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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68화 (68/180)

급변 (2)

지금 내 책상 앞에는 편지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전국 각지의 정보통들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 내게 보내온 것들이었다.

편지에는 각각 어디의 무슨 백작이 누구를 지지하네, 저기의 몇 군단장이 누구를 지지하네 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그것을 토대로 현재 내 앞에 놓인 제국 전도에 1황자 지지 세력은 흑색, 2황자 지지 세력은 백색으로 칠해 가고 있는 참이었다.

휙.

왼손을 흔들자 수도 주변의 색이 회색으로 변했다.

근처 군부대들이 2황자 지지를 표명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내부에 있는 고위 귀족들은 정통성 있는 1황자를 지지하는 성향이 강했다.

아무리 군이라 할지라도 수도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위상과 상징성 때문에 마음대로 내부로 진격할 수는 없었다.

수도의 소식이 1황자파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수도를 고립시키는 것. 그것이 현재 수도 주변의 군부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부족해."

한 발짝 떨어져서 흑백으로 덮인 제국 지도를 본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힘과 히베아, 두 변경백령을 비롯해서 각지에 아직 색이 칠해지지 않은 지역들이 많이 있었지만, 현재까지의 양상은 2황자 측의 흰색이 1황자의 검은색에 비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마저도 대부분은 귀족령보다는 군부대였다.

귀족들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2황자는? 공격받았다면서? 살았대?

온통 1황자파투성이인 카몰 주위에서 어떻게 해야 2황자 지지를 선언하고도 공격받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투브가 내게 물었다.

"응."

-2황자가 살아 있다니까 왠지 아쉬워하는 표정인데?

"……."

-부인하지 않네?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는 2황자가 사라지면 나야 좀 편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두 번째 황궁 방문에서 발생한 일로 1황자는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1황자의 집권은 내게 반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 생에서 내가 겪은 황제가 된 1황자는, 성정이 거칠고 급해서 제국이라는 강대국을 이끌어 나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도에 앉아서 전장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려는 점 때문에 굉장히 거추장스럽기도 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라져 줬으면 싶기도 한데, 지금은 아니야. 2황자가 조금 더 1황자에게 대항해서 1황자 세력을 결집시켜야 해. 오히려 약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상태가 나쁘지 않아."

-2황자 세력이 아니라, 1황자 세력을? 왜?

"궁정백 가문인 비텔스바흐는 항상 강자에게 붙거든. 레이바를 죽이려면 서로 대립하는 세력에 있어야 정당한 명분이 생겨. 발터 가문도 1황자의 비호 아래 세력을 넓힌 가문이야. 1황자에게 붙겠지. 발터 가문의 가주인 아크라파소 후작이 죽으면 지크프리트 발터가 가주가 될 거야. 남은 셋 중에 둘이 1황자 쪽에 붙으면 내가 죽이기가 쉬워지겠지?"

-……결국은 2황자가 살아 있는 것이 네 복수에 유리해서 그러는 거네?

"당연하지. 어떻게든 살아서 대립 구도를 만들어 줘야 해. 괜히 기사를 40명이나 올려 보낸 줄 알아?"

-그런데 1황자가 2황자를 공격한 것치고는 큰 움직임이 없다? 당장이라도 들고일어나야 할 텐데?

"눈치를 보는 거지."

-눈치? 누구 눈치?

"호랑이가 죽었으니 각지의 여우들이 눈을 굴리지 않겠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작급 인사들의 행보였다.

제국 곳곳에서 귀족들이 1황자나 2황자를 향해 지지 선언을 하고 있었지만, 그 선언의 절대다수는 백작들이었고 후작 몇이 의사를 표명했을 뿐이다.

왕국 수준의 동원 가능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공작급 인사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몬트라우, 바크하임, 그랑베르트, 노체, 에베, 루지온, 리히트.

제국의 7공작 가문 중 제국에 통합되기 전 몬트라우 가문처럼 왕국의 피를 이은 가문은 그랑베르트, 에베, 리히트를 제외한 네 가문인 몬트라우, 바크하임, 노체, 루지온이었다.

이들 네 가문은 제국의 성립 이전부터 다스려 온 지역도 있었고, 이 영지에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제국민'이라는 의식이 약했다.

그 정도로 지역 내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또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작이 가지고 있는 힘뿐만 아니라 공작이 움직이면 그 아래 가신은 물론이고 직, 방계혈족 관계에 있는 타 귀족들도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공작의 지지 선언 한번으로 세력의 덩치를 확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지 선언은 곧 종속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이전 삶에서의 분리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혼란이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귀족들은 싫어도 황실과 제국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의 혼란은 황태자 2명이 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위로부터의 혼란이다.

내전이 격화되어 제국의 통제력이 약해진다면?

공작들로서는 독립을 외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남부의 영지인 타칼튼에서 일어난 도시민들의 봉기가 확산되어 갈 조짐이 있다고 하니, 경과에 따라 영지가 제국 남부에 있는 루지온 공작의 향후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었다.

"아마도 왕국의 피를 이어받은 가문들이 초기에 지지 선언을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봐. 황가에서 분리되어 나온 그랑베르트, 에베, 리히트가 먼저 움직이지 않을까 싶네."

-왜?

"이 셋은 다른 공작 가문들에 비해 세력이 강하지 않거든. 보유한 영지가 넓긴 하지만 변방에 가까운 위치에 있고 산출량이 많지도 않아. 아마 모종의 이유로 황실에서 분리되어 나온 후에도 계속 견제하기 위함이겠지. 그런데 지금 상황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딱 좋아. 거래를 하는 거지. 뿐만 아니라 각자가 황실의 내외척이기도 하니 명분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많이 안다? 정치는 질색이라더니.

"관심을 안 뒀을 뿐이지, 알고는 있어야지."

1명의 공작이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공작들도 가만히 있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면 모를까, 누군가 선점을 시작하는데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기에는 향후에 주어질 이권들이 너무나 컸다.

다만 이들은 절대 그냥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한 대가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터, 내가 예상하기에 2황자는 군부 절반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에도 무언가 거래를 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2황자가 황가에서 분리되어 나온 공작 가문들의 구미를 당기게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점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알버트입니다."

"들어와."

알버트가 내게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중요한 편지 같습니다."

편지를 봉인하기 위한 밀랍에 찍힌 문장을 보고 나는 얼른 편지를 뜯었다.

***

"이것은 말이 다르지 않은가! 어서 군대를 움직여 황궁을 포위하고 황위 찬탈자를 제압하라!"

황실 밖 2황자가 마련해 놓은 안전 가옥 안, 2황자인 바그안트 서비어는 중년의 남성을 향해 얼굴의 노기를 그대로 발산하고 있었다.

황자의 분노에도 앞에 앉은 중년의 남성, 수도방위병단 사령관 카멜 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자에게 당당히 말했다.

"말이 다른 것은 마마이십니다. 황위 계승의 정당한 증거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에 제가 다른 장군들을 회유해서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 마마께서는 그 증거를 보여 주지 않고 계십니다. 저를 비롯한 군부는 황위 계승자를 도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제국을 안정화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역모를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2황자가 카멜에게 제시한 것은 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초대 황제의 반지, '하나리'와 자신을 차기 황제로 지목했다는 황제의 유언.

그러나 하나리의 진위는 황궁 내부에 있는 유물지기만이 확인할 수 있었고, 황제의 유언은 얄츠 시종장이 증언을 해야 했다.

즉, 모두 황궁 내부로 들어가야 확인할 수 있지만, 지금은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정국 수습과 제국 안정. 나를 도와 내가 황제가 되면 공로를 인정해 자신을 공작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건 쏙 빼는군, 더러운 놈.'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카멜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을 2황자는 꾹꾹 억눌렀다.

그나마 이들이 지지 선언을 했기에 1황자의 암살 시도가 잦아들었다.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몇 없는 아군이었기에 소중히 해야 했다.

2황자가 평정을 찾고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하나리를 보여 주기를 원하는 것인가?"

하나리는 서비어 가문 정통성의 상징.

대대로 세습되는 유물지기와 황제만이 그 본모습을 알고 있다.

모습이 밖으로 유출되면 모조품이 생겨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황제는 하나리를 2황자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 황궁은 1황자의 손 아래 있었고, 유물지기와 황실 시종장 모두 현재 황궁 안에 있었다.

1황자가 유물지기를 협박해서 가짜 하나리를 만들어 진짜라고 말하라 시키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실 시종장은 아직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2황자는 그가 야속했으나, 중립을 지키고 황실의 주인을 모시는 것이 황실 시종장이 해야 할 일임을 알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책임은 추후에 물어도 좋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봐도 모르는 물건입니다."

카멜이 한 발짝 물러났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는 하나 신흥 귀족들과 관료들 중 2황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할 뿐이었다.

또한 카멜 자신도 확실한 증거를 보지 않은 채 성급하게 움직였기에, 모든 것을 2황자 탓으로 돌리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한배를 탄 상황,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카멜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다만 날이 갈수록 수도 통제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부하를 위장시켜 밖으로 내보내 기사단을 부르거나 동원령을 내리는 귀족들도 꽤나 많다고 하니, 수도 내부에 있는 귀족들의 저택에 병사를 투입해서 가택 연금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흠……."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카멜의 제안이 합리적 것 같기도 했으나, 수도에 있는 귀족 중 많은 수가 아직 누구에게도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다.

괜한 노파심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심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해서 2황자는 귀족들을 가택 연금하자는 방안까지는 좀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카멜이 강경하게 나섰다.

"7공작 중 5명의 공작이 수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포섭하지 못할 것이라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고서는 기회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미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카멜이 얼른 후드를 덮어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했다.

2황자 지지를 표명하긴 했지만, 그는 수도 밖에 머물며 인원 통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소문을 내놨기에 이렇게 수도 내부에 있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이 없었다.

문이 열리고 전령이 들어와 황자에게 편지를 하나 전해 줬다.

전령은 후드를 깊게 쓰고 있는 카멜을 흘낏 보더니만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봉인을 뜯고 편지를 보던 2황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뜯은 편지를 원래의 모양처럼 잘 접어 앞에 놓은 2황자가 카멜에게 물었다.

"귀족들을 가택 연금하자는 이유가 고위 귀족들의 움직임 때문인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는 왕 이상의 힘을 가진 것이 공작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현재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공작이 내 세력이 되어 준다면?"

"예?"

낙관적인 발언에 카멜이 놀라 되물었다.

휙.

2황자가 카멜을 향해 편지를 밀었다.

힘이 되고 싶다는 편지를 빠른 속도로 편지를 훑던 카멜의 눈이 맨 아래에서 멎었다.

끝없이 펼쳐진 밀 너머에 그려진 높은 성.

바크하임 가문의 문장이었다.

카멜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게 다가 아닐세."

황자의 말에 다음 장을 넘긴 카멜은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켰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검을 2개의 불줄기가 휘감는 문장.

신흥 귀족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행보를 보이는 인물, 카몰 백작, 시안 몬트라우의 문장이 마지막에 찍혀 있었다.

"편지를 가져가게. 가져가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장군들에게 보여 주고 설득하게. 산탄다르 공작과 카몰 백작이 내가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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