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하고 정확하게 (2)
3명의 기사 모두 상처가 나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팔 정도는 내주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내 검을 어깨로 받아 내며 파고드는 통에 조금 당황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끼리의 합도 아주 잘 맞아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쉴 새 없이 나를 향해 공격해 왔다.
막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반격할 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투브에게 1명을 맡기고서야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지독하군."
나무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사를 보며 내가 말했다.
내가 맡고 있던 두 기사 중 하나는 이미 죽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던데.
자신에게 덤비던 기사의 다리를 부러트려 놓은 투브가 다가와 말했다.
투브의 말처럼 기사들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음에도 계속 움찔거리며 나와 유물지기를 죽이려 들었고, 격렬한 고통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을 텐데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사령……."
말을 하려다가 아직 뒤에서 쓰러진 채 나를 보고 있는 유물지기의 존재를 의식하고 얼른 생각했다.
'사령 마법?'
-아니야. 그 역겨운 냄새는 나지 않아.
내가 걸어가서 기사의 갑옷을 살폈다.
오델리아 같은 예외도 있지만 기사라면 못해도 군,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사단에 속해 있고 그 상징 문양이나 그림이 갑옷 어디엔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기사의 갑옷에는 분명 오랜 기간이 묻어나는 사용감이 있음에도, 어디에도 소속을 특정할 만한 것은 없었다.
철그렁.
내가 발로 기사의 팔 한쪽을 누른 채 투구를 벗겨 땅으로 내던졌다.
투브의 눈이 기사의 얼굴에 멈췄다.
-공포, 압도적인 공포.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가?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 들었으면서 자기 죽음은 두려운가 보지?'
-아니, 그게 아니야. 달라. 소속감, 복종, 굴종.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어 재빨리 기사의 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1황자의 사병인가! 대답해!"
흘러내린 피 때문에 흉측한 형상을 하고 있던 기사가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
혀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재빨리 다른 2명의 입안도 확인했다.
역시나 그들의 혀 또한 잘려 나가 있었다.
1황자는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혀까지 잘라 가며 자신만을 위한 사병을 키워 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속단하기는 일렀다.
1황자의 외가인 슈트가르텐 백작 가문의 소속 기사들이 1황자를 지원하기 위해 황궁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설령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라고 해도 3명 모두 혀가 잘려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또한 새 갑옷이 아닌데도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이 하나도 없어. 2황자를 습격한 기사들도 오러의 운용 방식이나 외양으로는 소속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이들인 건가.'
귀족들에게는 부여된 작위에 따라 보유할 수 있는 기사단원의 수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그것은 황족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궁내에 거주할 수 있는 황족이 무력 집단을 사적으로 보유할 수 있으면 황제에게 집중되어야 할 권력과 무력이 분산될 수 있으므로, 법률상으로는 황족도 기사단을 보유할 수 있지만 그 절차와 규정이 너무 엄격하고 까다로워 대부분 미련 없이 기사단을 보유하는 것을 포기하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1황자가 허가되지 않은 기사단을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혀까지 잘라 갈 정도로 이들을 통제해 가며?'
1황자의 끝을 모르는 권력욕과 패악 무도한 행위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말은 못해도 글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군에 던져 주면 알아서 정보를 뽑아내 줄 것이다.
-안도.
여전히 기사를 보고 있던 투브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 왜 안도를……?"
쉬익!
말이 끝나기 전에 투사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커허…… 허억."
나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던 기사가 피를 뿜어냈다.
그의 목에 작은 단검이 박혀 있었다.
"미친!"
고개를 돌려 보니 투브가 다리를 부수어 놓은 다른 기사가 이쪽으로 손을 뻗은 채 죽어 있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던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죽인 다른 기사의 정수리에도 단검이 박혀 있었다.
'유물지기를 죽일 수 없을 것 같으니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동료들을 죽이고 자결한 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세뇌된 인력이다.'
몰래 키워 낸 사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악독하고 철저한 수법을 쓰는 이들의 정체를 궁리하고 있는 사이, 황궁 곳곳을 불태워 가던 화마가 언덕 아래까지 이른 것이 보였다.
일단 이 유물지기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아야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라 안전에 책임은 못 진다."
강아지 모습으로 변한 투브를 품 안에 넣고 유물지기의 멱살을 한 손으로 단단히 틀어쥐며 말했다.
"예?"
옹알이만도 못한 소리만 뱉어 내던 아까와는 다르게 유물지기는 긴장이 좀 풀렸는지 내게 반문했다.
그대로 유물지기를 어깨 위에 얹고 담장과 건물들 위로 몸을 날렸다.
발밑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들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발동하려다 변환 인자 때문에 힘을 잃었다.
"쿠헉!"
어깨에 얹힌 유물지기가 속에서부터 역류하는 것 같은 신음을 뱉어 냈지만 지금 그의 사정을 봐줄 여유는 없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을 살려 놨으니 갈비뼈 몇 개 정도는 목숨값으로 싼 편이다.
***
황궁 전각들의 지붕을 타 넘으며 정문으로 마구 내달렸다.
곳곳에서 오러를 뿜어 대며 병기를 맞부딪치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러나 요란한 소리에 비해 부상자나 사망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이나 황실 경비대나 서로 간의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 필요 이상의 무력은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피를 보는 일은 최대한 없어야 한다는 명을 잘 지키고 있군.'
기사들의 대치보다는 황궁 곳곳에서 치솟는 불길이 더 문제였다.
분명 화염 방지 마법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을 텐데 하나도 발동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황자가 궁을 빠져나가면서 마법을 해제한 것 같았다.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내관들과 궁녀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고 있었지만, 화재의 규모가 너무 커서 사람이 나르는 물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황궁에 혼란이 도래하고 있었다.
"젠장, 더럽게 넓네!"
한 건물 위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내가 홧김에 소리쳤다.
유물지기를 발견한 곳은 황궁의 한참 안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거의 직선거리로 황궁을 가로지르고 있음에도 아직 정문까지의 거리는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오! 저기 가나 보다.
가슴팍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투브가 황궁의 중앙에 있는 정전(政殿)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하얀 점이 정전으로 빠르게 향하고 있고 그 뒤를 검은 갑옷이 뒤따랐다.
아마도 바그안트 서비어, 2황자와 검은늑대 기사단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양보를 많이 하셨네."
2황자를 호위하는 일은 송곳니 기사단이 맡아도 됐으련만 굳이 검은늑대 기사단에 양보하신 것이다.
-잘하려나? 궁금하네.
"아마 1황자는 이미 수도 밖에 있을 거야. 무주공산에 들어가는 일인데 못할 수가 없지."
간단히 답하고 다시 정문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함께 남은 송곳니 기사단원들과 폭풍우 기사단원들이 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다.
***
"맞구나. 잘했다."
아버지가 내가 날라 온 유물지기의 얼굴을 확인하고 한마디를 했다.
기사단원 하나가 유물지기를 2황자가 제공한 마차로 데려가 눕혔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궁 앞에 운집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아보고 멀리서 소리쳐 댔다.
기사들이 통제하고 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완벽한 통제가 안 되는 지경이었다.
한밤중에 발생한 황궁 진격일 뿐만 아니라, 황궁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거대한 연기구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충분히 불안감을 유발할 만한 일이다.
"다른 문도 이렇다면 더는 통제가 불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2황자가 1황자의 소재를 파악하고 황궁을 접수했음을 선포하기 전까지 누구도 안으로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수도 안에는 1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몇 남아 있었다.
그들이 기사단을 동원해 소요를 일으킨다면 거대한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시작도 해 보기 전에 피를 보는 상황은 막아야 했다.
그때 인파가 갈라졌다.
제국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갈라진 길로 들어왔다.
한 사람이 말을 탄 채로 가장 앞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에 붙은 비표를 보니 수도방위병단 소속 지휘관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남자가 아버지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우고 느긋하게 내렸다.
"각하, 이곳은 이제 수도방위병단이 맡겠습니다."
"할 장군, 군을 움직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할? 카멜 할! 수도방위병단의 사령관? 분명 포위망 약화를 위해 수도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에?'
요직 중의 요직 취급을 받는 수도방위병단의 사령관이지만 이전 생에서 내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이전 세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와는 접점이 없었다.
군에 있는 절반 이상의 장군들과 사령관들이 2황자 지지를 표명한 것에 이 남자의 역할이 컸다고는 들었지만 이런 시점에 작전 위치를 벗어난 것은 이상했다.
할 장군이 딱딱하게 말했다.
"군인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뿐입니다. 저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릅니다."
"모른다고 하기에는 자네의 부하들이 너무 많아 보이는군."
"제 임무는 수도의 치안과 안전을 맡고 수도에 거주하는 인원들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황궁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치안 유지와 화재 진압을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이곳은 우리로도 충분해. 자네가 지금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과는 한참 멀리 있는 일이야."
여기까지 와서 공을 나누기는 아버지도 싫으셨는지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허세를 장군에게 내비쳤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할 장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말했다.
"안의 화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정도의 화재를 물을 퍼서 막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마법사들을 데려왔습니다."
정론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도 누군가는 불타는 건물 안에서 죽어 가고 있다.
"아버지……."
내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몸을 틀어 길을 열었다.
"마법사들만 들여보내겠네."
할 장군이 묵례를 하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들을 불러 이런저런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곧 마법사들이 황궁 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외의 다른 병사들을 돌려보낸 할 장군이 팔짱을 끼고 아버지의 옆에 서서 황궁을 바라봤다.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불길이 만들어 낸 그림자 때문인지 나는 그의 얼굴에서 옅은 웃음을 본 것 같았다.
큰일을 하려거든 주변 정리부터 (1)2황자는 성공적으로 빈 황궁을 접수했다.
1황자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으며, 그날 많은 귀족이 밤을 틈타 수도를 빠져나갔다.
애초의 계획은 수도방위병단이 그들을 잡아들여 1황자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으나, 할 장군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상당수의 귀족들이 약화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절호의 기회를 한 남자의 야심 때문에 말아먹은 셈이 되었다.
제국의 중심부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수도의 핵심에 있는 황궁에서 수많은 건물들이 불탔다.
궁에서 일하는 많은 이름 모를 자들이 산 채로 불태워져 새카만 잿더미로 변했다.
아카데미와 제국 대학에 있는 학생 마법사들도 동원되어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황궁이 워낙 넓기도 하고 무엇보다 불이 붙은 건물이 한둘이 아니라 한계가 있었다.
황궁을 덮친 화마는 황제가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는 곳인 정전도 예외 없이 집어삼켰다.
2황자는 1황자에 대한 복수와 자신이 황위를 이었다는 사실을 재가 된 정전 앞에서 많은 이들에게 천명했다.
귀족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빽빽하게 자리해야 했을 황제의 앞은 곳곳이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전해 들은 일이고, 나는 지금 기사단을 이끌고 전력으로 영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휴식한다."
널찍한 공터에서 멈춘 뒤, 투브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내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의 상태를 살폈다.
말들이 거친 숨을 뿜으며 투레질을 했다.
어떤 말들은 기사가 내리자마자 무릎을 꺾고 침을 질질 흘렸다.
말은 생각보다 지구력이 좋은 동물이 아니다.
특히나 기사들이 타는 말은 날렵한 전령마와 달리 갑주를 착용하고 무기를 가진 기사들의 무게를 버텨야 하며 돌격 시의 충격량을 늘리기 위해 근육이 거대하고 덩치가 좋은 전투마들이니, 예상보다 더 쉽게 지쳐 버렸다.
모르고 있는 사실은 아닌지라 나름대로 속도 조절을 하면서 왔는데도 퍼지는 말들이 있었다.
"골치 아프군."
퍼진 말에게 내 수통에 있는 물을 부어 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말의 주인인 것 같은 기사가 투구를 벗고 내게 말했다.
검은늑대 기사단이 아니라 산탄다르 공작 아래 있는 폭풍우 기사단원이었다.
갑옷 여기저기 묻은 그을음뿐만 아니라 움푹 들어간 눈에서 그간의 고생을 알 수 있었다.
밤새 황궁을 누비다가 해가 뜨기 무섭게 말을 타고 내려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들의 고생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2황자의 황궁 진격은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갈 것이고 그 중심에 나와 산탄다르 공작이 있었던 사실 역시 감출 수 없을 것이다.
황제가 된 2황자는 1황자가 죽었다고 선언해 혼란을 잠재우려 했으나 그의 시신은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1황자가 황궁과 수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니 황제의 거짓말은 바람 불면 흩날려 사라질 수준의 거짓말이었다.
비록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군부 세력이 아직 완전히 2황자의 것이 된 것은 아니었고, 대귀족들의 지지는 오히려 1황자가 많이 받고 있었다.
1황자의 죽음이 확실하지 않은데 2황자가 불완전한 황제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 1황자파에 있던 귀족의 마음이 돌아선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오히려 현 황제의 반대편에 섰던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한 것을 알고 더 결집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서 일망타진하기 위해 1황자를 풀어 준 것이긴 했지만, 굳이 시간을 줄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카몰이 있는 제국 동부 지역은 나와 산탄다르를 제외하면 온통 1황자의 세력권이었다.
2황자가 황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전해져서 1황자파가 자기들끼리 연대하기 전에 각개격파 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좋았기 때문에 귀한 전투마들을 혹사에 가깝게 대하면서 영지로 향하는 것이었다.
-나약한 놈들……. 쯧쯧.
투브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뜨거운 김을 뿜어 대는 말들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말했다.
쭉 나를 태우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은커녕 털 하나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기사단의 이름을 검은늑대 기사단으로 해 주고 도시 중앙은 아니더라도 내가 머무는 성의 정원 한쪽에 작은 동상을 세워 주었더니, 투브는 그것이 매우 마음에 드는 듯 내가 필요할 때 순순히 등을 내주었다.
크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안장을 올리는 것은 안 될 말이었지만, 오러를 운용하면서 위에 달라붙어 있으면 생각보다 있을 만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있을 만하다는 것이지, 편함과는 거리가 좀 멀긴 했다.
기사단 모의 전투와 영지전에서 보여 준 전투에서의 실용성은 말할 것도 없고, 탈것으로서의 가치도 말과는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우수했다.
말들을 보며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던 투브가 옆으로 다가왔다.
'야.'
-저런 약해 빠진 생물이랑 다르게 내 강함에 놀랐다고? 알아. 굳이 말할 필요 없어
'그건 이미 느끼고 있고, 다른 거야.'
-뭔데?
'너 자식 낳을 생각 없냐? 내가 책임지고 돌봐 줄게.'
-네 욕망의 끝은 어디인지 보고 있으면 경이롭다, 이 새끼야.
투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안해진 내가 검은늑대 기사단장인 칼을 불렀다.
"칼 단장!"
"옙!"
저쪽에서 창을 빙빙 돌리고 있던 칼이 단장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하게 답하고는 내 쪽으로 펄쩍펄쩍 뛰어왔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지쳐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이 퍼졌다.
"저는 먼저 갈 테니까 나머지 인솔해서 끌고 오세요. 말들의 피로가 심해서 제 속도를 못 맞출 것 같아요. 카몰의 영주들에게 들러 말을 보내라고 할게요. 모든 말을 갈아탈 수는 없어도, 상태가 심각한 몇 마리 정도는 갈아탈 여유가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폭풍우 기사단은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헤어질 거예요. 저쪽은 그나마 산탄다르에 남은 인원이라도 있어서 모르겠는데, 우리는 전원이 나와 있으니 복귀를 서둘러야 해요."
"최대한 빠르게 뒤따르겠습니다."
"무리하진 마세요.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 전령보다는 앞서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속도보다는 조금 느려도 좋습니다. 대신 휴식을 충분히 취하세요. 말이 쓰러지면 문제가 많이 생길 수 있어요."
칼이 전달 사항을 기사들에게 알려 주는 것을 보고 투브를 불러 등을 툭툭 두드렸다.
'변신!'
-아무리 생각해도 그딴 내기는 하는 게 아니었어…….
투덜댄 투브가 괜히 칼을 흘겨보더니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가볍게 뛰어올라 투브의 등에 안착한 나는 기사들에게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출발했다.
파앙!
무언가 발사되는 파공음과 함께 주위의 풍경이 재빠르게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투브에게 길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웬만한 바위나 작은 실개울 정도는 도약 한 번이면 뛰어넘었다.
지금까지는 말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느리게 달리고 있었을 뿐, 녀석의 전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살을 베어 낼 듯 때려 대는 바람 때문에 전신에 오러를 운용하면서 내가 물었다.
'자손 100마리 정도만……. 너 정도로 클 필요도 없고, 말보다만 커도 되지 않겠냐?'
-안 한다고, 미친놈아!
***
쿵!
투브가 유제프성(城)의 후원에 내려앉았다.
한밤중에 퍼진 큰 소리를 듣고 성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도련님!"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한쪽에 강철 검을 차고 있는 알버트였다.
그리고 각자 무기를 쥐고 나온 가신들과 시종들이 줄줄이 보였다.
바람 때문에 온통 뒤로 흩날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투브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목장 열어서 말 다 데리고 나와. 기사단 데리고 와야 해."
마차를 타고 잠을 잘 때만 쉬면서 이동해도 1주일이 넘게 걸리는 이곳, 유제프시(市)까지 투브는 잠도 자지 않고 이틀 하고 반나절 만에 주파해 냈다.
경이적인 속도와 지구력이었다.
-다시는 이딴 거 시키지 마라…….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마구 돌파해 와서 털이 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투브가 작아진 모습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생했다, 인마!"
내가 외쳤지만 투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그 옆에 시종들이 붙어 헝클어진 투브의 털에 열심히 빗질해 댔다.
평소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도망갔을 투브인데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다시 시선을 알버트에게 돌렸다.
"백작들이랑 직할 도시 시장들 다 모이라고 전령 좀 보내 줘. 급해, 최우선."
수도로 갔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을 만도 하건만 내 말에서 행간을 읽어 낸 듯, 알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말을 듣고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일을 분배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앞으로 시행해야 할 것들을 일러 줬다.
사람들이 급히 뛰어다니느라 야간의 성이 분주해졌다.
후원에 있는 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로가 극심했다.
투브가 잠을 자지 않고 달리니 나도 잘 수 없었다.
잠을 자면 오러를 운용할 수 없고 그럼 그대로 낙마(落馬), 아니 낙랑(落狼)이었다.
그렇다고 투브의 등이 승차감이 좋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안장이 없기 때문에 녀석의 몸통을 감싸고 있는 허벅지, 갈기를 붙잡고 있는 팔과 어깨에 엄청난 힘을 줘야 했다.
허리 역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됐다.
이틀 반나절 동안 잠도 못 자고 내내 집중해서 몸의 균형과 오러의 운용을 해야 했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으니 알버트가 와서 물었다.
"더 명하실 일은 없으십니까?"
졸려서 눈이 껌뻑껌뻑 감겼다.
"다 모이면…… 깨워 줘, 꼭."
의식이 멀어졌다.
***
알버트가 나를 깨워 다들 집무실에 모여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하루나 이틀이 넘게 걸리는 곳에 거주하는 영주들이나 시장들도 있어서 절대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다 모일 수는 없었겠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눈에 보이는 성마다 쳐들어가서 뒤따라오고 있는 기사단을 위해 말을 보내라고 하고 사흘 이내에 무조건 유제프성으로 오라고 깽판을 친 효과가 있었다.
내가 들르지 않은 주위 다른 영주에게도 소식을 전하라고 해 놨더니 다들 충실히 이행한 모양이었다.
아직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 찌뿌둥한 얼굴을 하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본 백작들과 시장들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꽤 넓은 집무실인데도 20명이 넘는 사람이 있으니 좁아 보였다.
나도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저었다.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드르르륵.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팔로 밀어 한쪽으로 치웠다.
"헛차."
그리고 책상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기울여 앉아 팔짱을 꼈다.
높은 시선에서 보니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전원을 소집한 것은 백작이 된 초기, 기강을 잡으려고 세금 장난을 칠 때 외에는 없었다.
다들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2황자마마가 황궁으로 진격했고, 성공적으로 황위를 승계하셨……."
'승계하셨다.'라고 하려는데 한쪽에 있는 외할아버지, 누이론트 백작이 눈에 들어왔다.
봉신 계약을 했다고는 하지만 외할아버지에게 반말하는 건 왠지 이상했다.
"승계하셨습니다."
놀라움의 탄식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이제는 2황자마마가 아니라 황제 폐하겠군요. 1황자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허어!"
누군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지금까지의 정국과는 차원이 다르게 혼란해질 것을 예감한 것이리라.
"이 자리에 모인 백작들을 비롯한 영주들에게 명합니다. 기사단에 전투준비를 하달하세요. 영민들을 동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민 동원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준비는 해 두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시들은 카몰 밖으로 빠져나가는 교역 물자를 최소화하고 기사단과 영민들의 무장 물자를 최우선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시장들은 각자의 도시에 있는 상단들을 포섭하세요. 산탄다르를 제외한 다른 지역으로의 물자 유입을 막게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카몰 내에서 상단들의 편의를 많이 봐줬으니 그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쏟아 내는 말에 누군가는 얼굴이 새카맣게 죽었고, 누군가는 눈에 생기가 돌고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비록 이들이 지방의 귀족이고 시장이지만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바보는 1명도 없었다.
"각지의 영주들이 영민을 동원하고,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주변 정리를 시작합니다."
큰일을 하려거든 주변 정리부터 (2)-1,000년을 이어 온 제국의 황실이 생귀니엘 서비어라는 악인에 의해 골육상잔의 처참함을 겪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귀니엘 서비어는 초대 황제께서 친히 터를 정한 황궁에 화마를 불러일으켰으니 이것은 그 스스로가 황실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새로 즉위한 황제 폐하께서는 과거는 잊겠노라 하셨지만, 아직도 전국에서 패륜아를 지지하는 반역의 도당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다. 그들이 과연 황제께 충성을 맹세하고 제국의 영토를 하사받은 자들이 맞는지 통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나, 카몰 백작, 시안 몬트라우는 이런 비참한 현실에 고뇌한 끝에, 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거스르려 드는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선봉장이 될 것을 알리는 바이다.-깃펜을 내려놓았다.
잠시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투브가 앞다리를 들어 책상에 고개를 걸쳐 놓고 내게 물었다.
-이건 뭐야?
"나는 착한 놈이고 너는 나쁜 놈이니까 박살 내 주겠다. 하는 거야."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 정말 나쁜 놈이면 그냥 가서 박살 내면 되는 거 아니야?
"야생에서는 그렇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생물이 아니야, 이 친구야. 명분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명분이! 아무리 다른 세력이라고 해도 일단은 같은 제국의 귀족인데 마구잡이로 쳐들어갈 수는 없다고. 최소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명분 정도는 있어야지."
-몇 번을 봐도 인간은 참 귀찮아. 직선으로 갈 길을 빙빙 돌아가니.
"너는 평생을 가도 이해 못 할걸."
-이해할 마음도 없네요.
흥미가 떨어졌는지 책상에서 발을 뗀 투브가 내게 다시 물었다.
-이걸 어디에 보내는데?
"카몰 동부에 있는 안즈 지역을 다스리는 안즈 백작에게. 그쪽은 바다에 접하고 있거든. 항구가 필요해."
-오늘 보내는 거야?
"그렇지."
-그럼 출진은 언젠데?
"오늘."
-오늘 그걸 보낸다며.
"응."
-그런데 오늘 출진한다고?
"똑같은 말 계속하게 할 거야? 병력이 넘어가기 전에만 선전포고가 전달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내 말에 투브가 머리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말이 없는 것이 왠지 민망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정 안될 것 같으면 일단 침공해서 안즈 백작을 포로로 잡고 그 앞에서 이걸 읽어 준 다음 미리 보냈다고 우겨도 되고."
-너는 진짜……. 인간이란 생물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만들어 놓은 표본이 있다면 너 아닐까?
뭔 소리야. 이전 생에서는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하고 침공당했구먼.
투브는 인간이라는 생물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극한상황에 내몰린 인간은 악마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존재가 된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가까이 악에 다가가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 정도는 가볍게 제치는 악마들이 수두룩해질 것이다.
선전포고장을 잘 봉인해서 알버트에게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기를 등에 매단 전령이 말을 타고 성을 벗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길로 발걸음을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기사단 숙소에 가까이 갈수록 망치가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다.
카몰 내의 이름난 대장장이들은 모조리 불려 와서 단원들의 무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숙소 옆에 마련된 임시 불가마에서 망치를 내려치고 있던 노인이 나를 보고서 우렁차게 외치며 뛰어나왔다.
카몰 내의 대장장이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망치도 놓지 않은 채였다.
"오늘 저녁까지는 끝내야 하네."
"물론입니다. 다들 열심입니다."
"약속한 물품은 일이 마무리된 뒤에 보내 주도록 하겠네."
일의 보상으로 대장장이 길드에 히베아제 강철 무구 한 묶음을 연구용으로 내려 주기로 한 상태였다.
다른 기사가 들었다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놀랐겠지만, 이미 검은늑대 기사단이 쓸 히베아제 무구는 예비용까지 받아 놓은 상태이니 부담이 없었다.
"저놈은 어떤가?"
내가 안쪽을 가리켰다.
비 오듯 땀을 쏟아 내면서도 묵묵히 달궈진 방패를 두드리는 청년이 보였다.
길드장이 고개를 돌려 내가 가리킨 청년을 보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처음에 무작정 맡아서 키우라고 하셨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했었는데 각하의 사람 보는 눈에 놀랐습니다. 야금술을 배워 보지 않은 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좋고 섬세합니다. 이대로만 커 준다면 이름을 날릴 겁니다."
당연하지. 분리 운동이 끝나고 왕국 정벌까지 마무리되었을 때 저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귀족이 없었으니까.
인간의 손에 드워프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대장장이가 저기 있는 긴 후사인이었다.
이전 생에서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있었다.
천한 태생이라 제국 남부에서 정글을 개간하는 일에 강제로 투입되었다는 말을 그가 했었다.
철이 많이 나는 히베아나 트릴리아누에서 자랐다면 그 재능이 일찍 발견되었을 것인데 철은커녕 하루 종일 정글에 투입되어야 하는 남부에서 자랐기에, 분리 운동이 발발하여 병사로 징집되고 우연히 무기 관리를 맡는 공방에 들어가서야 재능이 꽃을 피웠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고, 남부까지 사람을 보내 몸값을 지불해 천역을 면하게 해 주고 직접 카몰의 대장장이 길드장에게 도제로 받으라고 윽박질렀다.
긴은 쓰임이 아주 많을 것이다.
'크흐, 알고 있는 건 다 써먹어야 해.'
감격하고 있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길드장에게 물었다.
"저놈 귀는 어떻다던가?"
긴은 선천적으로 청력이 매우 안 좋아서 얘기를 나눌 때도 필담을 나누어야 했다.
"의사나 마법사 몇에게 보였는데 힘들 것 같답니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군."
조금이라도 젊을 때 치료하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다른 대장장이가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하더니 옆에 있던 긴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내리고 섬세하게 방패의 곡면을 손질하고 있던 긴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다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나서 해맑게 웃고는 연신 인사를 꾸벅꾸벅했다.
손을 들어서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의사표시를 하자 바로 진지한 얼굴이 되어 다시 방패를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대장장이 일을 하는데 귀가 불편한 것이 큰 장애는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지?"
"워낙 시끄러운 곳이라 오래 일을 하면 다들 조금씩은 가는귀가 먹습니다. 어쩌면 긴은 귀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하하하!"
대장장이들이 오래 일을 하면 가는귀를 먹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 길드장은 내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렁차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든 가능한 빨리 진행해 주게. 공은 크게 보상하지."
***
저녁노을이 아직 어렴풋이 남아 있을 무렵, 검은늑대 기사단의 연무장에 모든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대장장이들이 밤을 새워 가며 손질해 놓은 무구를 착용한 모습이 아주 듬직했다.
다들 투구 가리개를 올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2황자마마, 아니 황제 폐하의 뒤를 따라 황궁으로 진격할 때 어떤 기분이 들었지?"
가장 앞에 선 칼 모예드, 기사단장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란히 뒤에 서 있는 로하나스, 오델리아를 비롯한 다른 기사단원들을 쭉 훑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매일 무기를 손질하고, 효율적인 오러 운용을 고민하고, 집단 전술을 훈련한다. 그리고 그 기사들 대부분은 잘 손질된 검을 적을 향해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은퇴를 하고, 남은 생을 어딘가의 남작이나 자작으로 살아가지."
노을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연무장을 덮었다.
"나는 그대들이 황궁을 누비며 느꼈던 감정을 알고 있다. 흥분이지. 투구와 투구 가리개 때문에 좁아진 시야! 손에 단단히 쥐인 무기! 갑옷 속에서 부서져라 뛰는 심장! 이 모든 것이 그대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을 것이다."
몇몇 기사들이 그때의 흥분을 되새기는지 호흡이 거칠어지고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그때의 흥분은 앞으로 그대들이 걸어갈 길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다. 전란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대들은 이 혼란한 시대에 기사라는 이름의 상징이 될 것이다. 붉은방패? 송곳니? 모두 검은늑대의 이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게 될 것이다."
스릉.
성년을 맞아 즈보크 자작이 새로이 만들어 준 강철검을 꺼내어 높이 들어 올렸다.
마지막 남은 햇빛이 강철검에 베여 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나의 이름은 사라져도 좋다! 하지만 검은늑대는 이 순간부터 적들의 공포가 되어 앞을 막는 자들을 분쇄할 것이다! 그대들의 역량을 마음껏 뿜어내도 좋다!"
말을 마치자 어둠이 완연히 내려앉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은 기사들의 시선은 어둠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출정이다."
철컥. 철컥. 철컥.
기사들이 올려 두었던 투구 가리개를 내리며 나는 소리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제국의 동쪽 끝,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
카몰과 안즈의 접경 지역, 안즈 측 검문소에서 병사 2명이 밀려오는 잠을 쫓으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어이, 오늘 낮에 지나간 전령 있잖아."
"카몰 백작이 보냈다는 전령?"
"그래, 그 전령. 무슨 내용을 들고 온 걸까?"
"그걸 궁금해해서 네가 어디에 쓸 건데?"
"안 궁금해? 지금 2황자마마가 황제가 된 판에 카몰 백작은 새 황제의 신임을 엄청나게 받는다잖아. 그런데 이쪽은 죄다 1황자마마 지지하잖아. 그런 상황에 왜 이쪽으로 전령을 보내냐 이거야."
"촌구석 무지렁이가 주워들은 소리로 떠들기는……."
"큰 판을 읽을 줄 알아야 출세하는 거야!"
"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언제 출세할 건데? 시끄럽고, 앞이나 잘 살펴. 저기 위쪽 얘기 못 들었어? 산탄다르 공작이 동원령 내려서 아주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일 거라는 소문이 있어. 카몰 백작도 모르는 일이야."
"너도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로 떠드는 건 같구만, 뭐!"
그렇게 한참을 투덕대다 이야기할 거리도 떨어져 잠시 침묵이 찾아왔을 때, 먼저 말을 걸었던 병사가 눈을 슥슥 비볐다.
"왜 이러지? 뭘 잘못 봤나?"
"경계 똑바로 해. 나중에 질책당하기 싫으면."
"아니, 왜 저기 산등성이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지?"
병사는 멀리서 꾸물거리던 것이 점차 이곳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야! 야! 저기 뭔가 온다!"
거대한 짐승이 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팟!
검문소 앞에 얼기설기 박아 놓은 목책을 뛰어넘은 짐승이 안에 있는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물어서 던지기 시작했다.
또한 짐승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언뜻언뜻 칼을 휘두르는 것도 보였다.
"침입이다!"
병사 하나가 소리치며 앞에 놓인 경계용 징을 마구 쳤다.
놀란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뛰어나올 무렵,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짐승에 타고 있던 남자가 외쳤다.
"이곳이 그대들의 전설이 시작되는 곳이다!"
말을 탄 기사들이 그대로 밀려와 검문소를 휩쓸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은 늑대에 탄 시안이 조용히 말했다.
"정리는 한 번에, 깔끔하게 하는 것이 좋지."
큰일을 하려거든 주변 정리부터 (3)언덕 사이에 난 평탄한 길에서 내가 외쳤다.
"정지!"
투브의 뒤에서 열심히 말을 달리던 기사단원들이 말에서 내려 말과 함께 길옆으로 숨어들고, 자연스레 사주경계를 시작했다.
말들은 처음에는 부스럭거리다가 훈련이 잘되어 있는 녀석들답게 차츰 움직임을 없앴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그럭저럭 엄폐물이 되어 주었다.
-오래간만에 내달리니 좋구먼!
내가 땅에 내려서자 투브가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기지개를 켰다.
기사단을 이끌고 안즈를 침공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전체적인 목표는 물론 안즈의 중심, 안즈 백작이 머무는 항구도시인 발시안을 점령하고 합병하는 것이지만, 안즈는 동서의 길이가 길고 남북의 폭이 짧은 형태의 땅이다.
자연히 보급선이 길어지고 남측에서 올라오는 1황자파 다른 귀족들의 협공을 맞기 좋은 형태였기 때문에, 일단 주위의 영주들을 포섭하거나 제압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전진기지를 만들어 나가야 했다.
"지도."
로하나스가 자신의 말안장에 매어 놓았던 지도를 내게 전해 주었다.
칼이 내 옆으로 얼른 와서 붙었다.
제국 방방곡곡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칼은 안즈에도 와 본 경험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본인은 기사지만 사막을 건너는 상인 집안 출신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길을 기가 막히게 찾았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있죠?"
"아마 이 정도쯤 될 겁니다."
칼이 옆으로 길게 누운 안즈 지방에서 1/5 정도 되는 지점을 손으로 짚었다.
직선거리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주위 자잘한 영주들에게 들러 검은늑대 기사단을 앞세운 무력시위를 하면서 왔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움직이지는 못했다.
"반응이 없던 곳은?"
칼이 네 곳을 짚었다.
"남작 둘, 자작 둘입니다."
여섯의 영주 중 넷이 우리에게 따르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중에서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에게 활을 쏘아 댔던 놈들이 몇 있는데, 성 밖의 들판을 말 탄 기사들로 짓밟고 불을 놓아 일단 가볍게 경고 정도만 하고 넘어온 상태였다.
"여섯 중에 넷이 반항을 했으니 나머지도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아마 포고문도 전해졌을 것이고, 빠르면 하루, 이틀 내에 우리의 침공 소식도 전해질 겁니다. 또 안즈 백작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이곳을 관할하는 군단이 9군단이었나요?"
"맞습니다. 안즈와 아래쪽의 리벤트를 담당하는데, 주요 병력은 대부분 리벤트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수도방위병단의 할 장군이 마음대로 병력을 움직인 뒤로, 군부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나마 귀족들의 분열은 1황자와 2황자로 갈렸지만, 군부 세력은 사령관들 아래 실질적인 군부대가 있다 보니 1황자, 2황자뿐만 아니라 본인이 새로운 왕이 되려고 하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군의 쿠데타에 귀족의 목이 달아난 곳도 몇몇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다행히 나는 4군단의 페제 베이카 장군에게 사태가 수습된 이후 케이신리와 팔스타인의 백작 작위를 약속하고 영구적인 세습과 다른 영지들에 비해 파격적으로 낮은 세율을 약속해서 4군단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명장 소리를 듣는 페제 베이카 장군이지만 평민 신분이라는 한계 때문에 명예 작위만 받고 실제 귀족이 되지는 못했지. 얼마나 아쉬웠으면 은근히 자기 책에도 그런 소리를 했을까.'
물론 베이카 장군은 현재도 꽤 고령이고, 이전 생에서는 자연사했기 때문에 나는 변수를 막기 위해 그의 병력은 빌릴지언정 그를 직접 전투에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정 전에 들러 의견을 물었을 때, 그는 이 사태가 몇 개월, 길어야 1~2년이면 진정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초반부터 분리 운동과는 규모가 다른데,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지.'
베이카 장군 같은 백전노장도 현재 상황을 정확히 읽어 내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항구 쪽은요?"
"3함대가 항구에 주둔하고 있긴 합니다."
나는 육지의 싸움에는 도가 텄지만, 바다와는 연이 없었다.
칼의 말에 내가 물었다.
"3함대라……. 직접 본 적이 있으신가요?"
"예,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제국 해군은 수뇌부가 죄다 노체 가문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중에서도 노체 공작의 차남, 이르한 노체 제독이 맡고 있는데, 규모나 병사들의 군기가 멀리서 보기에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7공작 가문 중의 하나인 노체 가문은 제국 북서부 검은 절벽 반도를 지배하던 해양 민족이었는데, 수백 년 전 제국에 편입된 이후에는 공작 위를 받고 그 탁월한 기술을 인정받아 현재는 해군 요직에 노체의 성이 안 달린 사람을 찾는 것이 빠를 정도였다.
게다가 방계 가문도 아니고 현 공작의 아들이니 쉽게 볼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흠…… 노체 공작은 1황자 지지를 선언했었죠."
마음 같아서는 동쪽 항구도시인 발시안까지 바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현재 병력은 나를 포함해서 1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였다.
뒤에서 백작들의 기사단과 4군단 일부가 따라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더 이상 파고드는 것은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여기서 돌아가죠. 반항한 영주들을 끌어내리고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아 보이네요. 산탄다르 공작에게 북쪽에서의 지원을 요청하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어요."
돌아가라는 명을 하달하는 사이, 기사 하나가 내게 뛰어와서 보고를 했다.
"각하, 제국군 군복을 입은 자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벌써?"
검문소를 덮칠 때 빠져나간 인원들이 몇 명 있는 것으로 추정했지만 아직 다른 부대에 전해지기는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라니.
"인원은?"
"혼자입니다. 전령기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일단 대기."
"알겠습니다."
다들 기척을 죽이고 전령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그닥. 다그닥.
전령의 말이 속도를 낮추었다.
9군단의 마크가 전령의 팔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멈춘 말 위에서 전령이 크게 외쳤다.
"카몰 백작에게 전할 것이 있습니다!"
전령을 보내는 대응도 상당히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수는 두 가지.
하나, 정보가 샜다.
출정 위치는 출정일 저녁에 기사단원들에게만 알려 주었으니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침공 준비를 하는 것을 백작들과 베이카 장군이 알고 있었으니 친분 있는 주변 영주에게 미리 알려 주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둘, 9군단이 현 시국을 대비해서 병력을 미리 북쪽으로 전진시켜 놨다.
베이카 장군이 힘을 써서 9군단의 개입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고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경우 모두 앞으로의 진격 경로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어느 쪽도 반가운 경우는 절대 아니었다.
일단 저쪽도 공격적인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니 얘기나 들어 보고 싶었다.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로하나스가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유사시에 바로 행동할 수 있게 긴장하고 있도록."
투브와 함께 앞으로 나서자 전령이 말에서 내려 품 안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저는 9군단 소속……."
"쓸데없는 건 집어치우고, 용건만 말해."
단칼에 자르는 내 말에 전령이 무안한 얼굴을 하더니 곧 내게 봉인된 문서를 내밀었다.
바로 봉인을 제거하고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9군단은 카몰 백작의 용단을 지지하며……."
눈으로 쭉 훑어보니 나와 힘을 합쳐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말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쓰여 있었다.
나와 전령이 대치하는 동안 투브는 계속 허공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엄청나게 짠 냄새가 나는데?
'그래? 다른 건 없어?'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긴장을 엄청 했네. 뭔가를 감추고 있어.
문서를 원래 봉인되어 있던 모양으로 접으면서 전령에게 말했다.
"당황스럽지?"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
전령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왜 마나가 네 맘대로 안 움직이는지 당황스럽지 않아?"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내가 문서를 읽어 내려갈 동안 마법사로 추정되는 전령은 내게 마법을 쓰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었다.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마나가 전령 주위에서 움직이려다가 내게 끌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타 군단으로 위장한 거로 모자라서 암살 시도까지 해 놓고 발뺌할 거야?"
팟!
오러를 운용해서 앞으로 튀어 나간 뒤 전령의 배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우윽!"
전령이 바닥에 쓰러져 헛구역질하며 굴렀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쟁 중이라도 전령에게 손을 대면 안 되는 것인데!"
전령의 뺨에 검 끝을 대고 말했다.
"놀고 있네. 3함대 제독이 뭘 꾸미는 것인지 말해."
"3함대는 모릅니다! 저는 9군단 소속입니다!"
지금까지 투브와 같이 있으면서 느낀 것인데, 투브가 가지고 있는 '눈'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정확히 무엇을 보는 것인지는 특정할 수 없었다.
오러나 마나의 상태, 감정, 잠재력 기타 등등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의 것이지만, 그 능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맞아떨어졌다.
내가 데려온 대장장이, 긴 후사인을 보고도 한눈에 '드워프는 하루 일하고 하루 술 마시는데 이놈은 술을 안 좋아하니 드워프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나는 투브가 말해 준 '짠 냄새'와 '감추고 있다'라는 정보에 의거해 이 전령이 3함대 소속이 아닌가 해서 떠보는 중이었다.
"사령관께서도 이 일을 들으시면 노하실 겁니다!"
전령은 아직도 엎드려서 숨을 고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전령의 앞에 쭈그려 앉아 말했다.
저렇게나 억울한 눈빛을 하는 것을 보니 잘못 짚었나 싶기도 했지만, 더 나가 보기로 했다.
"9군단 소속이라고 치자. 나를 왜 죽이려고 하는 건데? 진급시켜 준대? 협박당했어?"
"이익!"
전령의 눈이 살기등등하게 변하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나를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마법사의 신체 능력은 내가 보기에 너무 느렸다.
단박에 단도를 든 손목을 잡아 비틀고 손바닥으로 놈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전령은 꽥 소리를 내더니 기절해 바닥에 엎어졌다.
놀라서 달려온 칼에게 말했다.
"결박한 다음, 제일 가벼운 기사의 말에 이거 실으세요. 데려갑니다."
칼이 다른 기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걸 확인한 후, 내가 모두에게 말했다.
"전원 승마! 기지 구축을 위해 후퇴한다!"
마법사는 기사와 더불어 핵심 전력이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곳이 아니면 투입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법사가 전령으로 올 정도라면, 최소한 다른 부대나 마법사가 근처에 더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여기까지 오면서 영주들의 저항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이 전령의 소속이 9군단이든 3함대든,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거나 이미 이동을 완료했다는 소리다.
투브가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짠 냄새가 많이 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불화살이 하늘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언덕 너머에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