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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70화 (70/180)

신속하고 정확하게 (1)

늦은 밤, 몬트라우 거주지 내의 저택.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왜 이리 부산스러운 게냐? 좀 앉거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사를 몇 시간 앞둔 지금, 나는 아버지의 집무실 창문 앞에서 몇 걸음 걷다 밖을 바라보고, 다시 몇 걸음 걷다 밖을 바라보고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정신이 어지럽다, 야.

바닥에 엎드려 내 행동을 보고 있던 투브가 말했다.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몇 년 만에 수도에 올라와서 2황자마마의 힘이 되어 달라고 대뜸 말할 때는 언제고,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불안한 게냐?"

2황자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나 역시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반역이다.

산탄다르 공작과 아버지의 가세로 유리해진 상황을 더욱 탄탄히 하려면 이 황궁 점령이 성공으로 돌아가야 했다.

"불안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너의 지금 모습은 마치 이미 무언가 잘못되어 해결책을 고심하는 사람 같구나."

"현재 수도 내에 1황자의 사병 조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황제만을 섬기는 친위대는 물론이고, 붉은방패 기사단도 황가 내부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꺼리고 있을 것입니다. 1황자는 황궁을 차지하고도 황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할 수 없으니, 오히려 우리가 진격하면 반기며 황궁을 비워 줄 수도 있습니다. 현재 그에게는 수도 내부보다는 외부가 운신하기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보내 줘야 한단 말이냐?"

수도방위병단에 부탁해 일부러 수도의 방비를 느슨하게 해 놓았다.

1황자를 살려서 내보내기 위한 계책이었다.

이미 기사단원들에게도 1황자를 보면 모른 척하라고 말을 해 놓은 상태이고, 아마 황궁에는 내가 모르는 비밀 통로도 여럿 있을 것이니 1황자는 상처 하나 없이 수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이려고 하면 그를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1황자를 죽이면 그때부터는 정말 제국이 혼란의 도가니로 빠질 겁니다. 지금은 그를 놓아주고 우리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차츰차츰 그를 무너트리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짧은 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것 같아 왠지 내키지 않는구나. 일이 길어지면 여러 가지 말이 나오는 법이다. 이미 2황자마마께서 승인하신 부분이라 더 말하지는 않겠지만, 일이 잘못되면 원망의 화살이 네게 쏟아질 것이다. 나는 그것이 걱정되는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하는 말이니 믿어 보마. 그럼 네가 걱정하는 것은 외부로 나간 1황자가 칭제(稱帝)하는 것이냐?"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2황자마마께서는 전대 황제께서 하사하신 하나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유물지기가 그것을 보고 진품임을 확인해 줄 것이니 그때부터는 정통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한 2황자마마께서 옥좌에 앉으시면 황실 시종장도 전(前) 황제 폐하의 유언을 증언할 것이니 1황자의 칭제는 염려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1황자가 황궁과 수도를 벗어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얌전히 떠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안색이 변했다.

황궁 내에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 서적, 유물이 한가득이었다.

또한 아직 엘리자벳 서비어 공주가 황궁 안에 있는 상황이다.

2황자가 황궁 밖으로 나간 이후 황궁 안에 억류되다시피 한 관리도 셀 수 없이 많았다.

1황자가 도망가면서 부수거나 혹은 태우거나 가져갈 것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죽이거나 납치해서 데려갈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내가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구나. 나는 현 상황에서 황궁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의 책임이 아닙니다. 원래는 2황자마마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나면 조금씩 황궁 내부의 힘을 약화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산탄다르 공작이 들어오는 바람에 계획이 당겨진 것뿐입니다."

"그래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지 않으냐."

침묵이 찾아왔다.

1황자가 얌전히 빠져나갈 것이라는 생각은 이상주의자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생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수가 죽고 다칠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이제는 누군가가 죽고 다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것이 심지어 자신일지라도.

무거운 분위기를 깨 보고자 품고 있던 의문을 아버지께 풀어놨다.

"그런데 산탄다르 공작이 갑작스럽게 지지를 표명한 것과, 폭풍우 기사단을 움직이는 조건으로 아버지께서 2황자마마를 지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구나. 1황자파 세력이 주위에 많으니 1황자 지지를 선언하고 그 지역의 맹주 노릇을 해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지……."

현 산탄다르 공작인 그레이스 바크하임은 나의 전생에서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독립을 선언할 만큼 야심 있고 강인한 여인이다.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정확한 내막을 모르니 상당히 답답했다.

2황자가 정권을 잡게 되면 그녀는 가장 먼저 합류한 공작이니 입김이 세질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거리가 멀긴 해도 가장 가까운 공작령인 제뉴인의 주인인 아버지를 동맹으로 묶어 놓았으니 어떤 요구를 할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역시 신경 쓰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며, 일단 앞에 주어진 일에 집중하자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먼저 황자마마께 가 있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가셔야 합니다."

내 말에 2황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을 져야 하는 것은 나인데 정작 표정은 자네가 더 굳어 있군그래?"

굳은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것인지 황자가 내게 농을 건넸다.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잘될 것입니다."

"그래야지."

짧은 대화가 끊겼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수도의 거리에는 마치 쥐들이 다니는 것처럼 소리를 죽인 채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수도방위병단 소속 병사들의 피로 누적을 이유로 오늘 하루간 수도 봉쇄가 조금 약해질 것이라는 소문을 돌리라는 명을 며칠 전부터 내려 놨었고, 그 결과 수도에 억류되어 있던 귀족들이 몰래몰래 가신, 시종, 기사단원을 조금씩 분산시켜 영지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그 행렬은 밤에도 계속되었고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참이었다.

"저 소리 중에는 나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귀족들도 있겠지."

"……꽤 많을 겁니다."

"그대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군."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낙관과 희망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른 판단밖에 없습니다."

2황자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대를 자주 보았지만, 그대와 대화를 하면 절대로 나보다 어린 사람 같지 않아. 내 나이의 2배는 더 먹은 노인을 상대하는 것 같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연 뒤 황자가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발소리들을 다시 수도로 돌아오게 하실 분은 마마밖에 없으십니다."

내 말에 황자가 움직여 건물 밖으로 나섰다.

이제 안전 가옥을 빠져나가 황궁을 향하게 되면 곳곳에 미리 분산시켜 놨던 기사단원들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카몰 백작."

2황자가 나를 불렀다.

"예, 마마."

"그대가 처음 카몰 백작이 되었을 때, 내가 그대를 예전에 부르던 명칭인 몬트라우 백으로 불렀던 것을 기억하는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호칭이라는 것이 참 어려워. 한번 입에 붙은 호칭은 잘 떼어지지 않기 때문이지."

스릉.

황자의 허리에 있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그대도 호칭을 조심해야 할 걸세."

2황자가 뒤에 서 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을 맺었다.

"마마라는 호칭은 오늘로 끝이네."

내가 고개를 숙인 사이, 황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삐 움직이는 밤이 될 것 같았다.

***

"헉, 헉……!"

관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황궁 안쪽의 복도를 마구 달리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남자는 건물을 벗어나 황궁 한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잘 빗어 올린 머리가 흐트러지고 어두운 시야 때문에 발을 헛디뎌도, 그는 개의치 않고 언덕을 오르는 일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정신없이 언덕길을 헤맸을까, 남자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갑옷 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는 계속 눈가를 찌르고 들어오는 땀을 한번 닦아 내고 몸을 돌려 뒤를 한번 보았다.

거대한 전각들이 화마에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초대 황제가 터를 잡은 뒤로 단 한 번도 큰 변고 없이 그 자리를 지켜 온 황궁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 사이로 불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멀리서 병장기들이 마주치며 만들어 내는 쨍 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퍼져 오고 있었다.

털썩.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남자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간신히 한마디가 그의 혀끝에서 맴돌다 입술을 지나 새어 나왔다.

"어떻게 되려고 이런 일이……."

수십 년 전,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이 있다.

아버지의 관직을 그가 이어받는 날에 했던 말이다.

"타민 레간, 너는 오늘부로 유물지기다.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우리 가문과 관직이 네 어깨에 달린 것이다, 알겠느냐?"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타민에게 그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 비장할 필요 없다. 그저 조용히 네 할 일만 하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관직이니."

그리고 또 한마디를 더 했었다.

"자부심을 가지거라. 제국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것은 우리 유물지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렇기에 더욱 강인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 네게 위증을 요구한다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응하지 않아야 한다. 알겠느냐?"

타민은 설마 그런 일이 생길까, 혹여 생겨도 자신이 유물지기인 때에 생길까 해서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20대의 패기, 아니 뭣도 모르는 멍청함이었다.

2황자가 궁을 나간 후, 1황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타민을 찾아와 때마다 다른 반지를 내밀며 '이것이 하나리냐? 저것이 하나리냐?' 하며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살기등등한 1황자의 기세에 당장이라도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이것은 하나리가 아닙니다. 저것 또한 아닙니다.' 하며 소신을 지켜 왔다.

성질을 못 이긴 1황자가 칼을 뽑고 오러를 뿜어 대는 일도 있었지만, 유물지기를 죽이는 것은 사관을 죽이는 것만큼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말리는 황실 시종장과 비텔스바흐 궁정백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모든 출입구를 황실 경비대가 막고 관리들의 출입을 금했다.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나날이었다.

나날이 거세져 가는 1황자의 압박에 차라리 자결을 할까 고민하던 밤, 황궁이 소란스러워졌다.

타민이 억류된 방 앞에서 그를 데리러 왔다는 기사들의 말에 타민은 직감했다.

큰일이 생겼고, 1황자가 자신을 죽이거나 끌고 가려고 한다는 것을.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온 타민은 황궁의 제3 서적 보관고로 달렸다.

외진 곳에 있어 많은 사람이 위치를 잘 모를뿐더러, 제3 서적 보관고는 황실에 변고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작은 대피소로도 쓸 수 있었다.

안에서 입구를 막을 수도 있으니 이 소란이 잠잠해지면 나올 셈이었다.

50대의 타민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릎과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고통을 뿜어내는 폐를 억지로 움직여 가며 전력을 다해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자신의 뒤를 기사들이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취미는 한량과도 같은 유물지기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황궁의 옛 설계도를 보고 분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기사들의 추격에서 벗어나도 늙은 몸이라 다시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반복됐다.

무너지듯 쓰러져 불타는 황궁을 보며 과거의 상념에 젖은 것이 얼마일까, 황망한 마음을 수습하고 다시 서적 보관고로 움직이려는 그의 귀에 갑옷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따라잡혔단 말인가. 타민은 이때만큼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격한 움직임에 단단하게 굳어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을 밀어 올리는 다리를 그는 억지로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보관고가 나온다.

그곳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마법사 10명이 와도 밖에서는 열 수 없다.

타민이 이를 악물고 움직이자, 뒤에서 그를 쫓던 기사들도 그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갑옷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더 격해지기 시작했다.

저기 저 나무 뒤, 나무 뒤로 다섯 걸음만 걸으면 된다!

눈에 익은 광경에 그가 희열에 찰 무렵, 그의 귀에 들리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피잉!

잔뜩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손에서 놓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쐐액 하며 화살이 공기를 매섭게 가르는 소리도 귓속을 파고들었다.

타민은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았지만 죽음에 가까웠기 때문일까, 직감이 그의 온몸을 강렬히 지배했다.

'죽는다.'

몇 걸음 남았을 뿐인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공포심에 눈물이 솟는 타민은 화살이 어디에 박힐지 생각했다.

팔에 맞으면 그래도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제발 심장이나 머리에는 박히지 말아라! 아닌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 방에 심장을 꿰뚫려서 죽는 편이 나은 것 아닌가?

찰나라고도 부르기에는 너무나 긴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동안, 타민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흘러들어 왔다가 흘러 나갔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채앵!

'채앵? 이건 화살이 살에 박히는 소리가 아닌데?'

눈물을 줄줄 흘리던 타민이 굳어 있는 목을 간신히 뒤로 돌렸다.

어둠이 꿈틀대고 있었다.

어둠에 잘 벼려진 검을 든 한 남자가 올라앉아 있었다.

그 남자와 타민 사이에 화살 하나가 힘을 잃고 떨어져 있었다.

퍼엉!

멀리서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짧은 순간,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제야 타민은 자신이 봤던 어둠이 거대한 검은 늑대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을 뒤따라온 것으로 생각되는 3명의 기사도 눈에 들어왔다.

늑대에 올라 있던 남자가 기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타민에게 물었다.

"유물지기?"

살았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타민은 주저앉았다.

내가 유물지기라고 대답을 하려 했지만, 잔뜩 긴장해서 굳어 버린 혀와 턱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으브븝……."

옹알이를 하는 것 같은 소리가 타민의 입에서 나왔다.

그것을 흘끗 본 시안이 말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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