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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77화 (77/180)

발시안 공방전 (3)

"제독, 지원군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안즈 백작 대리, 요드하버 셀라가 3함대 제독, 이르한 노체에게 물었다.

"곧 올 것입니다. 우리는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언제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입니까! 잠을 못 자서 경계 중에 성벽에서 떨어지는 병사도 있다는 보고입니다. 식량도 충분치 않습니다!"

가장 큰 식량 저장고 중 하나가 바깥에서 날아온 바위에 맞아 파괴된 상황이었다.

그것만이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동물의 썩어 가는 피가 묻어 있던 바위였던지라 남은 식량을 먹을 수가 없어 전량을 바다에 버려야만 했다.

발시안은 거대한 성이라서 식량 저장고가 여러 곳 있긴 했지만, 현재 청야 전술을 시행하고 몰려온 다른 성의 영민들도 몰려와 있어서 수용 인구를 한참 넘어선 상황이었다.

또한 병사들과 주민들에게 배급되던 식량이 팍 줄어서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상륙작전을 펼치러 간 함선들도 있지 않습니까. 곧 포위가 느슨해질 겁니다. 우리보다 남쪽에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도 배를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요드하버가 미심쩍은 눈으로 이르한을 바라봤다.

"다른 귀족이라면 누구 말씀입니까? 당장 바로 아래 있는 리벤트 백작과 리벤트에 주둔하는 9군단도 움직이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라면 희망이 없습니다."

"추이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올 것입니다. 제가 누구입니까, 노체 가문의 차남입니다. 황제가 되실 1황자마마와 아버지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요드하버가 겁에 질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르한은 이제 15살을 갓 넘긴 요드하버를 한번 쳐다보더니 뒤돌아 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이르한의 입에서 한숨이 푸욱 하고 나왔다.

상황이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르한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자신은 차남이기 때문에 형인 운트 노체가 가문을 잇고 노체 공작이 되는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이번 난리는 그에게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르한은 공을 세워 이곳에 독립적인 자신의 영지를 가지는 것을 꿈꾸었다.

노체 가문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절벽 반도는 제국에서 북서쪽에 위치했고, 자신이 있는 이곳은 제국의 동부이니 가문의 간섭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즈 백작을 설득해서 1황자 지지를 선언하게 했으나, 안즈 백작은 카몰 백작의 전령이 들고 온 선전포고문을 읽자마자 북쪽의 산탄다르 공작과 서쪽의 카몰 백작이 모두 2황자 지지를 선언했으니 자기 자신도 2황자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결국 그는 3함대를 움직여 발시안의 전권을 손에 넣고 안즈 백작을 방에 가두어 버린 뒤, 그 아들을 대리로 앉혀 둔 상태였다.

"망할 영감……."

9군단 사령관인 츠발크 가리옷 생각에 이르한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제국의 정통성은 1황자가 가졌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카몰과 안즈 간의 알력 싸움이 끝나면 그때 움직여서 이득을 취할 심산일 수도 있었다.

동맹도, 적도 없는 지금의 제국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카몰 백작, 산탄다르 공작, 아크라파소 후작, 제뉴인 공작, 리히트 공작, 에베 공작, 6군단, 중앙 함대 등등 많은 실력자들이 저마다 제국의 안정과 반역자 타도를 내걸고 제국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었다.

'카몰 백작? 저런 애송이에게 이런 꼴이라니!'

이르한 자신도 3함대를 총괄하는 제독이다.

바다에서의 싸움은 누구를 데려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나 육지의 싸움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9군단과 협력 관계를 맺어 두려고 한 것인데 이렇게 꼬여 버린 상황에, 이르한은 가슴에서 불이 솟는 것 같았다.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성벽으로 향하는 이르한에게 두 가지의 보고가 전해졌다.

"카몰군 투석기가 바위를 날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소규모 부대의 침투가 아니라 대규모로 성을 공략할 것 같습니다."

"출항했던 6대의 전함과 10척의 수송선 중 3대의 전함과 3척의 수송선만이 돌아왔습니다."

발시안 앞에 모여 있는 카몰군이 언젠가 공격해 올 것은 이미 예상된 사안이었다.

그러나 상륙을 위해 내보냈던 배들이 어째서 절반 이하만 돌아왔단 말인가.

이르한은 최대한 성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성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황급히 항구로 돌렸다.

***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요!"

"어째서 말도 안 됩니까! 성을 공략하는데 누구는 앞에 서고 싶어서 서 있습니까? 명령을 따라야지요!"

"그대들은 군인이지만 우리는 다르오! 영민이 죽으면 손해가 크단 말이오!"

"전장에 나왔으면 다 같이 군인입니다! 병력을 움직이십시오!"

4군단 71사단장, 빌 파르와 참모들은 귀족들의 주장에 얼이 나갈 지경이었다.

시안이 지시한 대로 두 번째 공성추가 완성된 것이 어젯밤이었다.

당장 오늘부터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데, 귀족들이 자신들의 병력은 후방에서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귀족들이 데리고 온 징집병은 이미 영민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소규모 침투 작전에는 동원되지 않고, 대부분 해안 경계나 후방경계 등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부분에 투입되어 있었다.

그것까지는 이해해 줄 만했다.

그들은 전문 인력이 아니니까.

하지만 공성은 지극히 소모적인 싸움이다.

머릿수 하나라도 더 투입해서 상대를 압박하고 조여야 간신히 승산이 보일까 말까 한 것인데 손해를 입기 싫어 귀족들은 발을 빼려 하는 것이다.

그나마 각 가문의 기사단도 후방에서 있을지 모르는 상륙을 막기 위해 빠져 있어서, 핵심 전력인 기사단의 손해도 거의 없는데 저렇게 뻗대고 있었다.

시안의 외할아버지인 누이론트 백작만이 왜들 이러냐며 귀족들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바뀐 귀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이 기가 찬 광경에 빌은 생각했다.

'방법이 거칠고 자비 없긴 했지만 카몰 백작은 확실하게 사람을 틀어쥐고 있었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하였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백작급 인사다.

제국에 있는 유력 백작 가문이 서른이고, 각지에서 입김 좀 불어 넣는다 하는 백작이 삼백에서 사백, 그 외 자잘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백작 작위를 달고 있는 사람이 천 단위는 넘는다지만, 다시 말하면 20억 가까운 제국의 인구 중 단 1,000명만이 백작이라는 작위를 달고 행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유제프 후작 가문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들이 많으니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격의 적기를 놓치겠다는 생각에 빌은 귀족들에게 물었다.

"왜 카몰 백작 각하 앞에서는 조용히 계시다가 지금 와서 그러십니까?"

시안이 언급되자 귀족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이들에게 시안은 정신에 아로새겨진 근원적 공포였다.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링스톤 백작이었다.

"크흠, 우리가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네. 각자의 전문적인 영역이 있지 않겠는가. 전투와 전쟁의 전문가는 누구인가? 군인들 아니겠나? 우리가 데려온 영민들같이 미숙련자들이 섞여 있으면 전문가들의 움직임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 말이네."

주위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제가 안 된다고 하면 따를 마음들은 있으십니까?"

빌의 말에 귀족들이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스토나 백작이 빌을 향해 작게 말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자네가 이곳을 통제하라고. 다르게 말하면 자네 말이면 우리가 공성에 조금 덜 참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이런 말이지. 우리도 맨입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네. 자네에게 챙겨 줄 만큼은 챙겨 주겠네."

누가 빌에게 청렴하게 살았냐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 또한 사단장까지 올라오면서 군의 더러운 꼴과 치부를 볼 만큼 보고 행할 만큼 행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투를 목전에 두고도 자신의 안위를 보존할 생각만 하는 귀족들을 보고 있자니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이런 자들이 귀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제국 상층에 올라앉아 있었구나.

자신들을 통제하는 자가 없으면 언제라도 머리를 들고 이득 될 것만 찾아 헤매는구나.

빌은 이런 자들을 밑에 두고 전쟁을 해야 하는 시안이 안쓰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병사들이 들을까 무섭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공성에는 전 병력 예외 없이 참여합니다. 병력을 이끌고 지정된 구역으로 가시지요."

백작들이 무언가 항의를 하기 전에 빌은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섰다.

돼지우리에 있는 것 같은 역겨움이 가슴 안쪽에서부터 밀려 나오고 있었다.

***

"그걸 말이라고 해!"

이르한이 앞에 서 있는 부관에게 성을 버럭 냈다.

적들의 후방에 상륙해서 성에 있는 인원과 합공을 펼치기 위해 보낸 6대의 전함과 10척의 수송선, 다해서 16척의 배 중 3대의 전함과 3척의 수송선, 6척만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정말입니다, 카몰 백작이 마법을 써서 일대의 바다를 얼리는 바람에 배들이 얼음에 갇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카몰 백작이 마법사라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으며, 설령 마법사가 있었다고 해도 각 전함에는 하나 이상 감지에 특화된 마법사가 타고 있기 때문에 상대편에 마법사가 있었음을 알아챘어야 한다.

"혼자서 일대의 바다를 모두 얼렸다고? 그건 무슨 미친 소리야! 그것도 배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황실 마법사도 그렇게는 못해!"

"모두 얼린 것은 아니지만……. 몇몇 배에까지는 빙판이 닿을 수준이었고, 그 배들이 탈취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 간에 근거리 포격전과 백병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쳐 왔다는 거야?"

"상대 기사진의 무위가 높아 인력 손실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복귀하면서 지상에 적의 흔적이 보이는 대로 포격을 했다고 했으니 타격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이르한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하는 작전이었다.

어디서부터 망가진 것일까.

화를 억누르며 상황을 복기하던 이르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부관에게 물었다.

"배가 탈취당하는 것을 막아? 그럼 배를 빼앗겼다는 소리야?"

"일단 되는대로 파괴하긴 했지만 침몰한 것은 전함 1대와 수송선 4대가 전부였다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전함 2대와 수송선 3대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때 등대에서 바다를 보고 있던 병사가 종을 마구 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군 배다! 지원군이 왔다! 아군 전함이다!"

그 말을 듣고 이르한과 부관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은 이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오오! 우린 살았어!"

"카몰 놈들! 반격의 시간이다!"

"와아!"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작은 점이었던 배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나는 돌아오는 건가."

그나마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돌아오는 배가 있나 이르한이 생각하려는 찰나, 배에서 항구를 향해 번개 구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전함 하나가 카몰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번개 구체가 정박해 있던 배를 맞혔다.

배가 터져 나가고, 불붙은 파편이 항구 곳곳으로 튀어 다른 배에도 불을 일으켰다.

"승선해! 승선! 출항해서 저 배를 침몰시켜! 어서!"

이르한이 고함쳤으나 며칠 동안 밤낮없이 성벽 경계에 나서야 했던 병사들의 움직임에서 절도와 신속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와아아아아아!"

그때 성벽 너머에서 아득한 함성이 들렸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발시안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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