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2)
솨아아!
싱그러운 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갔다.
숲의 초입, 이질적인 차림새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바람에 몸을 내맡겼다.
그가 손을 올려 긴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어 내렸다.
그러자 허리춤까지 오는 남자의 긴 머리가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꼈다.
이윽고 바람이 가라앉자 그의 머리카락도 제자리를 찾았다.
철컥.
남자가 허리띠에 고정되어 있던 곡도(曲刀)를 풀어 그대로 놓았다.
제국의 양식과 다르게 생긴 검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풀과 이끼 위에 안착했다.
철컥. 철컥.
남자는 천천히 종아리를 보호하는 각반과 신발까지 벗었다.
닳고 닳아서 윤이 반질반질하게 나는 무구들이었다.
왼쪽 각반에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친 것 같은 깊은 흠이 패어 있기도 했다.
남자의 삶이 생사를 넘나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맨발이 된 남자가 발가락을 움직여 발아래 습기를 머금은 촉촉한 흙의 감촉을 만끽했다.
제국의 서쪽 경계 바깥, 그의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촉이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로 몇 걸음을 걷던 그가 한쪽 무릎을 낮춰 쭈그려 앉았다.
그의 눈앞에 노란색 작은 꽃과 그 꽃을 타고 오르려 애쓰는 무당벌레 하나가 있었다.
손을 뻗어 무당벌레의 앞에 대자 무당벌레는 아무 의심 없이 남자의 손가락을 타고 올랐다.
이윽고 손가락 끝에 도달한 무당벌레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는 듯 작게 뒷걸음질하더니 곧 겉날개를 들어 갈색 속 날개를 뻗었다.
그러곤.
부웅.
숲 안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남자는 그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무당벌레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던 남자가 손을 내려 자신 앞에 있는 흙을 조금 퍼 올려 코 앞에 가져다 댔다.
흙에서는 생명의 냄새가 났다.
남자가 온 곳의 흙은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곳의 흙에서는 위에 있는 것을 말려 죽이기 위한 죽음의 냄새가 났다.
으적.
냄새를 맡던 흙을 입안에 넣고 남자가 거침없이 맛을 음미했다.
흙이 이내 침과 엉겨 붙어 덩어리지기 시작했다.
텁텁한 맛 안쪽에 왠지 모를 단맛이 난다고 남자는 느꼈다.
"이것이 제국인가."
그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한참 아버지들을 거슬러 오르면 남자의 핏줄은 이 생명의 땅에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세력을 이끌고 내려온 무신(武神)에 의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꾸만 밀려나 지금 살고 있는, 1년에 몇 번 비가 오지도 않는 땅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나라드마, 우리는 우리의 땅이었던 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를 밀어 낸 놈들을 죽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야 한다. 명심해라, 나라드마. 선조들이 살던 땅…….
제국군의 화살에 맞은 상처가 도져 죽게 된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나라드마는 궁금했다.
왜 어른들은 희생을 감내하며 저 제국의 안쪽을 그토록 갈망하는가.
왜 어른들은 우리를 강하고 잔혹한 전사로 키우려 했는가.
왜 어른들은 끊임없이 고향으로의 회귀를 부르짖었는가.
나라드마의 입 끝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배에서부터 올라왔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이런 흙과 물이라면 짐승은 저절로 살이 두둑이 오를 것이며, 곡식은 뿌려만 놔도 스스로 자라 낟알을 머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땅이 세상에 있었다니, 나라드마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아니, 오히려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 이야기가 흐리게 전해져 축소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뒤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자신을 찾으러 온 부하들일 터였다.
나라드마는 각반과 신발을 신고 풀리지 않게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긴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질끈 묶었다.
그의 부족에서는 전투에서 패하면 머리칼을 자르는 풍습이 있었다.
나라드마는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큰 자랑이었다.
나라드마가 허리춤에 칼까지 찼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족장! 족장!"
까까머리를 한 남자가 나라드마를 찾았다.
남자의 이름은 하우칼.
나라드마와 같은 모래 전갈 부족의 족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드마와 같이 자랐지만 그는 한 번도 나라드마를 이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도 않고 나라드마에게 도전했고, 그 결과 항상 머리가 밀린 채였다.
원래 모래 전갈 부족의 족장이었던 나라드마가 사막과 평원의 부족들을 통합해 대족장의 자리에 앉고, 하우칼 자신이 모래 전갈 부족 족장의 자리에 앉은 뒤에야 도전이 끊겼다.
대족장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족장이라니까, 언제까지 족장이야? 그렇게 부르는 건 너밖에 없어."
나라드마가 꾸중했지만 하우칼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출발한다고 내려오래."
"드와이트 아들놈이?"
하우칼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본인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볼만하겠는데? 그 째진 눈이 더 치켜 올라갈 거 아니야, 크크크크."
"원래부터 째진 눈 좀 더 올라간다고 뭐 달라질 것 있나? 그리고 그렇게 말해도 놈은 나한테 아무것도 못 해. 우두머리는 그놈이지만 실질적인 힘은 내게 있으니까."
나라드마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전체의 7할 이상이 이민족 군대였고, 사힘에 있던 변경백의 군대와 제국군은 3할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수도까지의 길잡이일 뿐이었다.
"그럼 그냥 죽여 버리고 우리끼리 움직이지 그래?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게 아주 꼴 보기 싫어 죽겠어. 너보다 더 꼴 보기 싫은 놈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나라드마가 하우칼을 무섭게 노려봤다.
"내 명령 없이 그에게 손대지 마. 변경백의 아들이다. 쓸모가 있을 거야. 명심해, 하우칼!"
"네가 그렇게 그놈을 싸고도니까 너와 그놈이 애인 사이라는 소문이 돌잖아!"
"그런 소리 하는 놈 있으면 데리고 와. 다리 사이에 있는 걸 직접 잘라 주겠어."
이미 부인이 3명에 자식이 5명이나 있는 나라드마였기에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하우칼이 킬킬거리다 나라드마에게 물었다.
"꼭 수도까지 올라가야 해?"
"무슨 소리야. 지금 와서 그런 소리를 왜 해."
"이곳만 해도 우리가 살던 곳에 비하면 천국이야. 게다가 지금 제국은 황자 둘이 서로 황제라고 주장하면서 싸우는 상태야. 너도 알고 있잖아. 제국이 이렇게 약했던 적은 없어. 이대로 수도로 향할 것이 아니라 제국 남부로 향해서 그곳을 점령하자. 제국 남부는 인구가 많다고 들었어, 그곳을 점령해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면 대대손손 영화를 누릴 수 있어. 나라드마 너는 전설이 될 거야."
스릉.
나라드마의 곡도가 뽑혀 나왔다.
곡도는 하우칼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어디의 누구지? 버섯 바위? 분노 강? 여섯 다리? 샤먼들인가?"
하우칼이 손을 들어 곡도를 옆으로 밀어 냈다.
그의 눈빛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수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데! 피와 같은 형제들이 죽을 것이 분명한데 수도로 가는 이유는 뭐냐고!"
나라드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수도를 무너트리면 제국의 땅을 나누어 주겠다는 드와이트 놈의 말을 믿는 거야? 그에게 의존할 필요 없잖아! 그가 길을 열어 주고 우리가 제국 안쪽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린 자유야! 그런 놈의 도움 없이도 우리 힘으로 제국을 유린하고 땅을 가질 수 있다고! 네가 집착하는 수도에 가지 않아도! 다른 부족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대족장이 드와이트의 가신이 되기로 한 게 아니냐?' 이런 소리가 돌아! 왜 드와이트 놈들을 돕는 거야!"
나라드마의 곡도가 제자리를 찾았다.
"못 들은 걸로 하겠어. 내려가지."
하우칼을 뒤에 두고 내려오면서 나라드마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죽어 가는 도중에도 아버지는 나라드마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것을 가지고 제국의 수도로 가라. 그곳에 우리 일족이 남겨 놓은 비밀이 있다.
숨을 거둔 아버지의 손에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찬란한 귀걸이가 있었다.
지금 나라드마의 왼쪽 귀에서 빛을 내는 귀걸이였다.
'제국을 꺾고 비밀을 손에 넣기 위한 첫걸음이다.'
나라드마가 주먹을 꾹 쥐었다.
'우리는 수도로 간다.'
***
"폐하의 명을 받들기 위해 왔나이다."
관복을 입은 내가 황제 앞에 나서며 말했다.
"그대의 활약은 들었네, 카몰 백. 이리 부르게 되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아닙니다. 신하 된 자로 어찌 주군의 위험을 모른 체하겠습니까. 말씀만 하소서. 제국의 적을 멸하겠나이다."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것을 참고 답했다.
이미 오면서 수도방위병단의 카멜 할 장군을 만나고 온 상태였다.
목숨을 바쳐 가며 수도를 지키겠다고 해야지,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내가 여기까지 불려오게 만든 것이냐며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낸 상태였다.
"몬트라우 부자(父子)가 제국을 위해 충성하니 홍복이로다. 그대를 위해 약소하지만 내 준비한 것이 있노라. 들라 하라."
내관 하나가 고급스러운 목제 쟁반 위에 검은색 천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검은 천에 작은 신분 패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앞장서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그대에게 내리는 상이니라."
다른 내관들이 나와 검은 천을 쭉 펴 들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천에 번쩍이는, 실로 수놓은 내 문장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솟은 검은 금색실로, 검을 휘감는 두 줄기 불은 붉은 실로 새겨진 것이 아주 생생했다.
"그대에게 내리는 군기(軍旗)다. 짐은 적들이 이 깃발만 보아도 공포에 떨게 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전시에 벌써 공을 논하기는 이르나, 현재 백작령인 카몰을 후작령으로 하려 한다."
나를 후작으로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한 귀족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작 가문에서 분가한 가문은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지지 못한다.
황제는 나를 위해 금기를 어기려 하고 있었다.
놀라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황제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제발! 그런 건 하지 마!'
문관 하나가 바닥에 엎드려 말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카몰 백작의 공은 작지 않음이 분명하나 아직은 그 공을 논할 때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또한 이것은 균형을 무너트리는 선례를 만드는 것이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있는 자 중 카몰 백작만큼의 공을 세운 자가 누가 있는가!"
황제의 호통에 정전이 조용해졌다.
"한결같이 짐을 도운 카몰 백작이다! 선례를 만드는 것이 두려워 짐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사람에게 그리 박정하게 대하라는 말인가! 듣지 않겠다!"
어…… 엄밀히 말하면 나를 위해 그렇게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닌 건데…….
황제는 단단히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황제가 내게 말했다.
"카몰 백작은 신분 패를 받으라."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내려와 쟁반에 받친 신분 패를 내밀었다.
품에서 백작을 상징하는 은빛 신분 패를 꺼내 쟁반에 올려놓고 쟁반의 금빛 신분 패를 양손으로 들었다.
이제 내 위에 있는 사람은 붉은 신분 패의 공작과 흰 신분 패의 황족밖에 없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뒤에 있던 백관들이 똑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노기가 가라앉은 듯 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카몰 후작의 전략과 전술이 이미 신이(神異)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능력이 직위에 막히는 때가 있을 터, 짐은 그러한 상황을 원치 않는다. 카몰 후작에게 임시로 제국 동부의 병권을 총괄하는 도원수직을 내린다."
한마디로 제국 동부에서는 나보다 높은 군인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전 생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다시 한번 장군이 되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쁜 감정은 없었다.
그저 막중한 책임이 느껴질 뿐이었다.
여전히 신분 패를 두 손으로 받든 채 외쳤다.
"신(臣) 시안, 폐하의 명을 받들어 출정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