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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81화 (81/180)

비밀 병기 (3)

안즈의 어느 이름 모를 언덕, 나는 내 주위에 펼쳐진 카몰군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제법 전투다운 전투를 했다고 병사들의 눈에 예기가 흘렀다.

여러 곳에서 각 가문의 깃발이 올라 있었다.

-제법 멋있네.

"멋있지……. 멋있는 광경이야."

이 많은 인원이 내 판단 하나에, 손짓 한 번에 살아남을 수도 죽을 수도 있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을 만큼 멋진 광경이었다.

-상대는 더 멋지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지평선으로 옮겼다.

반대편에 도열해 있는 리벤트군이 보였다.

우리가 자신들의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일전을 벌이기 위해 모두 모인 모습이 장관이었다.

"말이라도 우리가 더 낫다고 해야지."

-수가 많으면 일단 유리하다고 한 건 너였어. 유리하면 이길 것이고, 이기는 게 멋있는 거 아니야?

"유리하다고 항상 이기는 건 아닐걸."

-무슨 소리야?

"왜, 선조님과 네 싸움만 봐도 그렇잖아. 선조님을 발밑에 둔 네가 유리했는데 왜 칼에 찔렸을까?"

-야! 그건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어! 네가 고수들의 세계를 알아? 생사를 건 싸움을 아냐고!

투브가 내게 달려들었다.

개의 모습이었기에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몸을 돌리고 손을 내저어서 막다가 결국에는 지쳐 언덕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주위에서는 결전을 앞두고 결의를 다지고 있을 텐데, 나만 여유로운 것 같아 위화감이 들었다.

-질 생각 없구나?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안 보이는 게 있는데 뭔 줄 알아?"

-뭔데?

"지는 방법이 안 보여. 저 앞에 있는 대군을 쓸어버리고 남쪽으로 진군하는 모습만 보이네."

-대체 너희 가문 사람 몸속에 흐르는 피는 어떻게 되어 있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냐?

"선조님도 그러셨어?"

-나를 보자마자 쌍검을 뽑아 들고 '넌 오늘 뒈진다.'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

폭소를 터트리고 있으니 언덕 아래에서 지휘관들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일어나서 표정 관리를 했다.

-놀고 있네, 놀고 있어.

'시끄러.'

나보고 놀고 있다고 말한 투브도 아래에서 사람들이 올라오자 얼른 큰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내 옆에 서서 근엄한 표정을 했다.

나보고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적군의 양측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쪽 마법사들이 실시간으로 관측하고 통신 마법사들이 정보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너무 믿지는 마. 상대방 쪽도 마법사는 있을 테니까 교란용 정보를 뿌리는 것일 수도 있어."

"예, 주의하라 이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적은 수의 우위를 이용해서 우리를 감싸 안는 형태의 진을 취할 모양이었다.

방어하는 측은 여러 방면으로 진입하는 적을 막느라 힘이 분산되고, 공격하는 측은 방어 측을 쥐어짜듯 섬멸할 수 있는 고전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지시를 기다립니다!"

지휘관들이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최대한 좌우를 전개해야 합니다."

발시안과 근처의 치안을 맡느라 전장에 참여하지 못한 71사단장, 빌 파르를 대신해서 전장에 파견되어 나온 4군단 72사단장, 제크 스카스발트였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수는 부족하지만, 저쪽은 많은 수가 용병부대입니다. 정규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고 결속력이 높지 않습니다. 돌진해 오는 용병부대는 4군단 보병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적의 양익은 기동력이 좋은 기사들일 터, 우리도 기사로 맞대응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정확한 분석이군."

내 칭찬에도 제크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이마에 깊게 팬 주름이 그의 성격이 완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모두 내 입만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리로 돌아가 대기하라. 신호가 떨어지면 전군 진격해 적을 일거에 섬멸한다."

"각하!"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확고한 내 지시에 더는 항의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지휘관들이 언덕 아래로 흩어졌다.

옆에 있던 로하나스에게 말했다.

"내 천막에 가면 낡은 빗자루가 하나 있어. 가지고 와."

"빗자루 말씀입니까?"

"그래. 그게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줄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로하나스는 달려가서 빗자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빗자루를 받아 든 내가 투브의 등에 올랐다.

"가지."

말에 탄 로하나스가 내 옆으로 붙었다.

투브가 병사들 사이에 난 길을 걷자 병사들이 긴장하면서도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투브의 초월적인 전투 능력을 목격한 카몰군 사이에서 투브는 거의 전장의 신 대우를 받았다.

송곳니 기사단과 검은늑대 기사단에 이어 투브를 찬양하는 곳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교주라도 될 기세였다.

-흑랑교단 좋네! 흑랑교단!

"사정청에 평생 쫓기고 싶지 않거든, 닥쳐."

그렇지 않아도 모의 전투 당시부터 투브를 마법 조작 생물로 의심하는 시선들이 있었다고 했다.

내 아버지가 공작이 아니고 지금이 평시였다면, 어디론가 끌려가서 연구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작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사정청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겸 천천히 진형의 맨 앞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하나스가 내게 물었다.

"각하, 많이 힘드십니까?"

"응? 힘드냐고? 요즘처럼 기운 넘쳤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헌데 왜 그리 술을 찾으십니까. 전장에서 술은 좋을 것이 없습니다. 판단을 흐리게 하고 육신을 둔하게 하는 것이 술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매일 밤 한 동이씩……."

피식 웃었다.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나는 밤마다 내 천막으로 술을 한 항아리씩 가져오라고 말해 놓은 상태였고, 그 명령은 성실히 지켜졌다.

"그거 내가 마신 거 아니야."

"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하나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 있어라. 뜨거울 거다."

로하나스가 멈춰 서서 물었다.

"다시 마법을 쓰시는 겁니까? 상대도 그 정도 방비는 되어 있을 겁니다!"

빗자루를 머리 위로 들었다.

"내가 아니라 이 친구가!"

전열의 가장 앞에까지 나아갔음에도 투브는 계속 나아갔다.

내 옆의 병사들이 움찔거리며 나를 따라나서려고 했으나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앞으로 조금 더 나서자 멀리 작게만 보였던 적군이 크게 다가왔다.

고개를 뒤로 돌려 병사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했다.

적군도 양옆으로 날개를 펼치고는 있으나 아직 본대가 움직인 것은 아니라서 거리는 여유가 있었다.

빗자루를 땅에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이야깃거리로 부족함은 없겠죠? 그동안 드신 술값은 넣어 두겠습니다."

땅에 닿은 빗자루는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펑!

작은 폭음과 함께 빗자루의 모습이 맨발의 거구로 변했다.

발에 털이 숭숭 난 모습과 어깨에 방망이를 걸쳐 놓은 모습이, 동화에서 말하던 도깨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많기두 많네유."

벼랑구른돌이 적진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그리고 순박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한 500년 이야깃거리는 되겄네유."

"도깨비는 피를 보고 그러면 미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가 있던데요."

"그런 부족도 있었다고 하든디, 지금은 모르겄어유. 우리는 묻지만 않으면 괜찮어유."

도깨비가 내가 준비한 비밀 병기였다.

아버지께 도깨비들이 살고 있는 산을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내가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말하고 도움을 구하셨다고 한다.

도깨비는 드워프처럼 은원을 철저히 따지는 종족은 아니지만, 정에 끌리는 종족이다.

내가 자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 도깨비들은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을 파견하기로 했다.

거대한 원래의 모습으로 이동할 수는 없으니 둘 다 물건으로 변해 벼랑구른돌은 내가 있는 곳으로, 이끼위의물은 발시안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이끼위의물 그놈은 물이 가득한 곳으로 갔담서유? 바다렸나? 지가 글로 갈 겄을 그랬어유. 그런 걸 보면 1,000년 내내 우려먹어두 재밌을 것 같은디."

앞뒤로 사람들이 가득한데도 벼랑구른돌은 하나도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가 바다를 봐야 했다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그쪽으로 보내 드릴게요."

"정말유? 약속한 거여유?"

"제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하긴 은인을 의심해서는 안 되겄쥬. 그럼 시작할게유. 투브 님은 쬐금 피해 계셔유, 후끈할 거여유."

강아지 모습의 투브가 쫄래쫄래 내 뒤로 와 숨었다.

투브가 몸을 숨기는 것을 본 벼랑구른돌이 웃더니 방망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헛차!"

그가 크게 기합을 내지르자 방망이 끝에 커다란 불덩이가 맺혔다.

주위 마나가 급격하게 방망이로 모이고 있었다.

"흐엿차! 으렷차차차!"

벼랑구른돌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용을 쓴 결과, 방망이에 작은 해라고 해도 될 만큼 이글이글 타오르는 큰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옆에 내가 있어서 마법이 제대로 시전되지 않을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었다.

"잠시만 들어 주세유."

손이 데지 않게 왼손에 불을 만들어 방망이에 있는 불을 얹었다.

마나와 오러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얼굴까지 후끈했다.

도깨비의 가호를 받아 아라크네의 불에도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더위를 느낄 정도라면 엄청난 온도일 것이 분명했다.

타닥! 타닥!

주위의 풀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우앗!

내 뒤에 숨어 있던 투브가 다가오는 불을 발로 여러 번 밟았다.

"하나, 둘, 셋 하면 바로 위로 던지시고 뒤로 빠지셔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가는 입안의 침도 말라 버릴 열기였다.

"하나!"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크기의 불덩이를 보고 빠르게 진격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쪽으로 화살과 마법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사정거리 바깥이라 우리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화살이 떨어진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둘!"

뒤를 돌아보니 카몰군 맨 앞에 선 병사의 얼굴이 보였다.

이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다행히도 카몰군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신호가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리는 내 명령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그동안 군율을 엄격하게 잡은 보람이 있었다.

"셋!"

거대한 불덩어리를 높이 던졌다.

내 뒤에 있던 투브를 품에 안고 뒤로 마구 달렸다.

-뜨거워! 이 새끼야! 갑옷 달궈져서 뜨거워! 야!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린 덕에 몇 걸음 가지 않아 불이 타들어 간 곳 바깥에 닿을 수 있었다.

투브는 내려 주자마자 땅에 대고 마구 뒹굴어 열을 식혔다.

불덩어리가 공중에서 정지해 있다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어깨보다 좀 넓게 벌리고 양손으로 잡은 방망이를 뒤쪽 어깨에 걸쳐 놓은 벼랑구른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불덩어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덩어리가 그의 시선 근처까지 떨어진 순간, 그의 방망이가 거침없이 불덩어리를 때렸다.

쿠와아아아앙!

방망이에 타격당한 불덩어리에서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다.

수십,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진 불덩어리가 적진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불방망이 맛 좀 보셔유! 푸하하하하!"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벼랑구른돌이 외쳤다.

"어이쿠야! 푸하하하하!"

이내 그도 힘을 많이 썼는지 주저앉았지만 호탕한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갈라진 불덩이가 적진을 헤집기 직전 내가 외쳤다.

"투브! 나를 태워!"

투브가 바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위에 오른 내가 검을 뽑아 들고 오러를 싣고서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전군! 진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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