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69화 (69/180)

급변 (3)

그레이스 바크하임, 산탄다르 공작이 움직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누구도 그 일이 가져올 파장을 알 수 없었다.

산탄다르 공작 본인도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섣불리 재단하지 못할 것이다.

전대 산탄다르 공작이었던 눌하스 바크하임과 첫째 손녀인 이브나 바크하임이 죽고 남은 유일한 직계 자손인 그레이스 바크하임에게 작위가 승계되었다.

25살의 젊디젊은 공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2년 전의 일이니 현재 그레이스의 나이는 27살이다.

또한, 눌하스 바크하임의 죽음과 영지를 휩쓴 역병 때문에 그녀는 몇 년째 수도가 아니라 산탄다르 지방 내의 바크하임 성이 있는 도시, 위그헨에 머물고 있었다.

다른 공작들이 수도에 머물러 있다가 반강제로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위치였다.

"왜 2황자마마를 지지하겠다고 하신 겁니까?"

산탄다르와 카몰의 접경지대에 있는 허름한 민가에서 내가 눈앞의 여인에게 물었다.

그레이스 바크하임은 능글맞은 얼굴로 다른 소리를 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딱딱하네? 예전 파티에서는 조그마해서 귀여웠는데 많이 커 버렸어?"

"옛이야기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닐 텐데요."

감정 없이 차가운 내 말에 그레이스가 바로 표정을 바꿨다.

"재미없네."

"재미를 찾을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 물었지? 내가 그 질문에 꼭 답을 해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레이스의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탐색을 하는 자리에서는 섣불리 말을 꺼내기보다는 침묵이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무거운 침묵이 우리 둘을 휘감았다.

"후……."

그레이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자세한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 2황자마마가 더 황위에 어울린다고만 해 두지. 다만 내 행동으로 황자마마나 네가 얻어 갈 부분이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으니 부인할 생각은 하지 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움직임으로써 주위 다른 귀족들의 이목이 산탄다르로 몰릴 것이고, 나는 조금이나마 행동반경이 넓어지게 된다.

또한 최고위 귀족인 공작의 지지 선언으로, 2황자는 정통성은 조금 부족하지만 실제적인 세력에서 한발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다른 공작들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니 이 우위를 앞으로 유지할 수 있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든 저력을 내비쳤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일단은 동맹 관계군요."

"그래, 동맹. 너나 황자마마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동맹의 향방이 갈리겠지."

"저와 황자마마를 예의 주시하기보다는 주변 귀족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산탄다르 외부의 귀족뿐만 아니라 휘하의 가신들과 영주들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게 서신을 보낸 것이나 이렇게 허름한 민가에서 보자고 하는 것이나 상황을 봤을 때, 2황자를 지지하는 사안은 바크하임 가문 전체의 의사가 아니라 산탄다르 공작의 독단적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 조언이었다.

제뉴인은 직계혈족의 힘이 아주 강하고 그중에서도 가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형태지만, 산탄다르는 지역 대부분이 기름진 땅인 만큼 방계혈족 중에서도 남작이나 자작임에도 다른 지역의 백작령 이상의 산출을 내는 귀족들이 종종 있었다.

이들을 제압하거나 끌어들이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산탄다르 공작이 재밌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많이 컸네, 조언도 할 줄 알고? 나도 그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어. 다 나름대로 방비가 되어 있지."

"나름대로라는 말로는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를 안 지네. 너는 어떤데?"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내가 작위에 오르고 가장 신경 쓴 것이 직할령 내의 영주들과 도시들의 신임을 얻는 것과 백작들을 내 편으로 포섭하는 일이었다.

이미 첫해에 세금 폭탄을 던져서 기선을 제압했기 때문에 그것을 무기로 해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주어 백작들은 겉으로라도 내가 발이라도 핥으라고 하면 핥을 기세였다.

또한 전생의 분리 운동에서 영민들이 가지고 있는 폭발력과 단합을 체험한 나는 귀족들은 조일지언정 영민들은 풀어 주려 노력했고, 그 덕에 영민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미 2황자가 나를 아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영민들의 지지도 얻고 있으니, 내가 동원령을 내리면 귀족들은 속으로는 욕을 해도 겉으로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와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가장 먼저 박살을 내야지.'

"자신감 있는 모습 좋네. 더 해 봐."

"각하께서 움직이신 덕에 귀족들의 움직임이 한층 활발해질 것입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국 동부인 이곳은 1황자 지지 세력이 많은 곳이니 아마 각하를 견제하기 위해 속속들이 움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나 쉽게? 페제 베이카 장군이 2황자마마 지지를 표명했는데도?"

"4군단의 관할구역은 산탄다르와 카몰이 전부입니다. 다른 지역의 귀족들이 눈치 볼 이유가 없습니다. 군부의 지지 선언은 1황자의 폭주에 잠시 제동을 걸 수 있는 수단일 뿐, 실질적 도움이 되기는 힘들 것입니다. 각자의 관할구역을 넘어 군을 움직이게 되면 그것은 제국과 황실에 대한 역모 행위입니다. 군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큰 동기가 필요합니다."

산탄다르 공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상당히 준비한 것 같은 말투인데? 너무 자세하잖아?"

다 겪어 본 일이라는 말이 혀끝에서 간질거렸다.

군인들이 책임을 피하고자 관할구역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분리 운동이 초기에 진압되지 못했다.

책임과 행정에 묶여 있는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일이었다.

"무가(武家)인 만큼 군인들을 볼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을 잘 알고 있지만, 무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곳이 군부입니다. 2황자마마께서 무슨 수를 쓰셨는지 절반 정도의 사령관들이 지지를 선언했지만, 그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봤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아마 이후의 행보에서는 더 신중해질 것입니다."

"좋아, 그렇다고 쳐. 그럼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지?"

그레이스가 자연스레 물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신뢰의 문제?"

고개를 끄덕이자 그레이스가 팔짱을 끼고 내게 말했다.

"서운하네. 카몰을 향해 집중되었어야 할 이목을 돌려 줬는데."

"아마 1황자 지지 선언을 하셨으면 카몰 북부와 접하고 있는 산탄다르 남부가 남아나지 않았을 겁니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정도는 자신 있었다.

"백작이 공작에게 할 소리 같지는 않은데?"

"제 계획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제게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괜히 저를 보자고 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말하면? 들어줄 수 있어?"

"최대한 우선순위에 두겠습니다."

"제뉴인 공작에게 2황자 지지를 부탁해."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왜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봤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이유를 물었지만 그레이스의 말은 단호했다.

"네 계획을 알려 주지 않는데, 내 계획을 말할 이유도 없지."

"노력은 하겠습니다."

"아니, 전제 조건이야. 제뉴인 공작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거야."

"현재 상황에서 확답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분명히 말했어."

산탄다르 공작은 자기 할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밖에서 말을 타는 소리와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버트와 로하나스가 들어왔다.

"잘 끝나신 겁니까?"

알버트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알버트는 베이카 장군에게 협조 구하고, 로하나스는 기사단 전원 준비시켜."

***

산탄다르 공작이 2황자를 지지한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정세는 크게 요동쳤다.

1주일 사이 대다수의 귀족이 각자의 지지를 표명했다.

어느 편에도 붙지 않은 자들은 끝까지 기회를 노려 보겠다는 심산이거나, 양측 모두에게 이득 볼 구석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렇게 전국이 끓어오르고 있지만 수도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황궁을 점거하는 데 성공한 1황자와 수도 주변의 수도방위병단 및 인근 군부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2황자와의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1황자파 귀족들이 고립된 1황자를 구출하기 위해 수도를 향해 진군할 연합군을 꾸린다는 말도 돌았지만, 아직은 현실성 없는 소리에 가까웠다.

분명 정통성은 1황자에게 있지만, 공격당한 것은 2황자다.

2황자가 죽었으면 모를까, 살아서 군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1황자가 고립된 수도로 진군한다는 것은 1황자의 죽음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점은 형님에게 공격당했다는 것인데, 자네의 제안은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2황자가 내게 말했다.

4군단의 협조를 얻어 나와 검은늑대 기사단은 군인으로 위장해 수도 내부로 잠입한 상황이었다.

"좋으나 싫으나 정통성은 1황자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황궁 또한 그의 손에 있습니다. 상징성이 너무 큽니다. 황실 시종장은 가만히 있을지 몰라도 유물지기가 언제 그의 협박에 굴복할지도 미지수입니다. 진격해야 합니다."

나는 2황자에게 황궁으로 진격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1황자가 지닌 정통성과 상징성이 너무 크기에 그것을 무너트리려면 이쪽도 무력시위를 해야 했다.

"형님을 죽이자는 말 아닌가? 그렇게는 할 수 없네. 그것은 황위를 무력으로 빼앗는 것과 다를 것 없네!"

"맞습니다. 1황자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말이 다르지 않나."

"1황자를 죽였다가는 1황자를 지지했던 귀족들이 각자의 영지에 동원령을 내려 정말 제국이 분열될 것입니다. 1황자는 살려 보내 이 내전이 총동원의 양상을 띠는 것은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귀족들만의 전투가 되어야 변수가 적어집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마께서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들이 귀족들의 억제력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주둔 중인 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협상 중일 것입니다. 군인들은 명령 내리는 자가 없으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빠르게 황궁을 점거하고 황위에 오르시어 명을 선포하는 것이 이들의 이탈을 막는 길입니다."

"……."

물 흐르듯 나오는 내 말에 2황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서 보내는 시간도 아까웠다.

유물지기가 꽤 오랜 시간 버텨 주고 있지만, 수가 틀린 1황자가 제멋대로 황위 계승을 선포하거나 유물지기를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막장에 다다른 짓이기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 예상을 하고 있지만, 지금 1황자는 매우 초조해진 상태일 것이니 속단할 수는 없었다.

선수를 쳐야 했다.

"황궁을 점거하되 1황자를 황궁과 수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목표는 황궁을 탈환하여 상징성과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첫째이고, 유물지기와 황실 시종장의 증언을 얻어 내는 것이 둘째입니다."

"……황실에는 붉은방패 기사단뿐만 아니라 수비군 또한 만만치 않은 수가 있네. 자네의 기사단만으로는 부족해."

"붉은방패 기사단은 황실과 황가를 수호하는 기사단입니다."

"내가 선두에 서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다고 해도 절대적인 수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네."

내가 2황자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밤, 바크하임 가문의 폭풍우 기사단 50명이 합류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송곳니 기사단 150명 역시 합류할 예정입니다."

"제뉴인 공이!"

7공작 중 마지막까지 누구를 지지한다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도 결국 내 설득에 2황자파로 넘어오게 되었다.

"마마께서 용단을 내리신다면 오늘 새벽, 황궁을 향해 진격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형님을 죽여서는 안 되네."

"물론입니다. 제 발로 도망쳐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영할 일이지요. 다만."

내가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1황자를 살려 보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황자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보겠습니다."

황자에게는 총동원 양상을 막기 위해 1황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결국 이 내전은 각자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총동원이 될 것이 뻔히 보였다.

때가 지금이 아닐 뿐.

해가 붉은 빛을 길게 빼며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 황궁으로 진격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의 가치판단은 놓아 버리기로 했다.

그저 내 복수를 향해 악착같이 달려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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