺾일 정도였다.

중갑을 입고 가벼이 움직이며 전장을 박살 내는 모습은 내가 봐도 경이로웠다.

나중에는 아예 오델리아를 전장 바깥으로 유인해 내는, 기사로만 이루어진 특수병과를 운용해야 할 정도였다.

제국 최강이라는 붉은방패 기사단도 지원을 왔다가 오델리아에게 죽어 시체로 돌아가는 일이 여러 번 벌어지자, 황제는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델리아를 잡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오델리아 하나만을 노리고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어린아이도 안 하는 짓이라고 누누이 의견을 보냈지만 황제는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2,000의 병사를 희생시킨 끝에 오델리아를 죽이는 데 성공했었다.

케이신리와 팔스타인의 영지전에서 한쪽 진영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가 2,000이었으니, 오델리아 혼자 백작령에서 동원된 병사를 모조리 절단 낸 셈이었다.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델리아 탈린카.

강함에 미쳐 자신마저 버린 여인.

***

-무시무시하구먼.

투브의 말에 다시 비무장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창을 양손에 들고 비무장의 흙바닥에 대자로 뻗은 칼 모예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칼 모예드의 창술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서 받아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주먹으로 고무를 치면 반탄력이 오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는데, 그것도 일반적인 힘의 주먹이어야 가능한 일이지, 오델리아처럼 압도적인 능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먹으로 고무를 때려 찢어 버린 격이었다.

지금의 오델리아는 내가 봤을 때처럼 무지막지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자질은 엄청났다.

일기당천(一騎當千),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는 말에 들어맞는 자가 제 발로 나를 찾아 들어온 셈이었다.

이것도 내가 지금까지 행해 왔던 일이 퍼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기분이 묘했다.

칼의 상태를 확인한 알버트가 오델리아의 승리를 선언했다.

열광한 관중의 환호 속에 내가 아래로 내려가 오델리아의 앞에 서서 말했다.

"우승했군."

오델리아가 투구를 벗어 옆에 끼웠다.

내가 기억하는 상처투성이의 얼굴에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레 묻어 나와 결코 숨길 수 없었다.

더 젊고, 상처 하나 없는 오델리아의 얼굴은 마치 생동하는 꽃과 같았다.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 한 줄기가 그녀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비무였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는 승리의 기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움, 허전함, 갈망이 맴도는 눈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내게 와서 닿았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두고 어디를 먼저 물어뜯어 죽일지 고민하는 야수처럼, 그녀의 눈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누가 포식자고 누가 피식자인지, 차차 새겨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오로지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으로 똘똘 뭉쳐 있네. 그걸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얘는 좀 맛이 간 것 같은데? 강아지가 호랑이보고 으르렁대는 것보다 심해.

'기사 중에도 이런 기사는 드물지.'

-욕망이 이렇게 솔직하면서 오러를 그렇게 정교하게 다뤄? 알 수가 없네.

'순수하게 미친 거지.'

광(狂)기사 오델리아.

수많은 그녀의 별명과 이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끊임없이 수련과 도야를 하는 기사에게 미쳤다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굉장히 모순적이었지만, 전장을 부수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이 광기사라는 단어가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오델리아의 입이 열렸다.

"기사단에 들어가면 각하와 겨루어 볼 수 있습니까?"

우승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왜 나지? 다들 알버트와 한판 해보고 싶어 하던데?"

"모르겠습니다. 각하의 호위도 강하다 들었지만, 저는 각하와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어제 네가 제압하지 못한 기사, 나는 몇 년 전에 그를 이겼어. 단계가 있는 것 아니겠어?"

"그를 꺾으면 각하와……."

내가 오델리아의 말을 끊었다.

"사실 기사단에 들어올 마음은 없었지?"

"……."

오델리아는 어딘가에 속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강자를 찾기 위해 참가했을 뿐, 기사단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 던진 말이었다.

"기사단에 들어와. 다른 기사들과 경쟁하고 성장해. 네가 모르는 것은 빨아들이고, 아는 것은 공유해. 그래서 네가 실력과 신임을 얻어 기사단의 단장이 되면 생각해 볼게."

한참 고민하던 오델리아가 내게 물었다.

"각하께서 제게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로하나스를 제압하지 못한 대신 내가 원하는 걸 한 가지 해 주기로 한 것이 이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거지. 이건 네가 나와 겨뤄 보기 위해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길이야. 네가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난 손해 볼 게 없어."

진짜로 안 들어온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가슴 졸이며 던진 말이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흘리듯 한마디를 더 했다.

"오델리아, 몇 살이지?"

"23살입니다."

"정식 기사가 된 지 5년이 되었겠군?"

"그렇습니다. 이스라리 가문의 청월 기사단에서 견습 기사 기간을 보냈습니다."

"어제 너와 겨뤘던 로하나스는 지금 16살이다."

오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제자이긴 해도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지."

로하나스가 정식 기사가 아니라는 것에 오델리아는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런 로하나스도 송곳니 기사단에서는 막내였어. 나는 적어도 이 정도가 되는 자들이 아니면 받지 않을 거야. 어때?"

"하겠습니다!"

오델리아가 바로 답했다.

"기사단은 말 그대로 단체이기 때문에 혼자 행동해서는 안 돼. 네가 아무리 강해도, 다른 기사들과의 연계와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고.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걸."

슬쩍 한발 빼고 간을 보는 척했다.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기사단을 위한 기사가 되겠습니다!"

오델리아가 몸이 달아 내게 말했다.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자, 그럼."

오델리아의 한쪽 손을 잡고 높이 들었다.

그리고 오러를 실은 목소리로 주위에 크게 외쳤다.

"비무의 승자는 오델리아 탈린카! 신생 기사단인 검은늑대 기사단에 처음으로 영입될 기사다!"

내기에서 진 탓인지 내 옆에서 토라져 있던 투브가 내가 말한 검은늑대 기사단이라는 소리에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살짝 고개를 내려 투브를 향해 찡긋했다.

-너……!

'투브 기사단은 대놓고 촌스럽고, 검은늑대 정도면 좀 멋이 나지?'

-시아아안!

기쁨에 겨워 내게 달려드는 투브를 막느라 비무장의 흙바닥에 그대로 드러눕는 모양새가 되었다.

'야, 좋은 날인데 간만에 한번 보여 줘 봐.'

-그럽시다!

투브가 원래의 모습인 늑대로 변해 고개를 들고 울었다.

아우우우우우!

투브는 재빨리 평소처럼 조금 큰 개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델리아와 내 이름을 크게 연호하기 시작했다.

***

"여기까지 15명?"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많은데? 나는 한 10명이나 들여올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개적으로 열린 기사단 모집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뽑힌 것은 오델리아 탈린카와 칼 모예드를 포함해서 1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투브가 도와줘서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기사들을 데려와서 15명이었다.

결과를 들은 내가 알버트를 향해 말했다.

"고생 좀 하겠어?"

"어째 이타르 님 아래 있을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습니다."

"너무 열심히 알려 주지는 마. 나보다 강해지면 곤란하잖아."

"기사들이 도련님을 넘어서려면 100년은 더 수련해야 할 겁니다."

"저비스도 그렇고, 내 주위에 있으면 사람들이 아부가 늘어나는가 봐."

알버트가 허허 웃었다.

"투브는?"

"아마 밖에 계실 겁니다."

투브는 검은늑대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할 일이 없으면 괜히 기사단 숙소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일과였다.

"참, 나……. 알버트도 나가서 볼일 봐. 오늘은 뭐 별거 없잖아."

이미 25명이 쓸 무기와 갑옷도 다 조사해서 트렛의 즈보크 자작에게 제작을 맡기기 위해 올려 보낸 상황이었다.

"백작들이랑 다른 영주들도 잠잠하고, 기사단도 기본적인 바탕은 만들었고, 관리들이랑 제뉴인 쪽 사람들 섭외하는 것도 잘되어 가고 있고. 믿을 수가 없이 평탄하네."

그러나 평탄함에 취해 무너질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아직 넷 중의 하나를 처치했을 뿐이다.

이렇게 잠잠할 때 조금씩 성장해 나가야 한다.

'일단 오늘의 성장은 임야 개발에 대한 청원 처리부터…….'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올라온 서류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쾅!

봉인이 필요한 문서에 인장으로 밀랍을 묻혀 내 문장(紋章)을 찍었다.

끝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검을 불줄기가 휘감고 있는 형상의 문장이었다.

***

-담쟁이덩굴로부터-

-황실 내부에서 1황자와 2황자 간의 파벌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함. 어떤 노선을 취할지 결정해야 할 듯.-

-엉겅퀴로부터-

-최대한 중립을 지키다가 판이 기울기 직전 합류할 것. 거처가 불안정해져서 자세한 지시는 불가능함. 일선의 판단에 맡김. 점조직 붕괴로 제국 남부의 소식을 알 수 없음. 이상.-급변 (1)

"흐아아앗!"

기사단 숙소 내부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로하나스와 오델리아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련 중이었다.

오델리아의 대검을 방패로 흘려 낸 로하나스가 찰나의 틈을 노려 달려들었지만, 오델리아는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허리를 꺾어서 달려드는 로하나스의 옆구리에 발 차기를 먹였다.

기습적인 충격에 로하나스가 옆구리를 붙잡고 굴렀다.

몇 바퀴를 구른 뒤, 펄떡 일어난 로하나스가 오델리아를 향해 외쳤다.

"갑옷 입었으면 이렇게 못 움직였습니다! 이건 반칙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오델리아가 감정 없이 말했다.

"너도 해, 그럼."

로하나스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나 싶더니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나이를 먹으면 뻔뻔해진다더니 틀린 말이 없군요."

나이라는 말에 오델리아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말이 많다, 애송이."

그리고 다시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맞붙었다.

내 옆에 있던 투브가 내게 말했다.

-몇 년째 저러고 있네, 로하나스가 기사 서임을 받고 난 후에는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둘이 좋아하는 거 아냐?

'쟤네가 네 말을 못 듣는 게 참 다행이야. 들었으면 서로 먼저 너를 패겠다고 나섰을 테니까.'

카몰 백작이 된 지도 5년이 지났다.

이미 성년이 되기 전부터 신체는 또래들보다 더 컸던 나지만, 성년이 지난 지금은 키가 더 크고 근육이 붙어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골반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왔다 갔다 하던 투브의 머리가 허벅지와 무릎 사이에 있었다.

개인적인 수련, 기사단 증원 및 수준 상승, 영민들과 영지의 안정을 위해 꽤나 바쁘게 살아온 나날이었다.

그 덕에 이제는 검을 쓰는 것보다 마나 소드가 더 익숙했다.

비록 남들 눈이 있는 곳에서는 함부로 쓸 수 없기는 했지만.

검은늑대 기사단도 100명을 거의 채워 가고 있었다.

채우려면 진작 인원을 다 채워 버릴 수도 있었지만, 엄격한 기준과 보안으로 하나하나 인원들을 모았기에 아직 정원을 채우지는 못한 것이다.

제국의 정세는 꽤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 몬트라우, 내 할아버지는 내 이전 생과 같이 내가 성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비슷한 때 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황제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다만 오늘내일하는 신세로, 지금까지 2황자의 세력을 키워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장 중요한 태자 책봉을 하지 못했다.

1황자가 망나니이기는 했지만 폐위시키기에는 그가 지닌 장자라는 명분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히 제국의 귀족들은 1황자와 2황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나한테도 2황자의 비밀 서한이 꾸준하게 도착하고 있었다.

혼란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영지전에서 발생한 역병은 산탄다르로 넘어가 그곳을 휩쓸었고, 들에 곡식이 익어 가도 수확할 사람이 없어 그대로 버려지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눌하스 바크하임, 산탄다르 공작과 그 첫째 손녀딸인 이브나 바크하임도 역병에 목숨을 잃었다.

현재 산탄다르 공작은 이전 생에서 내게 죽은 그레이스 바크하임이었다.

이번 삶에서는 그녀와 적대하지 않기를 바랐다.

많은 영지들이 기본적으로 농사를 장려하지만, 도시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소모해서 벌어들인 재화로 다시 곡물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 곡물의 많은 부분을 공급하던 산탄다르가 휘청이니 제국 곳곳의 도시에서 빈민들이 들끓었다.

영주들이 급히 창고를 열었지만, 이 충격은 역병이 퇴치되었다고 공식 발표가 난 지 2년째인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카몰은 내가 초기에 영주들을 잡으면서 공공사업에 들어가는 돈은 세금에서 빼 주겠다고 말한 것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많이 늘어, 아슬아슬하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또한, 역병이 산탄다르로 넘어가자마자 로킨 포츠라니 백작이 산탄다르로 이동하면서, 아들인 저비스에게 카몰의 방역 대책을 맡긴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전 삶에서 분리 운동이 발생했던 타칼튼에서 이번에는 농민들이 아니라 도시민들이 봉기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비록 5년 전의 비무에서는 오델리아에게 졌지만, 실력과 연륜을 인정받아 현재 검은늑대 기사단의 단장을 맡은 칼 모예드였다.

첩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지만, 오히려 사힘 변경백이 친히 신원보증을 해 줄 정도로 깨끗한 남자였다.

사막만 보고 사는 것이 지겨워서 때려치우고 여행을 하던 중에 여흥 삼아 비무 대회에 참가했다가 기사단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만 보면 내게 코가 꿰여 이게 무슨 꼴이냐면서 한탄을 했지만, 항상 자기 일에 열심이고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송곳니 기사단의 단장인 한스의 과묵함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는 칼의 여유롭고 편한 성격이 새로웠다.

"있지요, 아시다시피 요새 정세가……."

그러자 칼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걱정이라면 안 들으렵니다. 정세니 정치니, 저 같은 서부 촌놈에게는 재미없고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럼 물어보질 말았어야죠."

"누구랑 결혼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여하튼 어려운 얘기는 사절입니다."

칼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아직도 싸우고 있는 로하나스와 오델리아 쪽으로 멀어졌다.

"결혼은 개뿔."

2황자가 나를 각별히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때문에 2황자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내게 온갖 미사여구와 뇌물을 보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특히 성년이 된 이후에는 혼담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정략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공작 가문인 아버지가 분가한 백작 가문이었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결혼에 성공한 터라 나와 캐슬린도 정략적인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부모님도 차차 결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고 은근히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왜? 너 정도면 결혼하려는 사람이 줄을 서지 않아?

"이미 인연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 그나마 지금까지는 내 복수에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합리화라도 할 수 있었지. 결혼은 아니야, 그건 필요 이상의 인연이야."

-보고 있으면 참 어렵게 살아요.

"그 승려 이야기 몰라? 뜻을 이루기 위해 부인과 자식을 두고 집을 나섰다는? 그 정도의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거야."

기사단 숙소에서 나와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 시종들이 유독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해서 재빨리 성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혼비백산해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시녀 하나를 잡고 물었다.

"왜 이래? 무슨 일 났어?"

시녀가 나를 보고 말했다.

"가, 각하! 황제 폐하께서 붕어(崩御 : 황제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하셨다고 합니다!"

"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젠장, 서비어 놈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시기 직전에 2황자마마를 황태자로 한다는 유언을 남기기는 남기셨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공표할 수는 없다?"

"상황이 그렇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는데?"

"황제 폐하께서 1황자마마를 물린 후, 얄츠 이나타 황실 시종장과 2황자마마께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얄츠 백작이 증언만 하면 되는 것 아니야? 가장 중립적이고 가장 충심 높은 귀족인데."

"얄츠 백작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전하는 남자는 2황자의 심복이다.

그동안 2황자의 서신을 모두 이 남자가 전달했기에 나와도 나름대로 친분이 있었다.

도착한 시간과 엉망이 된 꼴을 보아하니 아마 황제가 죽자마자 2황자가 내게 보냈고, 아마 죽어라고 말을 탄 모양이다.

얄츠 백작은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멍청한 2황자. 얄츠 백작은 당신에게만 잘 대했던 게 아니야. 1황자에게도 똑같이 했겠지.

2황자는 얄츠 백작이 자신의 편인 줄 알았겠지만 나는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얄츠 시종장에게는 황가의 지속이 중요하지, 황가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망할 황제, 후계 하나 못 정해 놨으면서 뭐가 절대 권력이야.'

-절대 권력자도 자식은 어찌하지 못하네, 크크크크. 재밌어. 재밌어.

속으로 황제 욕을 늘어놓는 동안 투브가 불경하다며 나를 놀렸지만, 지금은 그렇게 놀아 줄 때가 아니었다.

"1황자마마 쪽은 어떤데? 가만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각하께서 카몰에 내려와 계신 동안 2황자마마께서도 차츰 세력을 넓히셨고, 황제 폐하께서 차근차근 1황자마마의 측근들을 묶어 두셨기 때문에 두 분의 세력은 비슷할 것으로……."

나는 팔짱을 끼고 전령을 봤다.

"너무 낙관적인데?"

"……."

"2황자마마의 세력은 관료나 신흥 귀족 중심 아니야? 냉정히 이야기해서 그건 황위에 올랐을 때나 도움이 되지. 지금처럼 확실한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는 전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잖아. 확실히 2황자마마의 편이 되어 줄 후작이나 공작급 인사가 누가 있어?"

"하지만 군부의 많은 인원들도 2황자마마를 지지한다고……."

"군부 좋아하네. 징집 권한이 있는 히베아 변경백이 총동원령을 내려야 3만 정도의 병사를 모을 수 있는데, 1개 군단이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그 정도는 가볍지? 그런데 정규 군단만 제국 내에 20개가 넘고 특수병과는 셀 수도 없잖아. 군부가 누구 편을 들어? 순진한 소리 하고 있네. 지금 통수권자가 사라졌는데 얌전히 있을 군인이 어디 있어? 자기들끼리 짝짜꿍해서 왕이라고 나서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황제가 귀족들을 제어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기본은 귀족들 사병의 수에 제한을 두고 자신은 강력한 병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황제가 죽고 없는 상황이다.

머리가 사라지니 팔다리가 제멋대로 날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황제가 바보가 아니라면 죽기 전에 사령관들을 묶어 놓기 위해 변경을 수비하는 몇을 빼고는 다 수도로 불러들였을 테지만, 누군가는 야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그렇기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움직일 거였으면 폐하께서 살아 계실 때 했어야지! 그랬다면 폐하의 비호 아래 망나니를 죽였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잖아!"

"폐하께서 본인이 손을 써 1황자마마를 내려보낼 테니 피를 보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하셔서……."

지랄, 좋은 아버지 나셨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먼저 움직이기에는 명분이 부족하고, 늦게 움직이자니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없다.

"아마 널 보낸 이유는 내가 먼저 움직였으면 하는 거겠지?"

전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마마께서 서운해도 그렇게는 못 해. 아버지의 입장도 있고, 이곳은 원래 후작령이야. 몇백 년이 넘은 가문들이 득실거린다고. 다들 정통성 있는 1황자를 지지해, 그런데 내가 2황자마마 지지를 표명하면 난장판이 될 거야. 이곳에 주둔하는 4군단과 베이카 장군이 아무리 2황자마마께 우호적이라도 그렇게는 못 해."

그리고 내가 쐐기를 박았다.

"내 말 그대로 전해. '마마는 아직 황제가 아니십니다. 앞에 나서서 자신에게 자질이 있음을 보이셔야 할 때입니다. 귀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힘드시거든 군의 지지라도 얻어 내셔야 합니다. 마마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겠나이다.' 알았어?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그대로 전해."

일단의 성의 표시를 위해 40명의 검은늑대 기사단을 전령에게 딸려 보냈다.

그 후에는 수도뿐만 아니라 주위의 소식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1주일 뒤, 수도방위병단을 비롯한 절반이 넘는 군사령관이 2황자 지지를 표명했다는 소식과 함께 1황자가 2황자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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