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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79화 (79/180)

비밀 병기 (1)

4군단에 배속된 신병, 필리페 예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에게서 멀지 않은 위치에 같은 제국군 군복을 입은 자들이 무리를 이뤄 지나가고 있었다.

카몰의 서쪽인 디시간에 주둔 중인 4723여단의 마크가 그들의 어깨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꿀꺽.

필리페가 침을 크게 삼켰다.

군인이 되긴 했지만 사람 한번 찔러 본 적 없는 그였기에 전투가 겁이 났다.

신병 교육대 교관이 교육 중에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가 들고 있는 이 검으로 상대를 찌르면 피가 배어 나오고, 찔러 들어간 위치와 깊이에 따라 상대는 죽는다.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내용이기에 필리페와 동료들은 교관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나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러나 교관의 다음 말에 웃음은 얼어붙고 말았다.

-상대방의 상대는 네놈들이다, 멍청한 녀석들아. 군인이 된다는 것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

요즘 같은 시대.

서류상으로 귀족인 마법사들도 기초 훈련을 받으면 전국 각지의 전장으로 보내지는 현실이었다.

마법사의 수가 모자라 제국 대학이나 심하면 아카데미 졸업반에 있는 어린 마법사도 불려 나오는 일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힘없고 백 없는 평범한 군인인 자신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필리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읏차."

펠리페는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스러운 몸동작으로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 후 본대에 보고하러 떠났다.

멀지 않은 곳에 적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그의 상관이 깔끔하게 말했다.

"적의 진격이 예상보다 빠르군. 후퇴한다."

필리페는 감히 신병인 자신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상관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후퇴하는 겁니까?"

디시간군이 카몰을 침공한 것이 사흘 전이었다.

뭐,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상보적 관계인 영주들의 질서를 혼탁하게 만드느니 어쩌니 하는 명분이었다고 들었지만 필리페는 금세 잊어버렸다.

필리페가 궁금한 것은 어째서 계속 후퇴만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카몰 백작인 시안 몬트라우가 이끄는 카몰군의 핵심 전력이 발시안을 점령하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러나 카몰에 남아 있는 영주들도 꽤 있었고, 무엇보다 페제 베이카 장군이 이곳 카몰에 있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교육시키겠습니다!"

필리페의 옆에 있던 선임이 필리페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상관에게 힘차게 말했다.

찌르르하게 번지는 통증 속에서 필리페는 신병 훈련소의 교관이 했던 말이 또 생각났다.

-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면 대부분은 하지 마라. 군대는 그런 곳이야. 지금은 내 말뜻을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그리고 필리페는 직감했다.

'개털리겠구나.'

네가 알아서 어디에 쓰겠냐며 뺨이라도 때리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힌 필리페에게 들려온 것은 생각보다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상관의 목소리였다.

"애 너무 잡지 마라. 전투 앞두고 탈영이라도 하면 너만 피곤해진다."

"시정하겠습니다!"

선임에게 가볍게 꾸중을 한 상관이 말했다.

"이름이…… 필리페군."

"옙! 필리페 예거입니다!"

"우리가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후퇴 아닌가, 몇 날 며칠 동안 적 얼굴만 보면 부대를 뒤로 물리고 있는데.

필레페가 의문을 가질 즈음, 상관이 말했다.

"후퇴를 하면 적은 우리의 뒤를 잡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많은 인적, 물적 손해를 입게 된다.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며칠 동안 가장 먼저 적을 발견하는 척후 역할을 하던 자네라면 잘 알겠구먼? 적이 우리 물자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적의 무기에 우리 병력의 피가 묻은 걸 본 적은?"

필리페가 생각하다 답했다.

"없……습니다."

"피해 없는 후퇴는 기적이라고들 하지.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건가?"

"아……!"

필리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그래, 우리는 적을 유인 중이다."

필리페의 입이 달싹거리다 옆에 서 있는 선임의 눈치를 보고 다물렸다.

아직도 정강이가 욱신거리는데 또 맞기는 싫었다.

게다가 저 선임은 한곳만 죽어라고 때리기로 유명했다.

"왜 유인하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상관이 빙긋 웃고 물었다.

"그건 자네가 생각해 보도록."

그리고 상관은 나가 버렸다.

곧바로 선임의 갈굼이 날아들었다.

"야, 작전장교님이 네 친구야?"

"아닙니다."

"군인은 까라면 까면 되는 거야. 질문은 학교에서나 하는 거라고 했어, 안 했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아닙니다."

끊이지 않는 갈굼의 루프 속에서 필리페는 상관이 미처 챙겨 가지 못한 종이 한 장을 보았다.

작전 계획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디시간은 크지 않은 지역으로 제국 직할령이라는 특성 때문에 비축된 식량이나 군량이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됨.

-4723여단의 장기는 치고 빠지기로, 상대의 전력을 갉아먹는 것.

-이외의 여러 방안을 생각해 보았을 때, 카몰과 디시간의 접경지대에 계속 출몰하며 신경을 돌리려는 방법을 쓸 것으로 예상함.

-거짓으로 후퇴하며 카몰 안쪽으로 끌어들여 상대 군량 소모를 유도하고 일거에 포위, 소탕하는 방법이 적합한 대응인 듯.

-전투 직후 카몰에 남은 다섯 영주의 병력과 4군단 병력을 동원해 디시간으로 진격.

마지막에 찍힌 카몰 백작 대리, 예카테리나 스와힐리 누이론트 백작 부인과 페제 베이카 장군의 직인까지.

자신은 이 전장에서 하나의 작은 점이지만 높으신 분들에게는 점들이 모인 그림이 보이는구나 하고 필리페는 생각했다.

"야, 선임이 말하는데 다른 데 보게 되어 있냐?"

"아닙니다."

"이거 아주 개빠졌네?"

선임의 갈굼이 신명나게 이어질 무렵, 상관이 다시 들어와서 놓고 갔던 작전 계획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선임을 향해 말했다.

"야, 적당히 해라, 적당히. 너 그러다가 뒤에서 칼 맞아도 모른다."

그 말에 혹시나 선임이 쫄까 싶어서 필리페가 눈을 부릅떴다.

선임은 그런 필리페를 보더니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요 새끼 이거 눈깔 치켜뜬 거 봐? 야! 안 깔아?"

아까 맞았던 정강이의 반대쪽 정강이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정강이를 부여잡으면서 필리페는 생각했다.

하나, 이 새끼는 진짜 또라이다.

둘, 눈은 치켜뜨지 말걸.

***

"그래서 현재 디시간 점령 직전이라고요?"

"그렇지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정말로 성내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누이론트 백작 부인이 내게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노장들의 저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카몰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라고 한 것은 내 의사였지만, 일거에 소탕하고 바로 디시간으로 진격할 것은 지시 내리지 않았다.

내가 도착해서 상대해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내 뜻을 읽고 그대로 행해 버렸다.

자기들 멋대로 공성에서 병사를 빼내 마네 했던 다른 귀족과는 차원이 다른 이해도였다.

책임자인 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런 작전을 입안한 베이카 장군도 장군이지만 과감하게 작전을 승인한 누이론트 백작 부인까지, 내가 이곳에 없어도 웬만한 적이 오지 않는 이상은 크게 문제가 없겠다 싶어 마음이 든든했다.

"영감은 바닷가에 두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안부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예전부터 집 안에서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기를 좋아했던 양반에게 배를 만들라고 했으니 신나서 붙어 있을 겁니다."

편히 쉬셔야 할 나이에 일거리를 맡겨 드리고 왔으니 꾸중이라도 한마디 듣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백작 부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넘어갔다.

"9군단도 우리를 향해 북진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이미 안즈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전초전이라 큰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대가 곧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카몰과 산탄다르를 관할하는 4군단은 다른 군단에 비해 소속된 병력의 수가 많긴 했지만, 현재 디시간, 카몰, 안즈로 전장이 분산되어 있어 4군단이라고 해도 모든 곳에서 전투를 벌이기에는 인원이 모자랐다.

게다가 9군단과 리벤트군은 절반은 카몰로, 절반은 안즈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절대적인 머릿수가 부족했다.

상황을 반전시킬 수가 필요했다.

"아버지께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시기만 적절하게 와 준다면 형세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위가?"

"그렇습니다. 더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버지께 큰 신뢰를 가지고 있는 외할머니라 아버지를 언급하자 더 물어보시지는 않았다.

"저는 며칠 내로 9군단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해서 계속 대리를 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있습니까. 손주가 큰일 하는데 이 할미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야지요."

"그리 생각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카몰에 계시는 동안 잠시간 누이론트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두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철그렁 소리를 내며 백작 부인이 멀어졌다.

-정말로 저 나이에 갑옷을 입고 생활할 줄이야. 듣긴 했지만 굉장하네.

"저번 삶에서는 저러고 말도 타셨어. 어머니는 안 계셨지만, 이모들도 다 갑옷 입고 말 타고 할머니 옆에서 싸웠지. 다들 보통은 아니셔."

-오러도 다룰 줄 모르는데 완력만으로 저 정도라……. 너희 어머니의 그 성격과 몸에 맞지 않는 강인함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인간이라는 종의 다양성과 독특함은 봐도 봐도 끝이 없네.

백작 부인이 나가고 얼마 뒤, 알버트가 저비스를 데리고 들어왔다.

둘 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웠다.

"잘 있었어?"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고생은 이제 시작이지, 뭐. 나 없는데 알버트도 수고가 많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근질근질하지 않아? 나랑 같이 전장으로 가는 건 어때? 알버트 정도면 한 부대 정도는 금방 아니야?"

"원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싱거운 대답이었다.

"딱딱하기는. 나도 데려가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에는 카몰에 내 사람이 너무 없어. 백작 부인이 계시긴 하지만 하나 정도는 더 집을 지키고 있어야지. 알버트가 비서치고는 일을 너무 잘하기도 하고."

실제로 백작 부인이 내게 알버트에 대해 묻기도 했다.

기사라 들었는데 이렇게 내정에 능통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며 말이다.

알버트가 빙긋 웃었다.

"부르기만 하시면 바로 옆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알버트에게 간단한 치하를 마친 뒤, 저비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얼굴에 피곤이 가득 묻어 있는 저비스였지만, 눈만은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형님."

"오오!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겠어?"

"빠르면 반년 안쪽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몇 년은 걸릴 거라더니 진전이 빠르네."

저비스가 내게 말했다.

어딘가 확신이 없는 말투였다.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릅니다. 제국에 혼란만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을 가져, 저비스. 네가 하는 그 일이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이 난세를 끝낼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수의 목숨이 죽어 갈 뿐.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의 여파는 제국에서 끝나지 않는단다.

온 세계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겠지.

저비스가 나가고, 곰곰이 생각했다.

"반년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네."

그리고 옆에 있는 알버트에게 말했다.

"귀족들을 소집해 줘, 당장 오지 못하는 자는 대리인이라도 꼭 보내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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