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1)
"어떻게 된 거야?"
간밤에 소집된 참모들에게 물었다.
"정찰대가 나간 상태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답을 들고 돌아올 겁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마법사들이 화들짝 놀랄 만큼 엄청난 마력 반응이었기에 마법사와 기사로 조직된 정찰대가 해당 방향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혹시나 적습일 수도 있으므로 전 병력에 비상이 걸려 있었다.
-네가 직접 가는 게 낫지 않았겠냐?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
카몰군의 단단한 결속은 나 하나 때문에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와 투브가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적을 참살하는 모습, 이전 생의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고 그것을 통해 카몰군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참모들은 내가 전장에 있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령관은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조율하는 존재이지, 앞에 나가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도 그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기마대를 끌고 성 앞에까지 나아가고, 상륙을 막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직접 적의 성벽을 거슬러 오르는 사령관이라니.
내가 그런 사령관 아래 있었다면 며칠 못 가서 위액을 토해 내며 죽었을 것이다.
나는 확신이 있어 행한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달려 나가려는 내 발걸음을 참모들이 필사적으로 막은 상태였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몸이 달달 떨렸다.
전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왔습니다!"
기사 몇이 관복을 입은 남자 하나와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을 데려왔다.
황실에 있어야 할 붉은방패 기사단의 갑옷이었다.
기사 하나가 내게 말했다.
"부쩍 자주 뵙습니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내게 말을 거는 기사는 팔크 발터.
붉은방패 기사단이자 나와는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그러나 팔크의 밝은 얼굴과는 달리 내 시선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관복을 입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수도에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내 말에 팔크가 바로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주위를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의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
주위를 물린 후, 팔크에게 말했다.
"급한 일인가 보죠, 전이 마법사까지 대동할 정도면?"
"아셨습니까? 마법을 쓰신다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저만 느낀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희귀한 특수 마법 중에서도 전이 마법사는 더욱 희귀한 존재다.
제국 군부의 특별 관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정체도 몇 겹으로 위장되어, 전이 마법사의 신상을 알고 있는 것은 제국을 다 뒤져도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대장군이었던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정보는 많지 않았고, 당연히 핵심 전력인 전이 마법사들의 신상도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들어 관리를 바라봤다.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 있었음에도 크게 떨지 않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테인트 랑에.
생명을 담보로 한 수십 번의 전이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남자다.
물론 아마도 이번에는 지금 사용한 것이 처음이겠지.
"극비인 전이 마법사의 신상이 밝혀지는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뭔가요?"
장난기 넘치던 팔크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사힘 변경백이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거칠게 소리쳤다.
북부에는 북부의 태산 페익스 이나타 히베아 변경백이 있다면, 서쪽에는 서부의 폭풍 하마렐리온 드와이트 사힘 변경백이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초원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제국 서부에서 수백 년 동안 이민족들의 침공을 막아 온 드와이트 가문의 가주로, 이전 생에서는 이민족뿐만 아니라 제국에 반기를 든 자들을 수도 없이 도륙한 구국의 영웅 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그와 어깨를 맞대고 같은 전장에 있던 적도 있었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제국에 대한 충성은 히베아 변경백에 뒤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느꼈건만, 어째서?
너무도 달라진 현실에 충격을 받은 사이 팔크가 냉정하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첩보에 의하면 현재 이민족들을 끌어들인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직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했다.
사힘은 제국의 가장 서쪽에 있는 지역, 1황자 지지 세력의 영지를 통과하지 않고는 수도로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제국 서부는 지금 죄다 1황자 지지를 선언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사힘 변경백이 수도로 직행하고 있다는 거죠?"
"사힘 변경백이 왕을 칭한 뒤 근처의 1황자파 귀족들이 군사를 일으켜 사힘 정벌을 시도했으나, 변경백의 군대가 너무 강력해 연전연패했다고 합니다."
"크흠……."
남녀노소 모두가 평화의 시기라고 입을 모으던 때에도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공을 방어해야 했던 사힘군이다.
역시나 북부 야만인들과 괴물들의 남하를 막고 있는 히베아군 정도를 데려다 놓지 않는 이상 경험치와 전투력 면에서 사힘군과 비등하다고 할 수 있는 부대는 제국에 없다고 해도 좋았다.
"이민족은 어떻게 끌어들인 거라던가요? 앙금이 보통이 아닐 텐데요."
"그 부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민족들은 항상 제국의 비옥한 땅을 노려 왔으니 그들에게 땅을 떼 주기로 하고 일시적인 제휴라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힘 변경백의 주력군은 사힘에 남아 있는 상태지만 이민족이 주력이 된 부대가 빠르게 수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진로에 있는 마을과 성은 남김없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내 눈과 팔크의 눈이 마주쳤다.
"수도방위병단만으로는 그들을 막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하셨습니다. 부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이민족을 막으라는 명입니다."
뿌득!
이가 갈렸다.
남부는 인구도 많고 생산량도 많아 만만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도시민들의 봉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서로 간의 결속이 덜 되었을 때 쳐야 했다.
스와라 위샤인은 나와 비슷한 나이이기 때문에 아직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녀는 이런 혼란한 시기에 더욱 빛을 보는 여자였다.
아직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기 전에 죽여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한데 남부 정벌을 눈앞에 두고 회군령이 내려왔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배회했다.
'황제는 내게 명령하지만, 실질적으로 나를 제한할 힘은 없다고 봐도 좋다. 그냥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이민족과 사힘군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다. 만일 수도가 점령당하고 황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내가 만들어 놓은 판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황제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내가 애써 만들어 놓은 복수의 판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가 생긴다.
달라진 현실에 적응해 가며 몇 년간 준비해 왔는데 너무 큰 변수가 출현해 버렸다.
"저 말고 누구에게 전령이 갔나요?"
"그랑베르트 공작 각하와 제뉴인 공작 각하는 현재 1황자파의 공세를 막느라 병력의 여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각하와 산탄다르 공작 각하, 히베아 변경백 각하까지 세 분에게만 전이 마법사가 보내진 상태입니다."
"수도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건 저겠군요."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남부로 진격하면 스와라 위샤인은 죽일 수 있어도 이후의 향방을 예측하기 힘들어진다. 내가 가졌던 '제국을 수호한다.'라는 명분을 모두 잃는 것은 덤이었다.
수도를 지키러 가면 다시 남부로 진격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걸릴 테고, 그사이 남부는 더 공고히 결속할 터였다.
위샤인 가문이 부상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힘 변경백의 쭉 째진 눈매가 생각났다.
젠장맞을 인간, 대체 왜 이런 시기에 일을 다 꼬아 놓냐는 말이다.
왕이라니, 왕이라니! 공작에게도 없는 징집 권한을 가지고 있는 변경백은 이미 자신의 영지에서 왕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민족을 제국 안으로 끌어들이면서까지 왕이 돼야 했었나.
이 난세에 왕이라는 이름이 그리도 탐이 났을까.
그가 원망스러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내려가면 남은 3명의 원수 중 1명을 죽일 수 있는데 돌아가야 한다니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쾅!
주먹으로 내리친 책상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밖으로 나서니 모두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간다. 방어선을 안즈까지 물린 후, 경계에 주둔하는 부대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들은 전력으로 수도를 향한다. 이민족으로부터 수도와 황실, 황제 폐하를 지킨다."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이민족을 막으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남부의 단합, 위샤인 가문의 부상 등은 확실치 않은 사실이지만, 이민족을 막지 않고 계속 남부를 정벌했을 때 수도가 함락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전투에서는 과감할지 몰라도 계획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내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재빠르게 돌아갈 준비가 시작되었다.
투브가 옆으로 와서 물었다.
-복수가 우선 아니었어? 의외야. 당연히 황제 정도는 무시하고 내려갈 줄 알았더니?
"황제가 있음으로 해서 이런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거야. 나도 황제를 이용하고, 황제도 나를 이용하는 셈이지. 그런데 그의 신변이 위험해지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너무 제한돼. 스와라는 죽일 수 있어도 이후의 상황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
-큰 그림을 보고 있군그래. 너무 크게 그리다가 밖으로 벗어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나도 속 쓰려 죽겠으니까."
문득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팔크를 불러 물었다.
"사힘 변경백은 자신의 영지에 있다면서요. 지금 이민족 군대를 이끄는 건 누구죠?"
"엄연히 말하면 사힘의 병력이 섞여 있으니 이민족 군대는 아닙니다만……. 사힘 변경백의 첫째 아들인 리오스 드와이트 남작이 사힘군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리오스 드와이트.
내 기억에는 아버지만큼의 역량을 발휘했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다른 지역의 영주였다면 훌륭했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빛을 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민족의 구성은 어떻게 되죠? 사힘과 타닌스크 왕국 사이에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잖아요. 그중 사힘과 손을 잡은 부족이 어느 부족인지 알아야 해요."
"그런 것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민족은 다 비슷비슷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혀.
제국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제국의 경계 밖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북부의 야만인들도 그렇고 서부의 이민족, 더 너머의 왕국들 역시 각자의 저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모두 체험해 본 사람은 지금 시대에는 나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민족들도 그냥 뭉뚱그려 이민족이라는 표현으로 부르지만, 그 안에 풍습과 생김새가 다른 수십의 부족이 있었다.
사힘 변경백이 제국 내부로 끌어들인 이민족이 내가 생각하는 그 부족이 아니기를 바랐다.
이전 생에서 나는 많은 적을 고꾸라트렸지만, 진정한 의미의 호적수라고 생각한 인물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사힘 지역의 이민족에 있었다.
더럽게 얽혀 버린 운명의 굴레가 과연 이번에도 나와 그를 같은 전장에 세울 것인가.
과연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한창때의 모습으로?
스와라를 당장 죽일 수 없게 되었다는 찝찝한 기분이 조금 해소되었다.
심장이 뛰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별이 하늘을 가득 수놓고 있었다.
내가 그를 죽이던 날, 이민족의 마법사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내가 저주받을 것이라 했다.
별을 한 번 더 땅으로 끌어내리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