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병기 (4)
-이런 능력을 장난치는 데 사용하느라 맥이 끊길 위기였다니, 참 멍청한 종족이야.
투브가 나를 태운 채로 적진이었던 곳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종족의 맥이 아니라 세계 정복을 고민해 봐야 할 수준인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던 나도 맞장구를 쳤다.
곳곳에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땅이 움푹 패어 있고, 그곳에는 새카맣게 변해 버린 갑옷과 뼈가 뭉쳐 있었다.
그런 구덩이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개였고, 고개를 들어 좀 멀리 보면 평원 곳곳에 수백 수천의 구덩이가 검은 그을음과 재를 품고 있었다.
"크아! 힘쓰고 먹는 술이라 그른가? 맛이 환장 나게 좋네유."
투브 옆에서 같이 걷던 벼랑구른돌이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술이 번들거렸고, 손에는 술병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저런 모습으로 노인네처럼 술 마시니까 이상한데.
벼랑구른돌은 평소의 건장하고 탄탄한 체격이 아니라 열 살 정도 되었을까 하는 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한 번에 많은 마나를 끌어들여 마법으로 바꾸면 저렇게 작아진단다.
알면 알수록 미지의 종족이었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하는 거죠?"
"걱정 마셔유. 시간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게."
"얼마나 걸리는데요?"
"한 200년 걸릴려나 모르겄네유. 그려두 이 정도면 양호허쥬. 더 작아졌으면 고대로 승천할 뻔했는디, 푸하하하하! 지가 아부지보다 먼저 승천했으면 아주 볼만했을 것인디 고건 고거대로 아까워유, 푸하하하!"
그렇게 폭소를 내뱉던 벼랑구른돌이 몇 걸음 비틀대며 걷다가 풀썩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지럼증이 왔는지 상체를 빙빙 돌렸다.
"으에? 뭐여? 이 정도 술은 거뜬헌디? 작아져서 그른가? 무쟈게 취하네유."
-가관이다, 가관이야. 뭐 이딴 놈들이 다 있냐? 볼수록 황당하네.
투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는 벼랑구른돌이 풀린 눈으로 나를 보고는 말했다.
"말이음이 님, 저 취해서 안 되겄어유. 쬐끔 자다 일어나야겄네유, 어이쿠야!"
그러곤 땅에 대자로 뻗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들어 투브의 등에 실으려 했으나 쉽게 그를 땅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하는 것도 모자라 오러까지 쓴 다음에야 그를 간신히 들어 업을 수 있었다.
거대한 바위를 등에 얹어 놓아도 이것보다는 가벼울 것 같았다.
'이런 몸이랑 씨름해서 이겼다고? 선조님은 뭐 하는 사람이야! 으아아!'
비척비척하며 투브 쪽으로 다가가자 투브가 몸을 훌쩍 피했다.
-그거 올려놓을 생각 하지 마. 허리 나간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몰라. 네가 처리해.
내가 애를 쓰고 있자 전장 정리를 하고 있던 로하나스가 바로 달려왔다.
"각하, 제가 들겠습니다."
"야, 조심해라. 엄청 무겁다."
등에 업고 있던 벼랑구른돌을 로하나스 쪽으로 넘겨주자마자 로하나스는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무슨 몸이 이렇게……!"
"무겁다고 했잖아."
로하나스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벼랑구른돌을 떼어 내 주었다.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벼랑구른돌은 잠에서 깨지 않고 침까지 흘리고 있었다.
정도를 넘어선 낙천성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척.
갑옷으로 감싸인 손이 뻗어 나와 벼랑구른돌의 뒷덜미를 잡았다.
"어디에 두면 되겠습니까?"
오델리아였다.
"어…… 내 막사에."
오델리아가 일어나 주위를 살피더니 지어지고 있는 내 막사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뒷덜미를 잡힌 채로 벼랑구른돌은 질질 끌려갔다.
그는 잠깐 깨나 싶더니 손에 쥐고 있던 방망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다시 잠들었다.
나와 로하나스, 투브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널브러져 있던 로하나스가 벌떡 일어섰다.
"오델리아! 제가 데려다 놓겠습니다."
그러나 오델리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벼랑구른돌을 끌고 앞으로 가 버렸다.
-재밌네. 아주 재밌어.
***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다고?"
"불덩이 하나가 적군 수뇌부를 직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리벤트 백작, 9군단 사령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른 건?"
"적군 절반 이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고 있습니다. 이미 추격대를 편성해서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쿵!
"와아아아!"
천막 밖에서 무언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성이 동시에 들렸다.
내게 보고하고 있던 제크 스카스발트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가 사라졌다.
"게다가 발시안을 포위하고 있던 3함대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고."
발시안에 있던 이끼위의물이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이쪽으로 와 있는 상태였다.
자기 입으로 자랑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이끼위의물이 신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밤새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쿵!
"와아아아!"
다시 한번 들려오는 소리에 이번에는 제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참아. 이겼잖아. 흥이 넘칠 시기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라고 자네가 생각하는 걸 왜 모르겠나. 그런데 우리는 더 멀리 내다봐도, 병사들은 그냥 하루하루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하는 거야. 조금 있으면 시들해질 테니 내비 둬."
제크가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우……. 리벤트군이 머리를 잃은 지금이 진격할 적기입니다. 리벤트는 제국의 동부와 남부를 잇는 관문, 리벤트를 점령하면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반역자라……."
2황자가 황제에 즉위한 지 몇 달, 불타는 황궁을 빠져나간 1황자는 노체, 에베, 리히트, 루지온 네 공작 가문과 몇 개 군단의 지지를 얻어 자신이 제국의 정통임을 선언한 상태였다.
분열 초기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몇몇 사령관들이 자신의 무력만 믿고 제국에서의 독립을 선언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이 좌 상단에서 우 하단으로 빗금을 그은 것처럼 북부와 동부는 현 황제에게, 남부와 서부는 1황자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판도가 확정되자 각 수장들이 가장 먼저 지시내린 일이 자신의 지역 내에 독립을 선언한 부대를 말살하라는 것이었고, 제국군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있던 사령관들의 부대는 손쉽게 항복하고 왕을 꿈꿨던 군인들은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었다.
1황자의 정통 선언에 황제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황위에 오른 뒤 얄츠 이나타 황실 시종장이 전 황제의 유언이 2황자를 황제로 만들라는 것이었음을 밝혔고, 제국의 중심인 수도를 버리고 간 자인데 정통을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이유였다.
그러나 표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황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1황자 세력을 분쇄시키라는 칙서를 내려보내고 있었다.
황제파에 붙은 공작 가문은 제뉴인, 산탄다르, 그랑베르트 셋.
1황자에게 붙은 공작 가문보다 하나가 적을뿐더러, 제국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었다고 했을 때 가장 인구가 많은 쪽은 1황자 지지를 선언한 남부 지역이었다.
황제에 올랐지만 전력의 약세는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북부는 완전히 황제에게 복속한 것이 아니라서 심심하면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산탄다르 공작이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나 쉽지 않아 보였다.
산탄다르보다는 조금 서쪽에 있지만 경계상 중앙과 북부에 있는 제뉴인에서 도움을 주면 금방 처리될 문제였지만, 제뉴인도 상황이 쉽지가 않은 것이 1황자파의 공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랑베르트 공작령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력을 그랑베르트를 지원하기 위해 보내 놓은 상태였다.
그나마 남부가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도시민들의 봉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일치단결하지 못해서 다행이지, 공작령이 2개나 있는 남부가 일찌감치 단합해서 우리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면 내가 그랑베르트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리벤트는 가지기는 쉽지만 방어하기는 어려운 땅일 텐데……."
내 혼잣말에 제크가 놀라서 물었다.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 들었어."
이전 생에 가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리벤트의 고지 하나를 두고 스무 번 넘게 뺏고 빼앗기고를 반복한 기억이 있었다.
결국 점령하고 남부를 휩쓰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에는 마음고생이 심해 밥도 잘 못 먹었었다.
"리벤트는 안즈보다 더 평탄한 곳이 많습니다. 남부로 갈수록 그런 지형이 많아질 겁니다. 평탄하다는 것은 자연히 전선이 길어진다는 뜻이고 전투가 벌어질 곳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소리입니다."
다른 사단장인 빌이 현장의 지휘에 능하다면 제크는 고지식한 면은 있어도 상황을 단순화시켜 일목요연하게 내려다볼 줄 알았다.
명장 아래에는 또 다른 명장이 모인다더니 페제 베이카 장군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론은?"
"리벤트에서 인원을 최대한 징발한 후, 계속 남쪽으로 몰아쳐야 합니다. 멈추면 바로 공격받게 될 것입니다."
"흠……."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계속 내려갈 것인지, 아니면 적의 공세가 거센 북부 전장으로 지원을 할 것인지?"
"그렇습니다. 계속 내려가실 마음이라면 기세를 탄 지금 몰아쳐야 하고, 지원을 가실 마음이라면 리벤트에서 인원과 물자만 징발한 후에 안즈를 경계선 삼는 것이 최선의 판단 같습니다."
1황자파의 집중 공세를 받고 있는 그랑베르트는 제뉴인과는 크루슈 산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다.
수도에서도 카몰보다는 그랑베르트가 가까운 위치에 있기도 했으니 유사시에 지원을 받기도 쉬울 터였다.
내 지원이 없어도 그랑베르트나 제뉴인이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샤인이 남쪽에 있는데 물러나기는 싫었다.
발가락에 물만 묻혀 보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북부 전선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우리는 계속 남하한다. 전투가 고되었으니 이틀간 휴식하고 전력으로 이동할 준비 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쿵!
"오오오오!"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함성이 들렸다.
제크의 관자놀이가 불뚝 솟았다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만 그냥 둬, 하루만."
이를 악문 제크가 답했다.
"을긋습느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함성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겹겹이 원을 만든 병사들이 내가 다가가는 것을 알아채고 길을 열어 주었다.
원 안에는 맨발의 아이 2명이 끙끙대며 용을 쓰면서 서로를 흙바닥에 처박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3함대의 전함을 모조리 불 질러 버렸다는 이끼위의물과 벼랑구른돌이었다.
칼이 내가 온 것을 알아채고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도깨비는 씨름을 좋아한다더니 거짓이 아니었나 봅니다. 몇십 판째 서로 겨루고 있습니다."
"술 먹다가 저러죠?"
"예, 바다를 봤냐느니, 배라는 것에 불을 붙여 봤냐느니 하다가 서로 저렇게 뒹굴고 있습니다."
이끼위의물도 많은 마법을 쓴지라 벼랑구른돌처럼 아이의 모습이 되어 버려서 둘의 씨름은 마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둘의 표정과 병사들의 열기는 전혀 장난이 아니었다.
"엇차!"
이끼위의물이 벼랑구른돌의 안쪽 다리를 걸었다.
벼랑구른돌은 다리가 걸려 들어가기 전 노련하게 다리를 들어 피했다.
"아!"
병사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의 탄식이 터졌다.
"히그으악!"
벼랑구른돌이 괴성을 지르며 이끼위의물의 몸을 들어 올렸다.
"오! 오! 오!"
이끼위의물의 몸이 들썩거리며 들어 올려지자 이곳은 흥분의 도가니탕이 되었다.
"가자! 꼬맹이! 넘겨!"
"버텨! 버텨! 1주일 치 봉급 걸었어! 버텨!"
"멋지게 보여 줘!"
병사들의 고함에 기운이라도 얻은 것인지 벼랑구른돌이 그대로 이끼위의물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둘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에게서 환희와 절망의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나 이기려면 500년은 일러, 이놈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벼랑구른돌이 포효했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끼위의물도 벌떡 일어나 지지 않고 외쳤다.
"뭐여? 전적 말혀 봐? 5,691승 5,688패로 내가 우위여! 그려, 안 그려?"
"200년 먼저 난 놈이 세 번 더 이겨서 좋겄슈? 으이?"
"다시 혀! 다시!"
이끼위의물이 득달같이 벼랑구른돌의 허리춤을 붙잡았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폭소가 터졌다.
그러고는 병사와 기사, 마법사 할 것 없이 자기들끼리도 몇 명씩 모여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쉬어라! 앞으로 또 한참 힘들 테니! 다들 술 한 잔씩은 허용이다!"
내 명령에 모두가 환호성을 높게 질렀다.
오랜만에 맞은 휴식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여유를 즐기던 그날 밤,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법에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