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3)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요."
칼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늘 낙천적인 그에게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그래요, 칼이라도 내 심정을 알아준다니 다행이네요."
우리는 지금 수도 서쪽에 있는 거대한 관문인 일야관(一夜關) 위에 있었다.
히베아의 대장벽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에 관문 위에 올라설 수 있는 병사의 수가 1,000이고, 안쪽에는 수만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과 그들에게 편의 시설을 제공할 수 있는 도시가 있었다.
서쪽에서 수도를 향해 온다면 이 길이 가장 넓고 평탄한 길이기 때문에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길은 가파르고 좁아 10만에 달하는 사힘군이 통과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초대 황제, 레인 서비어가 한창 정벌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그의 위명을 들은 어느 왕이 공포에 질려 백성들을 동원해 이 거대한 관문을 만들었단다.
그 왕은 엄청난 규모의 관문을 만들어 두고 레인 서비어의 침략에 결사 항전할 요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초대 황제는 단 하룻밤 만에 관문을 넘어 왕국을 짓밟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하룻밤의 관문, 일야관이었다.
그리고 레인 서비어는 이 관문이 쓸 만하다고 생각해 남겨 두고 추후 수도를 정한 뒤, 수도를 지키는 관문이 되게 했다고 한다.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아무리 봐도 이 거대한 건축물을 하룻밤 만에 함락시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 일야관 앞, 이민족이 주력이 된 사힘군이 새카맣게 몰려와 있었다.
처음에 적의 병력이 10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잘못된 보고인 줄로 알았다.
사힘 변경백의 군대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이민족들이 그 정도의 인구를 동원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활한 서쪽의 초원과 사막이지만 광활한 만큼 수많은 이민족이 있었고, 이전의 삶에서 그들이 뭉친 때는 내가 분리 운동을 제압하고 분리 운동을 지원했던 다른 왕국들을 응징하기 위해 제국 밖으로 나섰던 왕국 정벌 무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찌감치 인원을 규합해 단일 세력으로 거듭난 모양이었다.
난국이었다.
"제가 여행을 떠나올 때 분명 이민족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질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저렇게 하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살다 보니 서로 못 죽여 안달이던 놈들끼리 같이 서 있는 모습도 보는군요."
칼이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고 말했다.
사힘 출신으로 원래 사힘 변경백 아래 있었던 칼만이 이민족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와 나 이외에는 앞에 있는 군대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놈들은 수만 많을 뿐, 오합지졸입니다. 저놈들이 사는 곳에는 제대로 된 성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놈들은 이 거대한 관문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일야관의 책임자, 데마 오리스였다.
일야관까지는 수도방위병단의 관할구역이기 때문에 그 역시 수도방위병단 소속이었고, 수도방위병단 사령관인 카멜 할과 친밀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황궁 진격 때 카멜 할이 마지막에 은근슬쩍 발을 밀어 넣었던 기억 때문에 나는 그를 좋게 볼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카멜 할과 친한 관계라는 데마 오리스도 괜히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저들에게 성이 없는 것은 성을 못 지어서가 아니라 성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오."
"예?"
"이민족들에게는 영토라는 개념이 없소. 한곳에 머물다가 그곳의 사냥감이 떨어지면 이동하고, 그러다가 다른 부족을 만나면 싸우는 것의 반복이오.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방어할 필요가 없소. 늘 공격하는 삶을 살지."
"어찌 되었건 성이 없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저들은 절대로 이곳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넘지는 못할 거다.
관문이 이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 있으니까.
"안심하지 마시오. 저기는 이민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힘 변경백의 아들인 리오스 드와이트도 있소. 그가 이민족들에게 공성 요령을 알려 줬을 가능성이 크오."
"멍청한 이민족 놈들이 배워 봤자지요!"
칼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가 데마에게 설명했다.
"저들은 배우는 것이 빠릅니다. 그것이 적을 죽이고 자신이 살아남는 데 필요하다면 더욱더 기를 쓰고 배우려 들지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데마가 칼을 흘낏 바라보고 시선을 내게 돌렸다.
"보아하니 얼굴이 거뭇거뭇한 것이 서쪽 지방에서 온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사힘이 고향입니다."
"촌구석에서 왔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어디서 불안을 조장하는 말을 한단 말인가! 그리 두렵거든 내려가서 투항하게나. 리오스 남작이 고향 사람이라고 투항을 받아들여 주지 않겠나?"
퍼억!
"으악!"
내 발길질에 데마가 허리를 숙여 정강이를 붙잡았다.
"데마 경, 경은 방금 나의 휘하에 있는 검은늑대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을 무시했다. 이것은 나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것과 다름없는 바이다. 또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는 전장에서 출신에 입각하여 정당한 의견 제시를 무시했으니, 그대는 지휘관으로서 심각한 자질 부족이다."
"하, 하지만……!"
"변명은 듣지 않겠다. 경과 같이 부족한 지휘관은 파면하는 것이 옳으나, 그대가 지금까지 제국에 기여한 바를 참작하고 지휘 체계의 안정을 위해 사흘간의 근신을 명한다. 현 시간부로 일야관의 모든 지휘권은 내가 가져가겠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데마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내 기억에 없는 자이니 과거에 큰 활약을 못 했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자를 지휘관으로 앉혀 둘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칼의 말이었다.
"위에서 입이나 나불거리는 놈보다는 기사 하나가 더 필요한 때라 아까처럼 한 것뿐입니다."
-하이고, '너 좋으라고 한 건 아니야!' 이런 거냐? 반하겠다, 아주?
가볍게 투브의 말을 무시하고 주위의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일야관을 통하지 않고 수도로 향할 수 있는 길의 방비를 단단히 하고, 마법사들에게 지하 탐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일러. 그리고 철저하게 방어로 일관하고,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 병력을 1명이라도 내보내서는 안 돼."
장교들이 내 명령을 듣고 빠르게 각자의 부대로 멀어졌다.
시선을 다시 밖으로 돌렸다.
셀 수 없이 많은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그림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조악한 깃발들을 훑던 중 내 눈이 멈췄다.
교차한 2개의 곡도가 땅에 박혀 있는 문장이 그려진 깃발.
드와이트 가문의 문장이었다.
하나 드와이트 가문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마렐리온 드와이트 사힘 변경백이 이곳에 있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한데 그의 아들쯤이야.
가소로웠다.
드와이트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눈이 멎었다.
전갈의 독침이 크게 그려진 그림이 펄럭이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나라드마.
이전 삶에서 내게 대항해 이민족을 규합하고 대족장의 자리에 올라앉은 남자.
그는 대족장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기 위해 전갈의 독침이 그려진 깃발을 썼다.
지금 저곳에 그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 말고는 저 거칠기 짝이 없는 이민족을 규합할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
어두운 밤, 관문 앞 지척에 있는 풀이 살짝 들썩거렸다.
모르고 봤으면 웬 들짐승이 스치고 지나갔겠거니 할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감지한 마법사가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여 내게 오려는 것이 보였다.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풀은 여전히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준."
마법사의 지시에 따라 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모든 화살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풀을 향해 있었다.
조심스럽게 풀이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의 머리 하나가 빼꼼 올라왔다.
피잉! 피잉!
화살이 시위를 떠나 조준했던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골통이 빠개지는 소리, 피가 튀어 흩뿌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에서 잡아당긴 것인지 시체가 사라졌다.
"지금!"
걸음으로 인한 진동이 지하로 전달될까 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큰 솥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솥에 담겨 있던 끓는 기름을 구멍에 쏟아부었다.
안쪽에서 고통에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가 손에서 불을 만들어 안쪽으로 쏘아 보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이민족들이 굴 밖으로 나오려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일련의 소동이 끝난 후, 내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도착한 지 1주일 만에 자신들의 본진에서 관문 지척까지 굴을 팔 정도로 악착같은 놈들이다. 굴이 하나가 아닐 것이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1주일 만에 이렇게나 긴 굴을 파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물을 얻기 위해 바위도 파내는 부족이 있다고 들었어. 무른 땅을 파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겠지."
"각하께서는 그것을 어찌 아시고……."
"아버지의 손님 중 서부에 있는 왕국과 교류하는 상인이 들려준 거야. 이민족은 별별 능력을 갖춘 놈들이 부족 단위로 있다고."
내가 실제로 경험해 본 것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대충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거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오러를 연마하고 신체를 변형시켜 온 자들이 서부의 이민족들이다.
그나마 하나하나 내가 직접 부딪쳐 보고 꺾은 경험이 있기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끼이이익! 쾅!
작게 열려 있던 성문이 닫혔다.
땅굴에 대비해서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복귀했다.
관문 밖에는 마법사와 기사로 이루어진 정탐조가 적의 태세를 주시하며, 또 다른 땅굴이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레 땅을 훑고 있었다.
관문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가 중앙 막사로 돌아오자, 통신 마법사들이 정신없이 상황 전파를 하고 있었다.
"우측 2번 초소에서 적군 발견! 약 2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죄측 6번 초소에서 적군 마법사 부대 하나 출몰! 지원 요청입니다!"
"이곳에서 30분가량 떨어진 민가에 적군 기병대 출현입니다."
연속으로 급박하게 전파되는 상황에 수도방위병단 소속 장교들은 어찌할 줄은 모르고 굳었지만, 내가 데리고 온 카몰군 장교들은 능숙하게 인원 배분을 해냈다.
실전으로 키워 낸 보람이 있었다.
"침착해라! 적의 수가 10만이라고는 하지만 성을 끼고 방어하는 측에서는 공격 측의 1/10만 있어도 무난히 방어해 낼 수 있다! 우리 측은 4만이 있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 평정을 유지하고 적의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마!"
내가 일갈하자 그제야 수도방위병단 장교들도 침착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일야관에는 내가 데려온 카몰군 2만과 수도에서 지원받은 2만의 병력이 있었다.
카몰에서 더 데리고 왔어야 했나 싶기도 했지만 디시간, 안즈 수비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할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현 상황으로는 최선이었다.
투브가 눈을 감고 코를 위로 올렸다.
-영수의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