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시안 공방전 (4)
스륵.
무언가 살짝 베여 나가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감기려는 눈을 떠 보니 앞에 있는 마법사가 벌벌 떨면서 발시안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마법을 쏟아붓고 있었다.
협박하느라 마법사의 목 옆에 올려놓았던 검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 검이 마법사의 살갗을 베어 낸 것 같았다.
"이런, 고의는 아니었어."
차츰 눈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마법을 엄청나게 써 댄 것치고는 굉장히 빠른 회복 속도였다.
변환 인자가 얼마나 경이로운 능력인지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멀리 발시안이 보였다.
항구 곳곳에서 불이 솟았다.
포격이 계속되는 와중에 황급히 항구에서 출항하려는 배들이 서로 얽히고 부딪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마법사의 목에 다시 한번 검을 들이밀고 말했다.
"아직 출항하지 못한 배를 노려."
마법사가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 때문인지, 등 뒤에 닿아 있는 기사들의 검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마법사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실 정도로 열심히 마법을 날려 댔다.
난장판이 된 항구에서 벗어난 함선 몇 척이 우리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이 열과 성을 다해 포격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전함 1대로 항구를 틀어막는 게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 공성추가 완성되었다고 했으니 오늘 총공세가 펼쳐질 것이다.
성벽에 모여 있을 시선을 조금 돌리기만 해도 목적을 초과 달성하는 셈이었다.
"눈이라도 돌아가면 바로 찔러."
뒤에 있던 오델리아에게 마법사의 감시를 맡기고 조타실로 들어갔다.
"배를 저기에 정박시켜."
바다에서부터 발시안의 성문 앞쪽으로 해자와 같이 파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훌륭한 방어 수단이 되어 주고 있었다.
병사들을 동원해 이 해자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발시안 측도 바보는 아닌지라 해자까지 접근만 하면 화살을 쏘아 대고 성문을 열고 기사들을 내보내 방해했다.
게다가 높이가 높은 성벽이 감시탑까지 이어져 있어 빠른 증원이 가능했다.
공성에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마법 포격의 사거리를 대충 본 결과, 적군의 전함이 저곳을 지키고 있으면 성문 앞까지 포격을 날릴 수 있었다.
해자의 폭이 좁아 전함이 안쪽까지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성벽 앞에 전함이 떠 있을지도 몰랐다.
"저, 저곳에는 옆에 감시탑이 있습니다. 아무리 전함이라지만 바로 옆에서 공격을 받게 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안전만 찾을 거였으면 침공도 안 했어. 빨리 배 가져다가 저기 박아."
항해사가 죽상이 되어 뱃머리를 돌려 해자의 입구로 향했다.
발시안에서 출항한 3함대의 전함들이 우리 뒤를 쫓고 있었다.
그쪽에서 날린 포격이 바다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지간히 약이 올랐나 본데?
투브가 배 후미에서 난간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열 받겠지. 출항도 못 해 보고 항구에서 박살 난 배가 꽤 있는 것 같던데.'
-너는 좀 괜찮냐? 배도 혼자 못 오르는 것 같더니?
'많이 좋아졌어.'
-너는 마법을 쓸 수 있다 뿐이지 엄청난 마법사가 아니야. 또 그렇게 무모한 짓 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어.
'일단 지금은 살아 있네.'
바닷바람을 맞으며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전함이 해자의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해자 양옆에 있는 감시탑에서 화살, 마법, 창이 쏟아졌다.
저 멀리 병력이 벌 떼같이 발시안의 성벽에 붙어 넘어가려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거대한 공성추가 성문으로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콰앙!
마법이 배를 맞히자 배가 흔들거렸다.
"으아아! 더는 안 됩니다!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항해사의 멱살을 잡아당기고 눈앞에 들어 올렸다.
"더 가! 침몰해도 해자 입구는 막아!"
침몰해도 최소한 적함이 이 위치를 점령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콰앙!
이번에는 뒤쪽에서 충격이 느껴졌다.
뒤쪽에 있는 전함의 포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배에 충격이 전달되고 있었다.
끼기기이이익!
강한 힘이 나무를 뒤틀어 찢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배가 멈췄다.
"거, 걸렸다……. 더는 폭이 좁아 못 갑니다."
항해사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 보니 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물 아래의 지형에 걸린 것인지 배에서 땅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다.
"내린다!"
내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배의 옆으로 밧줄과 줄사다리를 좌르륵 풀었다.
강아지로 변한 투브를 품에 넣고 마법사 하나의 목덜미를 잡은 다음, 남은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주르륵 내려갔다.
발이 바다에 닿기 직전, 손에 힘을 주어 하강을 멈췄다.
"얼려! 빨리!"
내 위협에 겁먹은 마법사가 상륙할 때 했던 것처럼 바다를 얼리기 시작했다.
상륙 때보다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빠르게 될 것 같았다.
감시탑에서 한 무리의 병력이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의 발이 땅에 닿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빨리! 더!"
내가 재촉했지만, 마법사는 아까부터 마법을 써 댄 탓인지 헛구역질을 하다 눈을 까뒤집고 축 늘어져 버렸다.
"젠장!"
그냥 봐도 아직 살얼음 수준이었기에 밟기는 무리가 있었다.
다시 한번 마법을 쓰려면 왼손을 써야 하는데, 왼손에는 마법사가 들려 있었다.
마법사를 던지려는 찰나, 옆에서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똑같이 해! 빨리!"
나처럼 마법사 1명씩을 들고 내려온 칼과 로하나스였다.
내 손에 들려 있는 마법사를 포함해서 마법사 셋이 남은 기력을 다 때려 붓자 엉성하긴 하지만 당장 무너질 염려는 없어 보이는 얼음길이 만들어졌다.
내 품에서 벗어난 투브가 얼음길 위에 올라서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적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필두로 한 인원들도 빠르게 밧줄과 줄사다리를 잡고 내려와 적을 향했다.
"가자! 오늘 우리는 발시안을 무너트린다!"
***
"공성추를 파괴해라! 마법을 쏴!"
발시안 측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공성추를 향해 불화살을 날리고, 마법사들이 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성벽만 지키고 있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며칠간 투석기가 쉬지 않고 날려 댄 바위들이 성벽 앞에 쌓여 작은 동산을 만들었고, 카몰군은 그것을 밟고 올라와 성벽에 갈고리와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이 아래쪽을 향해 끓는 물과 기름을 쏟아부었다.
뜨거운 증기가 아래 있는 병사들을 휘감았고 곧 그들의 살갗이 붉게 벗겨지기 시작했다.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해 눈꺼풀이 천근만근인 발시안군 병사들이 이 악물고 성을 사수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공성추만…… 공성추만 부수면 더 버틸 수 있다.
이미 공성추 하나는 마법에 파괴되어 전장에 나뒹구는 중이었다.
전장에 다른 공성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발시안 측의 희망과는 다르게 공성추가 성문을 때렸다.
쿠웅!
성문이 크게 요동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양측의 함성은 더욱 커져, 이제 숫제 악을 쓰고 있었다.
"활은 방패로 막고 마법은 몸으로 막아라!"
"뚫리면 끝이다! 공성추의 지지대를 노려라!"
생지옥 속에서 공성추를 조종하는 병사들이 영차영차 소리를 내며 공성추를 뒤로 끌었다.
원래는 말이 해야 했을 일이지만 성문 앞까지 오면서 말들은 적병들에 의해 다 죽어 나자빠진 상황이었다.
발시안 측 마법사들이 성문 뒤에서 마법을 쏟아부어 성문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대로 공성추가 성문을 치면 자신들에게까지 큰 충격이 전달될 것이 분명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성문이 뚫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쿠웅!
다시 한번 공성추가 성문을 때렸다.
성문에 마나를 흘려 보내던 마법사 하나가 각혈하며 혼절했다.
성문은 아직 건재했다.
'제발, 빨리 처리해 줘!'
발시안 측 마법사가 간절히 생각했으나, 그는 이미 말할 기력도 없었다.
게다가 성문 반대편에서 카몰 측 마법사들도 공성추가 성문을 때리는 시점에 맞춰 마법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발시안군의 혼을 다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점점 성벽 위로 올라오는 카몰군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득달같이 죽여서 성벽 밖으로 밀어 보냈지만, 그 자리를 다른 카몰군이 채우고 있었다.
"성문 뒤의 마법사 먼저 죽여라!"
뒤에서 난 소리에 성벽 안에 있던 발시안군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감시탑에서 발시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온 시안과 기사들이 있었다.
오면서 적을 어찌나 많이 베었는지 다들 갑옷과 무기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발시안군이 그들을 향해 덤벼들었지만 피 맛을 본 기사들은 더욱 매섭게 병사들을 도륙했다.
푸욱!
시안의 검이 마법사 하나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콰앙!
공성추가 다시 한번 힘차게 성문을 때렸다.
우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성벽에 큰 구멍이 생겼다.
그곳으로 카몰군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내 성벽에서도 카몰군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제국 동부 해양 무역의 중심, 아름다운 도시 발시안이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
-쓰레기 더미밖에 없는데?
"그러게 말이다."
항구에 서 있는 지금, 헛웃음이 나왔다.
이르한 제독은 발시안이 함락되기 전 자신의 3함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버렸다.
아주 간편한 해결책이었다.
그렇게 떠나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항구에 있는 물에 뜰 만한 것들은 죄다 부수고 가라앉혀 놔서 멀쩡한 배가 단 1척도 없었다.
항구에는 배였던 나무 파편들만이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배를 얻는 건 너무 욕심이긴 했지. 그래도 항구를 얻었으니까 나쁘지 않아. 발시안은 조선소도 있고, 오랜 기간 배를 만들어 온 도시야. 배는 만들면 돼."
-생각보다는 긍정적이네.
산탄다르와 히베아 쪽에 부탁해서 선박용 목재를 받아 와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빌 파르가 옆으로 다가왔다.
"잘해 줬어."
"아닙니다. 설마 배를 뺏어서 포격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해자를 넘으면서 손실이 많이 발생하리라 생각했는데, 각하 덕에 생각보다 인명 손실이 훨씬 적었습니다."
"뻔한 아부는 사절이야. 힘들겠지만 치안 꽉 잡아. 점령했다고 전부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빌이 돌아서려다 멈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뭐 더 있어?"
"그것이……."
빌의 말을 다 들은 내가 말했다.
"확실해?"
"저 말고도 그 자리에 있었던 장교들이 많습니다. 영지에 간섭하는 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시려면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아서……."
미친놈들.
성을 공격하는데 몸을 사려?
역시 인간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장교를 찾아가 상황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누이론트 백작에게 가서 물었다.
"다 듣고 오는 길입니다. 맞습니까?"
누이론트 백작이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내가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군율에 따라야지요."
"그들은 아군입니다."
다시 몸을 돌려 날카롭게 외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제가 아군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 그건……."
"어차피 떨어질 곳도 없는 평판입니다. 제가 부르거든 몸이 안 좋아서 못 오겠다고 하시면 됩니다."
내 거처로 백작들을 불러들였다.
원정에 참여한 다섯의 백작 중 누이론트 백작을 제외한 4명의 백작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다 왔나 보군. 고생들 했어."
드륵.
의자를 빼서 일어섰다.
그들에게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는 운명 공동체야. 나는 멈출 생각이 없어. 계속 나아가야지. 그대들은 나와 직접 봉신 계약을 맺은 영주들이니 아주 중히 쓸 생각이야."
슬쩍 던지는 언질에 각자의 얼굴에 기대와 웃음이 떠올랐다.
"링스톤 백작."
"예!"
"특히나 그대의 섬광 기사단의 활약이 컸다고?"
"하하하하, 아닙니다. 각하의 활약에 비하면 작은 부분입니다."
"아쉬운 일이야."
"예?"
"섬광 기사단이 주인을 잃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활약을 많이 한 링스톤 백작이 성안에 매복하고 있던 적의 칼에 맞아 죽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
서걱!
그대로 검을 꺼내 링스톤 백작의 가슴을 베었다.
피가 튀어 탁자와 창문에 붉은 얼룩을 만들어 냈다.
"내 뜻에 따르지 않는 자는 필요 없어. 멋대로 행동하지 마."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귀족들이 뒤로 넘어졌다.
검을 손에 들고 몸을 뒤로 돌려 물었다.
"할 말 있나, 스토나 백작?"
전쟁의 시대
"별고 없으셨습니까?"
발시안에 도착한 그레인 홀이 내게 인사를 했다.
그레인은 나와 대화를 나눈 후 정말로 1년 뒤에 수도로 올라가서 사직서를 내고 가족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의 동료들도 설득해서 데리고 내려온 그레인에게 섭섭지 않은 대우를 했음은 물론이다.
능력이 발군인 데다가 본인이 일중독자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 댔고, 그 덕에 제국에 물자와 세금을 보내면서도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은 물자는 장부상으로나 실제로나 잘 감추어서 주위에 들키지 않게 했음은 물론이다.
"남의 땅을 침공했는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천만다행이지 별고는 무슨."
격무의 여파인지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그레인을 보고 내가 실없이 농담을 던졌다.
나와 지내면서 이런 내 어투에 익숙해진 그레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오면서 봤습니다. 많이도 불태우고 부수셨더군요."
"어쩔 수 없었어. 기동전이란 그런 거야."
"점령 이후도 좀 생각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거 생각하면 전쟁 못 해. 일단 개기는 놈들은 철저하게 밟고 나중에 다시 세우면 돼. 그렇게 하라고 자네 같은 사람들이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보고 왔으니 대충 계획 정도는 세우면서 온 거 아니야? 왜 이러나, 선수끼리."
그레인이 푸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는 해 보겠습니다만, 솔직히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네야 뭐 잘하겠지. 이미 시작했지?"
"사람을 보내 두었습니다."
침공을 받아 성을 빼앗기게 될 경우에는 최대한 적을 방해하기 위해서 행정 문서를 파기하거나 들고 가는 것이 기본이었다.
발시안은 그 자체로 규모가 큰 도시이기도 했고 해양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문서가 없다면 당분간 행정 체계에 큰 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
이르한 제독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공문서를 죄다 바다에 버리거나 불태우게 했다는데, 다행히도 안즈 백작이 이르한 제독에 의해 유폐당하기 직전 중요한 문서들은 숨겨 놓으라고 가신들에게 명령해서 그렇게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발시안의 영주로는 계속 안즈 백작을 남겨 두실 겁니까?"
"일단은 안즈 백작의 아들을 카몰로 보내는 걸 조건으로 해서 그냥 앉혀 두려고. 생각보다 온건한 인물이기도 하고 안즈에서 평판이 상당히 좋아. 괜히 건드려서 반감을 살 이유는 없지. 이미 지금도 욕을 엄청나게 먹고 있거든."
-그동안 한 짓이 있는데 욕만 먹는 게 어디야. 칼 안 맞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투브가 괜히 한마디 끼어들었다.
'칼은 전장에서 무수하게 날아오거든? 옆에서 못 봤어? 다 내가 막아 내고 쳐 낸 거지.'
한마디를 쏘아붙여 주고 다시 시선을 그레인에게로 옮겼다.
"그래도 그건 임시적인 조치고, 누이론트 백작을 남겨 둬야지. 중요한 지역이니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남겨야 하니까. 둘 다 자네가 하는 일에는 찍소리 못 하게 해 놨으니까 걱정 말고 일해.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카몰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리벤트의 9군단과 서쪽 디시간의 4723독립여단이 손을 잡고 병력을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었다.
두 부대뿐만 아니라 리벤트 백작도 동원령을 내려 영민을 동원했다 하니 엄청난 물량 공세가 될 것 같았다.
발시안은 해양으로 나아가기엔 적합한 위치지만 방어 전략을 수립하기에는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카몰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고 적을 맞이해야 했다.
이제 첫 승리를 했을 뿐, 쉴 시간은 없었다.
그레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공격과 방어는 다르지 않습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싸우는 것에도 관심을 두나 봐? 괜찮아. 수를 써 놨어."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내가 화제를 전환했다.
"카몰은 좀 어때? 대리는 잘하고 계신가?"
출병하면서 대리로 외할머니 되시는 누이론트 백작 부인을 세워 놓고 온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알버트에게 대리직을 맡기고 싶었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오랜 기간 직접 누이론트의 내정을 맡아 본 경험이 있는 외할머니가 잘하실 것 같기도 했다.
외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그레인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예……. 너무 잘하고 계십니다……. 각하께서 전장에 계신데 뒤에 남은 자들이 편히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본인부터 갑옷을 입고 생활하십니다……. 뵈러 갈 때마다 저희에게도 입으라고 하시는 건 아닌지 부담되어 죽겠습니다."
-푸하하하하! 멋진데!
생각지도 못한 투브의 웃음소리에 머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전 생에서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었던 외할머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뭐, 그분이야 워낙 열정적이시니까."
"그리고 4군단에 대량의 신병이 도착했습니다. 원래 지지난 달에는 왔어야 하는데 1황자파 지역을 에둘러 오느라 조금 늦었다고 합니다. 베이카 장군께서 증원이 필요하면 말씀하시랍니다."
"좋은 소식이네. 마법사는 좀 오려나? 안즈에서 병력을 징집하기에는 아직 좀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기반 시설은 남아 있는 곳들이 많아 두 달 정도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달이면 너무 늦어."
그레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 말했다.
"발시안으로 들어오는 교역품이 많아 안즈가 부유한 편이었기에 그나마 빨리 복구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적당히 부수고 다니셨어야죠."
"그거야 뭐, 그대가 알아서 잘하겠지."
딴청을 피우는 내 모습에 그레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 그렇게 하면 더 빠질 텐데?
"저비스는 뭐래?"
사령 마법에 의해 창궐했던 역병의 방역 작업이 끝난 후에도 저비스는 수도로 돌아가지 않고 카몰에 남았다.
이타르가 직접 만들어 낸 한 줄기의 감자를 연구해서 이용할 방법을 내놓으라고 내가 시켰기 때문이다.
몇 년간 조그만 결과들은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직접 이용할 만큼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진전이 좀 있기는 한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하는 그레인의 얼굴을 흘끗 쳐다봤다.
저비스가 하고 있는 연구의 내용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저비스의 말을 전달하는 그레인의 얼굴에는 일말의 궁금증이나 호기심도 없었다.
자신의 할 일은 말을 전하는 것뿐이고, 다른 내용에는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기도 했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본인의 일에만 신경 쓰는 걸 보면 관리는 관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잘 전달받았어. 가서 일 봐도 좋아."
그레인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다가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아, 각하.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병사들이 말하기를 링스톤 백작이 각하의 목숨을 구했다는데 정말입니까?"
내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됐어."
***
며칠 뒤, 안즈 지역의 총책임자가 된 누이론트 백작에 의해 원정에 따라왔던 4군단 병력이 안즈와 리벤트 지역의 접경 지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카몰뿐만 아니라 안즈까지 범위가 확대되어서 지켜야 할 구간이 늘었지만, 신병들과 산탄다르 지방에 주둔하던 4군단 인원들도 이쪽으로 내려오기로 했기 때문에 공백은 곧 메워질 예정이었다.
안즈의 토지 재분배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초반에 다섯 백작들에게 나눠 주었던 영지와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안즈의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빼면 남은 땅은 전부 임시적이지만 내 직할령이었다.
아직 다른 공작들의 영지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백작 중에서는 나 정도의 직할령을 가진 사람이 손에 꼽을 것이다.
왠지 뿌듯해졌다.
마지막 4군단 부대가 떠나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그것을 보던 내가 몸을 돌렸다.
"우리도 가지."
갑옷도 입지 못하고 가슴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채로 나와 있던 링스톤 백작이 바로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답했다.
"이미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나는 링스톤 백작을 죽이지 않았다.
가슴을 베어 내어 피만 흘리게 만들었을 뿐.
오히려 안즈를 침공하지 않은 상태고, 우리가 카몰에 있었다면 정말 죽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였고, 그는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기사단인 섬광 기사단과 링스톤 지역의 영민들을 지휘해야 하는 지휘관이었다.
아군을, 그것도 지휘관을 죽이는 것은 적군을 죽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적에게 잔혹한 지휘관은 아군에게 명장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아군에게 잔혹한 지휘관은 적군에게 명장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 자체로 적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지휘관이라는 의식도, 지금이 급박한 전시라는 의식도 아직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번 한 번은 일벌백계 차원에서 링스톤 백작의 가슴만 가른 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다음부터 이런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는 가슴이 아니라 단번에 목을 베겠다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소문은 '나를 급습하려던 적병을 링스톤 백작이 몸으로 막았다' 이런 식으로 냈고, 그 덕에 병사들은 링스톤 백작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 사기도 올리고, 귀족들도 휘어잡고.
링스톤 백작도 좀 베이긴 했지만 주위에서 띄워 주니 기분은 좋을 것이고.
검 한번 휘두른 것치고는 얻어 가는 것이 굉장히 많았다.
"준비가 빠르구먼그래. 가슴은 좀 어떤가?"
"각하의 염려 덕에 괜찮습니다, 하하하하!"
분명 고통스러워 보임에도 링스톤 백작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괜찮은 척을 했다.
"그래? 그 적병도 참 솜씨가 없어. 그렇지 않나? 그대도 명심하게. 적이 있으면 확실히 죽일 기세로 검을 휘둘러야 해. 어설프면 안 된다는 말이지."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링스톤 백작이 허둥대며 자신의 부대가 있는 곳으로 멀어져 갔다.
그런 링스톤 백작 뒤로 병사들의 선망 어린 눈길이 따라붙었다.
살며시 뒤로 빠지려던 스토나 백작을 불러 세웠다.
"스토나 백작?"
화들짝 놀란 스토나 백작이 나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없냐는 내 말에 아직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이고, 각하께서 하시는 일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각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고, 내려 주시는 조그만 상이나 받으면 기뻐하는 범부(凡夫)일 뿐입니다."
스토나 백작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곁으로 달라붙었다.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제국의 백작이 범부라니. 게다가 전장에서 감히 사령관의 말을 무시하는 자를 어느 누가 범부라고……."
"아이고! 아니, 감히 어느 미친놈이 그런 망발을 저지른다는 말입니까!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립니다!"
스토나 백작이 황급히 다가와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어허! 그대가 그렇게 예를 표하는 것은 황제 폐하 한 분으로 족해. 누가 보면 내가 다른 뜻을 품은 줄 알겠어."
"각하, 분골쇄신해서 제국에, 아니 각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용서를……."
옆에서 누이론트 백작이 보고 있다는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지 스토나 백작은 내게 애원했다.
"내가 뭐라고 하던가? 잘하라는 거지."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촌극을 옆에서 보던 누이론트 백작이 고개를 젓더니 내게 말했다.
"각하, 떠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도 수십 년간 봐 온 스토나 백작이 저렇게 비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어째 제가 떠나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다들 아래에 모여 각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벽 아래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스토나 백작을 놀릴 때의 웃음기를 지우고 누이론트 백작에게 말했다.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항구를 가득 채운 배를 기대해도 될까요?"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의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누이론트 백작이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는 그 시선에 무안해진 나는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선박을 건조할 물자와 사람을 계속 보낼 거라 바쁘실 겁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몸 건강히 계셔야 합니다."
그렇게 남겨지는 자와 돌아가는 자의 대화가 끝났다.
내려와 보니 병사들끼리도 남는 자들이 가는 자들에게 안부 전해 달라며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아주 눈에 잘 띄었다.
검은늑대 기사단의 호위를 받는 공간에 투브가 이미 늑대의 모습으로 대기 중이었다.
'이제는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태운다?'
-타기 싫어?
'까칠하기는…….'
-네가 까칠하게 만드는 거야.
훌쩍 투브의 등에 올라타니 시야가 넓어졌다.
옆에 있는 로하나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신호를 받은 로하나스가 크게 외쳤다.
"출발!"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검을 휘감는 2개의 불줄기가 자수로 정성스레 놓인 깃발이었다.
승리를 맛본 병사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이제는 병사들도 분명히 알 것이다.
군웅할거, 전쟁의 시대가 막이 올랐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