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74화 (74/180)

꿈틀대는 야심가들 (3)

"굉장한 광경입니다. 사힘에서도 이런 장면은 본 적이 없습니다."

칼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했다.

부대의 내부, 울타리로 구분된 구역에 수많은 포로들이 거지꼴로 무기를 빼앗기고 손발이 결박당해 있었다.

안즈 지방의 영주들을 치고 포위망을 빠져나오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이 이미 수용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망자는 못해도 포로 수의 배는 나왔을 것이다.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칼."

그리고 옆에 있던 스토나 백작에게 물었다.

"하라고 했던 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려고 뛰어다니는 것은 좋았지만 스토나 백작은 귀족치고 승마에 익숙하지 않아 전장에 세우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백작 작위를 물려받은 집안의 가주인 만큼 카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귀족들과 두루 알고 있어서,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서 귀족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시킨 참이었다.

"기사를 포함한 귀족 포로는 다른 곳으로 분리했습니다. 일단 근방에 위치한 가문의 귀족이면 각자의 가문에 포로의 몸값을 지불할 의사가 있냐고 물으러 전령들이 출발한 상태입니다."

"인근 지역 귀족이 아닌 자들도 있지 않아?"

"절반 이상입니다. 아무래도 함대인지라 검은 절벽 반도에 위치한 가문들이 많습니다."

제국 해군의 핵심인 노체 가문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절벽 반도에 위치한 가문들은 해군을 비롯한 공직으로의 진출 말고도 해상무역을 통한 이권으로 인해 부유한 경우가 많았다.

포로를 데리고 있으면 좋은 협상 재료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아직 제국의 완벽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 상태에서는 보급이라고 해 봐야 카몰에 비축해 두었던 군량과 현지 조달밖에는 수가 없는데 다 데리고 다니기는 부담이 되었다.

"자작 이상 되는 가문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포로 하나씩만을 제외하고 다 죽여."

내 말에 주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내가 한번 말을 꺼내면 다시 주워 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귀족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군인 하나가 내게 물었다.

"각하, 귀족들을 다 처형하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 군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카몰의 귀족들은 내 앞에 서 있는 군인을 향해 동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름, 소속."

군인이 꼿꼿하게 서서 답했다.

"빌 파르, 4군단 71사단장입니다!"

어딘가 눈에 익다 싶더니 2황자가 습격당한 이후에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근처 영주들을 불러 모았을 때 베이카 장군의 도착을 알리러 온 군인이었다.

"71사단장, 내가 지금까지 시행한 것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었나? 나는 자네를 비롯한 4군단 장교들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던 네 곳의 성을 동시에 공략하는 것도 해냈는데?"

빌을 비롯한 군인들이 내 눈을 피했다.

참모장교를 압박하고 네 곳의 동시 공성전을 성공시킨 이후로 4군단의 군인들은 큰 불만 없이 내 명령을 따르는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자신들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하니 찔리는 부분이 있을 터였다.

"카몰의 생산력만으로 포로들까지 데리고 다니는 것은 무리가 있어. 그대가 베이카 장군에게 말해서 4군단 본영에 비축된 군량을 푼다면 모르겠네. 적어도 발시안을 점령하고 안정된 해상무역로를 확보할 때까지는 속도전으로 나가야 해. 최소한의 포로만 남긴다."

더 냉혹해져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하면 무시하고, 돌을 던지면 다른 돌을 주워 던질 뿐이다.

"일반 포로들은 데리고 가서 공성 시에 화살받이로 쓴다."

내 말에 다들 놀라 숨을 들이켰다.

다들 제각기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직전에 사단장이 깨지는 장면을 목격한지라 말을 아끼는 낌새였다.

외할아버지인 누이론트 백작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각하, 그들은 명을 따른 군인일 뿐인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현재 병력 중에서 칼과 더불어 내가 유일하게 존대를 하는 인물이 누이론트 백작이다.

그래도 자신의 말이라면 내가 귀 기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군인의 삶을 택한 이상, 포로가 된 군인의 말로가 어떤 것일지는 각자 감당해야 할 문제입니다."

"각하께서 하시려는 것은 무의미한 희생입니다. 각하의 인망과 평판만 악화될 것입니다. 포로 중에서도 전향 의사를 밝힌 자들이 많습니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불리에 따라 소속을 바꾸는 자들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극구 반대했지만 제가 고집을 부렸다고 소문을 내세요. 저 하나의 인망이 떨어지는 것으로 빠른 승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다른 사항 있으십니까?"

누이론트 백작이 물러났다.

주위에 있는 자들 가운데 누구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각자의 막사로 돌아간 뒤에 '이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따위의 투덜거림을 자기들끼리 할 것이다.

멍청한 놈들.

전장에서 믿을 것은 인망과 평판이 아니라 나 자신뿐이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 믿기에 확실한 승리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

2주 뒤 나는 앞으로는 제국 동부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도시인 발시안의 장엄한 성벽을, 뒤로는 계속 카몰에서 보내져 온 징집병과 4군단 소속 병력을 합친 4만의 군세를 두고 있었다.

현재 카몰 내의 방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면 거의 쥐어짤 대로 쥐어짠 병력이었다.

진군하면서 간간이 내륙까지 올라온 3함대군의 방해를 받기는 했지만, 성 하나를 완전히 지우고 화살받이로 포로를 내세우는 내 악명이 퍼진 덕에 안즈의 기타 영주들은 우리가 근처에 나타나기만 해도 저항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 줬다.

그럼 사양치 않고 약탈 직전 수준까지 식량과 무구를 빼내 오는 방식으로 길게 늘어진 보급선의 취약점을 해결했다.

다만 그것도 몇몇 영주들만 그러했을 뿐, 청야 전술을 쓰기로 마음먹었는지 발시안으로 접근할수록 들에 자라던 곡식을 태우고 성을 아예 비워 버린 곳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 성에 남아 있는 자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안즈의 모든 전력이 발시안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바다와 산을 동시에 접하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진입 경로가 각각 육지에서 하나, 바다에서 하나밖에 없는 천혜의 요새인 발시안에서 농성을 할 셈인 것 같았다.

우리는 해군이 아예 없기 때문에 혹여나 다른 1황자파 귀족들이 해로를 통해 발시안으로 병력 증원을 시도한다면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또한 안즈의 바로 아래 있는 지역인 리벤트는 분명 1황자파였지만 주둔 중인 9군단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9군단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발시안에서 시간을 오래 끌수록 불리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아."

전령이 카몰에서 들고 온 서신을 읽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카몰은 북쪽으로는 산탄다르 공작령, 동쪽으로는 안즈 백작령, 남쪽으로는 리벤트 백작령, 서쪽으로는 디시간이라는 작은 제국 직할령을 접하고 있는 땅이다.

병력을 움직이면서 리벤트와 디시간, 그리고 디시간의 북쪽인 산탄다르 옆에 있는 1황자파 귀족들의 움직임을 걱정했었는데, 산탄다르 공작도 병력을 움직여 다른 1황자파 귀족들의 영지를 침공한 탓에 현재까지 카몰로 진격해 들어온 병력은 없다는 서신이었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내게 나쁘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얼른 발시안을 함락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에 병사들의 피로도도 쌓여 있을 것이고, 카몰을 너무 오래 비워 두기도 했기에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산탄다르 공작이 얼마나 해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카몰 북부는 그녀 덕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 빠르게 해군을 확보한 뒤에 군세를 키워 남하한다.'

남쪽에는 내가 죽을 때 앞에 있던 4명 중 하나인 스와라 위샤인의 가문이 있었다.

과거의 생에서 위샤인 가문은 분리 운동과 왕국 정벌을 통해 제국이 전화(戰禍)에 휩쓸렸을 때,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본인들의 기사단과 영민으로 용병 장사를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주위 피폐해진 영주들의 땅을 사들여서 부흥했었다.

원래 봉지(封地)의 매매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제국의 질서가 흔들리고 영주들이 급전이 필요한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수단이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을 때는 백작 가문인 위샤인가에서 보유한 땅이 남부의 공작령인 리히트와 에베보다 큰 정도였다.

당연히 위샤인 가문의 엄청나게 커진 입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들이 있었고, 아버지인 홈 위샤인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스와라 위샤인은 '혼란했던 시대에 제국의 재산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잠시 맡아 두었던 것.'이라며 가지고 있던 영지의 절반을 떼어서 제국에 바쳤다.

능구렁이 같은 처세로 황제의 신임을 얻은 스와라 위샤인은 후작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수완만큼은 쉽게 볼 수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현재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압력에 눌려 있던 잠룡들이 조금씩 몸을 비틀고 있는 때, 위샤인 가문이 성장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시기였다.

그 가문이 발흥하기 전에 얼른 뿌리부터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제국 동부의 다른 영주들을 압박할 수 있고 그 자체로도 큰 교역항인 발시안을 차지해야 했다.

-즐거워 보인다?

'내가?'

-계속 웃던데?

'그래? 몰랐네. 일이 쉽게 풀려 가는 것 같아서 웃었나?'

-쉬울 것 같아? 지금까지 봤던 성들과는 다르게 아주 견고하고 높던데.

'성이 높다고 안 무너지면 다들 하늘까지 성을 쌓겠지. 아마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들을 불태우고 성을 비웠겠지만 결국 자기들이 고립되어 버렸어. 전술을 글로만 보고 배우니 저런 꼴이 나지. 제독 이름이 이르한이라고 했나? 이런 애송이한테 진다는 건 상상도 안 돼.'

천천히 발시안의 성벽과 그 앞에 진을 친 적군을 보고 있자니 로하나스가 다가왔다.

그는 검은늑대 기사단이지만 전투가 없을 경우에는 내 부관 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의 로하나스는 모르겠지만 이전 생에서도 그는 내 부관이었다.

"각하, 안즈 백작의 서신입니다."

"뭐래?"

"회담을 제의하고 싶다고 합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의도가 불투명합니다. 회담까지 제의할 정도라면 굳이 청야 전술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알아서 발시안을 바치겠다고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장소랑 날짜는 우리가 정하는 것을 승낙하면 회담에 응하겠다고 답장해."

회담장은 전장보다 배는 치열하다.

전장은 수틀리면 상대를 찔러 죽이면 되지만 회담장에서는 웬만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치열함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끝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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