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병기 (2)
"기사단 인원 제한은 없다고 생각해라."
모여 있던 사람 모두가 내 말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입니까?"
누군가 물었다.
"아니, 말씀도 안 드렸는데."
"그렇다면 제국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 아닙니까?"
"웃기네. 다들 정식 기사단 외에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영민들 따로 빼놓고 훈련시키잖아. 입대도 못 하게 막아 가면서. 여기 안 그런 사람 있나?"
모두 내 눈을 피했다.
순전히 우연으로 인해 깃드는 마나의 축복과는 달리 오러는 어릴 때부터 훈련만 하면 다룰 수 있다.
일정 정도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뼈를 깎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귀족이 아니라도 먹고살 만한 가정이라면 아이의 심신 단련을 목적으로 어릴 때부터 기사를 초빙해 기본적인 오러 운용 정도는 익히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러는 기본적으로 피와 함께 흐른다.
그 오러를 신체 밖으로 뻗어 내어 무기나 갑주를 감싸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몸 안에 흐르던 오러를 순간적으로 운용해서 신체 능력을 일부분 강화하는 건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러를 한 번이라도 익힌 자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오러를 익혀도 국법으로 엄격하게 제한된 기사단의 인원수 때문에 기사가 되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지난 삶의 로하나스 역시 실력은 충분했지만, 송곳니 기사단의 인원 문제로 10년을 군인으로 있지 않았던가.
"제국 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옆 지역을 침공한 건 제국 법을 위반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아주 작살을 냈는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옆 지역을 작살 낸 당사자 앞에서 '그것은 위법입니다!'라고 할 멍청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감을 못 잡은 사람이 있어서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안즈를 침공했고 디시간은 우리를 침공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전시(戰時)라고, 전시! 당장 목숨 걸고 싸우는데 '이건 이 법에 위반되고 저건 저 법에 위반되고.' 이러고 있을 거야? 상대는 500명의 기사로 달려드는데 50명의 기사로 막을 거야? 당하기 싫으면 먼저 족쳐야지!"
내 입에서 나온 전시라는 말에 다들 몸을 떨었다.
사람은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입으로 현실을 듣기를 원한다.
아니라고 생각해도 지금은 전시였다.
"나중에 문제 될 일 생기면 책임은 내가 진다. 오늘부터 카몰의 영주들에게 기사단 인원의 제한은 없다. 각 기사단의 인원은 해당 영주의 재량에 맡긴다."
몇몇 이들의 눈이 빛났다.
기사단을 두지 않는 가문도 있지만, 콧방귀 좀 뀐다고 하는 가문에서는 무리해서라도 기사단을 두려고 했고, 그 이유는 기사단은 곧 허용된 사병이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입김이 닿는 부분이 넓어질 기회인데 이것을 싫어할 영주는 없었다.
"다만, 기존의 기사단원을 포함해서 기사단원이 증원될 때마다 상세한 신상을 적은 문서를 내게 올려야 하며, 각 가문의 기사단 2/3 이상은 전선에 주둔해야 한다."
내 말에 몇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나도 바보가 아닌지라 내가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동안 영주들이 자기 땅에서 기사들을 야금야금 모으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전력 증강을 위한 기사단 인원 해제이지, 영주 놈들 목소리 커지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관리 감독해서 헛바람이 들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이상 해산."
영주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상의하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지막 영주가 임시로 회의장처럼 만들어 놓은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한쪽에 엎드려 있던 투브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너도 참 약았네.
"알아챘어?"
-옆에서 다 봤는데 모르면 이상한 것 아니야? 정말 손에 들어온 것 하나하나 다 비틀어 짜서 이용하는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도 몰라. 현실은 녹록지가 않거든."
나는 이 난세를 기사의 전쟁으로 유도할 셈이었다.
군비경쟁은 지극히 멍청한 부분이 있어서 한쪽이 세를 키우면 다른 한쪽이 뒤질세라 몸집을 배로 불리기 마련이다.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겠지만 전장에서 마주친 적들이 '카몰군에는 유독 기사가 많더라.'라는 느낌만 받아도 적 지휘관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사단의 인원 제한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처음에야 서로 눈치를 본다고 쳐도, 옆의 영주가 기사단을 증원하는데 자기는 가만히 있을 바보는 없다.
곧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사단을 늘리는 것이 전국적인 추세가 될 것이다.
그 경쟁이 극에 달했을 때, 저비스가 추출한 오러를 무력화시키는 물질을 쫙 풀 셈이었다.
이타르, 당신이 만들어 낸 감자가 이 땅에 어떤 싹을 틔우는지 보게 될 겁니다.
***
며칠간의 카몰 체류 이후, 나는 다시 안즈로 와 있었다.
9군단이 합류한 리벤트군의 북진이 매서운 수준이라는 보고 때문이었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내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
나를 내려 주고 작아진 모습으로 툴툴거리는 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게 눈을 너무 믿지 말았어야지. 세상은 모르는 일투성이란다, 요 녀석아.'
-젠장! 내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갓 생성된 정자만도 못 한 녀석에게 조언을 듣는 꼴이라니! 젠장! 제엔자앙!
투브는 분노에 찬 채로 검은늑대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오델리아가 쓰다듬어 주는 게 좋다나.
오델리아 때문에 내기에 지고, 그 고통을 오델리아에게 치유받고.
참 알 수 없는 관계였다.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막사를 열고 들어가니 전장에 나와 있는 참모들, 귀족들, 기사단장들이 나를 맞아 일어섰다.
"앉아, 앉아. 번거로운 건 집어치우자고. 상황 얘기해 봐."
"안즈와 리벤트의 거의 모든 접경지대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카몰로 향하던 병력도 다시 방향을 돌려 안즈로 온다는 첩보입니다."
"안즈로? 왜?"
카몰에 있던 방어 병력 일부가 디시간으로 퍼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카몰의 방비는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발시안만큼 큰 곳은 아니지만 리벤트에도 페크나라는 항구도시가 있으니 나처럼 해양 진출로에 목맬 필요도 없었다.
굳이 안즈를 먼저 점령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이쪽으로 온다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여러 추측이 나왔으나, 아마 리베트군의 목적은 안즈와 카몰 점령이 아니라 산탄다르 진출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즈는 동서로 길고 남북이 짧은 형태의 땅이지 않습니까?"
이해가 확 됐다.
"아아…… 알겠네. 산도 조금 있고 남북 거리가 긴 카몰보다는, 평야가 많고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는 안즈를 통과해서 산탄다르까지 공격하겠다?"
"그렇습니다."
"그 추측이 맞는다면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안즈가 2주도 안 돼서 박살 났다는 걸 듣지 못한 건가?
무시에도 정도가 있는데, 상대의 작전은 우리를 먼지만도 못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수가 얼마나 되기에?"
"추정치 3만 이상입니다."
"전체 인원이?"
"전투 병력만 추산입니다."
"그렇다면 전체 인원은?"
"6만에서 7만 추산입니다."
나도 안즈를 칠 때 4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발시안 앞에서 며칠을 대기해서 끌어모으고 모은 군세였고, 그 안에는 내게 붙은 안즈의 영주들이 보낸 병력도 있었다.
또한, 4만 군세 중 순수한 전투 병력은 2만 내외였다.
9군단과 리벤트 백작은 필사적인 기세로 밀고 올라오려는 것 같았다.
"3함대가 그쪽에 합류해서 현재 발시안 근해에서 발시안을 포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짓거리를 하고 있구먼그래."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3함대의 병력이 합류했다고 해도 6만이 넘는 병력은 일개 백작령에서 동원 가능한 수치가 아니었다.
"수치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너무 현실성이 없는데."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고 확실히 하기는 어려워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많이 잡아도 이 수치에서 1만 이상 빠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1만……. 그래도 5만에서 6만……. 이상해."
보고하던 장교가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리벤트군에 용병부대가 굉장히 많이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용병부대? 리벤트에 그런 돈이 어디 있어. 거기는 세금 내고, 9군단 주둔 비용 부담하면 1년 예산 짜기도 빠듯한 곳일 텐데?"
"아마 남부의 공작 가문 쪽에서 지원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남부에 있는 2개의 공작 가문, 리히트와 에베는 둘 다 1황자 지지를 선언했고, 그 결과 남부는 거의 모든 영주가 1황자파였다.
리벤트는 제국의 동부에 속하긴 했지만 남부와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남부가 혼란해야 내가 위샤인 가문을 치기 쉬울 것인데 똘똘 뭉쳐 있으면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은 자명했다.
이번 전투 후에 그쪽에 이간질을 하든 자객을 보내든, 분열시킬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측 인원은?"
"현재 안즈에서 긴급 충원을 해서 전투 가능 인원은 2만이 조금 넘습니다."
디시간으로 진격한 병력이 있어 카몰의 방비를 위해 내 아래 있던 몇몇 부대들을 카몰로 돌려놓은 상황이었다.
1만 이상의 전력 차이가 있었다.
전선은 길게 늘어져 있고, 발시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전함이 함부로 밖으로 나왔다가는 3함대의 좋은 먹잇감만 될 것이 뻔했다.
안즈 때처럼 기동전을 하자니 상대는 훈련받은 군인인 데다가 계속해서 이동 중인 부대들이었다.
한순간 판단을 잘못 내리면 그대로 부대들에게 포위당할 위험이 있었다.
"적이 집결할 만한 지형은?"
전선을 길게 만들어 올라온다고 해도 지형의 차이와 진격 속도의 차이 때문에 그대로 올라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길이 모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평야 지형이다 보니 많지 않습니다."
장교가 지도에서 몇 군데를 손으로 짚었다.
낮은 언덕들 사이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과 넓은 벌판이 있는 곳이었다.
"리벤트군의 본대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입니다."
"예상 도착 시각은?"
"짧게 잡아 이틀, 길게 잡아 사흘 후입니다."
"그곳에서 회전(會戰)을 치른다. 전방에 있는 부대들을 후퇴시켜 본대로 합류시켜."
"우리 인원이 크게 부족한 상황입니다. 회전을 계획했다가 포위당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장교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규모 회전에서 전략 전술이 통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결국 전장은 난전으로 흐르며, 변수는 여럿 있겠지만 난전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상수는 인원이다.
인원도 부족한데 회전을 벌인다는 말에 충분히 의구심을 품을 만했다.
그러나 현재 카몰군이 전투를 치르고 있는 곳은 너무 많았다.
지금이야 병력을 움직인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아슬아슬하게 유지가 되는 수준이었지만, 더 이상 전선이 늘어지면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전선을 유지하는 건 우리에게 불리해. 결국 하나씩 집어삼켜질 거야. 단기에 승부를 본다. 당장 주위의 영주들에게 전령을 보내. 무기를 들 수 있는 성인이라면 남김없이 보내라고. 그리고……."
내 눈이 모두를 훑었다.
"나는 질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는다. 그대들을 승리로 이끌어 주지."
호언장담에도 분위기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내가 미쳤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내 막사에 카몰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각하, 제뉴인 공께서 각하께 보내신 것입니다."
왔다.
상수를 부숴 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변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