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시안 공방전 (2)
"기다려!"
내가 주위에 속삭이자 활시위를 당기려던 병사들이 흠칫 놀라 화살 끝을 아래로 내렸다.
더, 조금 더 끌어들여야 한다.
아직이다.
3함대의 수송선에서 나온 작은 조각배들에 제국군 몇 명이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척후병일 것이다.
척후를 건드렸다가는 괜히 적의 경각심만 키워 주는 꼴이 된다.
조금 더 끌어들여서 확실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본영까지 비워 놓고 내려온 것 아닌가.
가능하다면 병력을 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의 지휘관이나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는 실무자도 사로잡고 싶었다.
이전의 싸움에서 귀족들을 죽이고 병사들을 화살받이로 쓴 것은 그들의 쓰임을 대체할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잔혹하고 냉정한 이야기지만, 전쟁 통에도 기술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죽이며 진격하는 와중에도 기사와 마법사는 물론이고 대장장이, 무기 개발자, 직조 장인 같은 기술자들은 모두 살려 두었다.
한 가지 기술을 수십 년간 지겹도록 몸에 익힌 자들이다.
살려 둘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항해술은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이다.
나는 해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군 제독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많았다.
제독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은 특출난 항해사 하나 덕에 폭풍을 피하기도, 적의 뒤를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가 있어도 배의 방향을 제시하는 자와 배를 이끄는 자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어느새 해안에 도달한 병력이 잔뜩 주위를 경계하며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상륙 예상 지점에 있는 부대들은 한참 뒤로 물려 둔 상태였다.
혹시나 상대편에 감지에 특화된 마법사가 있을까 봐, 오러를 읽히기 쉬운 기사들도 모두 한참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발각되지 않았고, 다시 처음의 해안가로 모인 적 척후병들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주위가 안전하다는 녹색의 신호탄이었다.
이제 조금 기다리면 수송선에서 작은 배들이…….
"이런 미친!"
작은 배를 이용해서 병력을 상륙시키리라 생각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전함과 수송선으로 이중벽을 만들어 그 안의 해류를 잔잔하게 만든 뒤 전함에서 마법사 몇이 내려와 해안까지를 그대로 얼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체 공작의 입김으로 해군에서 우수한 마법사를 다 데려간다더니, 해상 포격도 그렇고 상륙 방식도 그렇고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마법사를 갈아 내고 있었다.
히베아의 대장벽에서 본 마법사들의 합동 공격은 드물기는 했지만 내 이전 삶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바다를 얼려 길을 만드는 것은 아예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법사 몇이 교대로 마법을 써서 얼음길을 배에서 해안까지 잇는 데 성공했다.
수송선에서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나와 얼음길 위를 달려 해안에 상륙했다.
얼음길만으로는 느리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수송선에서 병사들이 실린 작은 배들도 계속해서 내려지고 있었다.
-저거 안 미끄럽나?
'그래서 오러를 운용해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기사들만 얼음길을 이용하는 것 같아. 기사들이 작은 배를 타고 오다가 배가 전복이라도 되면 전력 손실이 크니까 빨리 상륙시키는 효과도 있어 보이네. 굉장해! 이렇게 또 시야가 넓어지네.'
-그래서,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건데?
투브의 말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기사들이 5~6명 정도 조를 지어 얼음길을 달려 계속해서 해안으로 발을 딛고 있었다.
병사들이 탄 작은 배들도 슬슬 해안의 모래톱에 하나둘 도달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착착 자리를 잡는 것이, 훈련을 잘 받아 온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옆에 있던 궁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3개의 불화살이 연속으로 하늘을 갈랐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대들과 검은늑대 기사단이 신호를 보았다면 바로 이곳으로 합류할 것이다.
불화살이 떨어지기 전,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쏴라!"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일어나 상륙 중인 적에게 화살을 쏟아부었다.
이미 상륙을 한 적들은 그나마 방패를 들거나 배 아래로 기어들어 상황이 조금 나았지만, 아직 바다에 떠 있던 병사들은 아무것도 없이 화살을 맞아야 했다.
방패를 들겠다고 움직이다가 배의 균형이 무너져 뒤집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적군도 정예답게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화살에도 뚫리지 않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오러를 둘러 일반 병사들을 보호하고, 전함에서 마법 포격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전기 구체가 해안 바깥의 숲에 매복해 있는 우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떨어졌다.
"침착해! 당황하지 마!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핵심 전력인 4군단은 대부분 발시안 앞의 본대에 있고, 이곳에 있는 부대는 각 귀족의 영지에서 온 징집병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병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리한 상황임에도 포격에 압도되어 전의를 상실할 수 있었다.
"쏴라! 기사단이 올 때까지 쉬지 마!"
뒤쪽에서 말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늑대 기사단을 비롯한 카몰의 기사단들이 신호를 보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옆의 병사들을 더욱 독려했다.
"포격은 오래가지 못해! 곧 멈춘다! 막 내리는 놈들을 조준해서 맞혀! 몸이 물에 젖고 발이 모래에 박혀 움직임이 느릴 거다!"
실제로 강렬했던 포격의 기세는 한층 꺾여서, 번개 구체가 쏘아 올려지는 빈도나 강도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또한 허겁지겁 배에서 뛰어내려 해안을 향해 달려드는 적병들이 화살을 맞고 파도를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상륙을 시도하는 적병은 많고 내 주위 궁수들의 수는 많지 않아, 점차 상륙하는 인원이 많아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궁수들의 화살이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분명 많은 적병이 죽었으나 그것보다 배는 많은 숫자가 아직도 작은 배를 타고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게다가 이제 기사들은 모두 나왔는지, 일반 병사들도 얼음길을 이용해서 더 빠르게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돌격하라!"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칼의 목소리였다.
그의 함성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쪽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어 들고 해안가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내 말과 거의 동시에 투브가 앞으로 뛰쳐나가며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투브의 등에 올랐다.
발시안 안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3함대 입장에서 이 상륙은 사활을 건 수일 것이다.
적군이 쉽게 후퇴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본영의 뒤를 내어 줄 생각 또한 없었다.
쾅!
칼이 이끄는 기사들이 해안에 내려와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던 3함대의 기사들과 충돌했다.
적군 기사들은 화살에 의한 피해가 거의 없었기에 대충 봐도 100이 넘는 숫자가 해안에 내려와 있었다.
돌격 한 번에 상대 기사들의 진을 무너트리면 좋았으련만, 몇몇 적군 기사들의 무릎을 꺾었을 뿐 최초의 충돌은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들이 아군 기사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방패를 들어 충격에 대비했고, 해안의 모래사장은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 말이 제대로 힘을 주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3함대 기사들이 만들어 낸 단단한 방벽 사이로 긴 창이 말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목과 다리를 찔린 말들이 앞다리를 들고 발작하다 주인을 모래사장에 처박았다.
그러면 단단하게 뭉쳐 있던 적군 기사들이 움직여 틈을 살짝 만들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틈에서 줄 달린 갈고리가 몇 개씩 튀어나와 모래사장에 엎어진 기사의 갑옷에 걸렸다.
낙마해서 정신이 없을 기사는 갈고리에 걸려 적군의 진형 안으로 질질 끌려들어 갔다.
복잡한 움직임이었지만 아주 유기적이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 역시나 이들은 진짜 군인이었다.
분명 상대를 압박하고 있는 것은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둘 옆에 있던 동료들이 갈고리에 끌려들어 가는 것을 본 기사들이 성이 나서 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했지만 단단하게 세워진 인(人)의 방벽은 부분적으로 조금 흔들릴 뿐, 여전히 뒤에서 상륙하는 적병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때가 바로 투브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말의 힘이 아무리 좋아도 중갑을 입은 기사를 태운 채로 사람 키를 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투브는 그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었다.
"뛰어!"
거대한 늑대의 도약에 적과 아군 모두 잠시 전투를 멈추고 시선을 투브에게로 돌렸다.
평생을 가도 보기 힘든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거, 거, 검은 늑대다!"
"카몰 백작이다! 죽여라!"
자신들의 진영에 제 발로 들어온 나를 보고 적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죽어 줄 마음이 없었다.
투브도 마찬가지인지, 적 기사들의 머리를 뛰어넘어 진영 안으로 뛰어든 후 마구잡이로 적병을 물어다 바다로 던지기 시작했다.
나도 검을 뽑아 들어 오러를 밀어 넣고 달려드는 적병을 마구 베어 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날렸다.
그러나 수송선이 몇 대나 동원된 만큼 상륙하는 병사들은 아직도 많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적을 죽여라!"
나와 투브가 적진을 헤집은 덕에 적병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덕에 창으로 말을 찔러 기사를 낙마시키고 갈고리를 써서 낙마한 기사를 안쪽으로 끌어와 죽이는 적의 작전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아군 기사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적 기사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수의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몰아붙여야 했다.
"각하께서 안에 계신다! 돌파하라!"
밖에 있는 아군 중 누군가 외쳤다.
그 말에 선두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던 검은늑대 기사단이 적군의 기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뒤에서 적의 기사를 처리해 주면 좋으련만 주위에서 몰려드는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다가갈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투브에게도 날붙이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질긴 가죽과 억센 근육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다만 털 이곳저곳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내 털! 이놈들이!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투브가 한층 더 난장판을 치자 적진이 다시 한번 휘청였다.
"와! 돌격하라!"
투브가 물어 던진 병사 하나가 적군 기사들이 만들어 낸 벽에 직격했고, 그 틈을 타서 아군이 적을 죽이고 안쪽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3함대의 기사들은 재빨리 동료가 죽어서 만들어진 틈을 메우려고 했지만 검은늑대 기사단은 그런 빈틈을 허용할 정도로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들어진 틈의 양옆에 있는 기사들을 공격하며 계속해서 틈을 벌려 나가기 시작했다.
"막아라! 말을 죽여!"
"투구와 머리통을 함께 부숴 버려라! 각하를 보호해라!"
양측의 고함이 해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침내 한 사람이 서 있을 만한 틈이 두 사람, 세 사람 크기로 벌어지더니 그곳으로 말을 탄 아군 기사들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진 안으로 들어온 기사들이 무기를 마구 휘두르며 적을 참살했다.
상황이 급해진 것을 아는지 배를 타고 접근하던 적병들이 첨벙대는 소리를 내며 바다로 뛰어들어 해안가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얼굴을 가린 기사였지만 목소리와 등에 멘 단창은 틀림없는 로하나스였다.
"나쁘지 않아."
푸욱!
내게 달려들던 병사의 어깻죽지에 검을 박아 넣었다가 뽑았다.
"이런 애들만 빼면."
이제 해안가의 전투는 난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 눈에 아직도 얼음길을 달려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로하나스, 오델리아를 데려와. 그리고 칼에게 전해서 검은늑대 기사단은 내 뒤를 따르라고 해."
난전 속에서도 로하나스는 기가 막히게 오델리아를 찾아 내 옆에 데려다 놓았다.
"오델리아, 바다 위에서 싸워 본 적 있나?"
"없습니다."
"가자! 내 옆에서 싸울 기회를 주지."
나는 검을 들어 해안에 닿아 있는 얼음길을 가리켰다.
오델리아의 얼굴에 기쁨이 새겨졌다.
혹시나 투브의 무게 때문에 길이 무너질까 봐 개의 모습으로 변하게 했다.
나와 로하나스, 오델리아를 필두로 한 검은늑대 기사단이 얼음길에 올라 이쪽으로 달려오는 적병들을 베고, 밀어 바다에 빠트리면서 뛰어갔다.
얼음길은 수송선과 전함에까지 이어져 있으니 이대로 가면 그대로 배를 접수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델리아가 휘두른 대검에 맞아 죽은 적병의 피가 얼음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가장 선두에 서서 베고, 또 베고 있었다.
이제 배까지는 멀지 않았다.
"각하! 배가 움직입니다!"
로하나스가 외쳤다.
동시에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적! 쩌저적!
많은 수가 올라와 뛰어 댄 탓에 얼음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전함의 마법사들이 얼음길을 향해 마법을 날려 대고 있었다.
균형을 잃은 기사들이 휘청거렸다.
여기서 놓칠 수는 없었다.
얼음에 서서 왼손을 바다에 담궜다.
그리고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주위 마나가 급류가 되어 내 몸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부족하다. 더, 더, 저 배까지 닿을 수 있게!
"으그그윽……."
입 밖으로 밀려 나오는 신음을 참으면서 더 많은 마나를 그러모았다.
마나가 세차게 내 몸을 휘감았다.
혈관 하나하나가 타 버릴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모든 마나를 왼손에 집중시키고 아까 적군 마법사들이 바다를 얼리던 장면을 떠올렸다.
바다에 잠긴 왼손 주위로 얕은 살얼음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암시를 걸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물을 얼리는 간단한 마법일 뿐이다. 할 수 있다! 하고야 만다!
"으아아아아!"
순식간에 꽝꽝 하며 어는 소리가 나더니 바다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눈으로 봐도 적군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얼음길보다 넓고 단단해 보였다.
마법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중량을 버텨 내야 할 정도의 얼음을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가, 각하……."
놀란 로하나스와 오델리아가 간신히 내게 말을 걸었다.
마법을 쓰는 것을 보여 준 것은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주위의 소음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당장이라도 누워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전장의 사령관이다.
사령관은 서서 피를 토할지언정 쓰러져서는 안 된다.
천근만근 무거운 팔을 들어 얼음에 갇혀 있는 배를 가리켰다.
"뭐 해? 뛰어! 얼음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