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4)
투브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재빠르게 투브를 안쪽으로 데려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영수가 어디 있어?"
-관문 너머에서 냄새가 나. 일부러 냄새를 흘리고 있어, 마치 사냥하는 것처럼.
"어떤 영수인지는 몰라?"
-모르지. 하지만 놈도 내가 있는 걸 눈치챘을 거야.
투브, 아라크네, 투르가.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영수들은 하나같이 인외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수가 적군 진영에 있단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질문이 쏟아졌다.
"아라크네처럼 사람으로 위장해 있는 걸까? 아니면 투르가처럼 그냥 중립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지 않아?"
-몰라. 내가 알 수 있는 건 영수가 있다는 것뿐이야.
투브가 나를 쳐다봤다.
-너답지 않아. 한 가지 가능성을 배제했어.
"무슨 가능성?"
-너와 나처럼 영수와 인간이 협력 관계일 가능성.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인간과 영수가 결탁하지 않았다고 확답을 내릴 순 없지.
"그것보다는 아라크네처럼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투브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봐.
"왜?"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런데, 영수는 존재만으로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야.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러 온 누구도 있었잖아.
어느 집안 선조님인지 참 용감무쌍하시네…….
"크흠, 그래서?"
-또 생김새뿐만 아니라 영수는 주위에 위압적인 기운을 발산해.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야, 자연스러운 거지. 그걸 아라크네는 변용 마법, 투르가는 이타르에게 도움을 받은 결계에 있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잖아. 그런데 그렇게도 애를 써도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둘을 느낄 수 있었어.
"위압적인 기운을 발산해? 다른 사람들은 네가 그냥 좀 신기한 늑대인 줄 알던데?"
투브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그래……. 특히 기사단 애들은 내가 애완용 개인 줄 알더라. 그렇게 쓰다듬고 놀아 주려고…… 아니, 이게 아니라! 내 기운을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건 몸 안에서 이타르의 반지가 밖으로 흐르는 내 기운을 갈무리하는 이유도 있지만, 너와 얽히면서 뭔가 꼬여 버려서 그런 게 커. 인간들에게까지는 내 기척이 안 느껴지는 거지.
"그럼 네가 감지한 저 영수는 기운을 숨기지 않는데 적군이 동요하지 않는 걸 보니 통제하거나 협력하는 인간이 있을 거다?"
내 말에 투브가 깜짝 놀라 외쳤다.
-세상에!
"왜?"
-매번 설명을 다 하고 나서야 '아!' 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늘따라 말귀를 철석같이 알아먹지?
"내가 너의 사고방식을 많이 따라간다는 거겠지, 뭐."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영수와 협력하는 인간이 적군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이게 무슨……."
간밤의 적의 습격을 받은 초소 중 하나에서 나를 긴급하게 찾아 가 보니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적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목책 군데군데에 녹이 슬어 있었다.
궁수들이 들어가 화살을 쏘는 감시탑은 한쪽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기둥 중 하나가 새파랗게 녹이 올라 툭 치면 바스러질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무언가 물어뜯은 모양새로 녹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평범한 야습인 줄로 알았습니다. 소규모 부대가 초소들을 급습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어젯밤은 놈들이 이쪽으로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가만히 서 있는 겁니다. 왜 저러나 봤는데 남자 하나가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지 않겠습니까?"
"혼자?"
"그렇습니다. 이민족의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덩치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왠지 위압감이 흘러넘쳤습니다. 적군에게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 이민족은 걸어올 뿐인데도 무릎이 덜덜 떨려 올 정도였습니다."
"대응은 안 했나?"
"물론 멀리서부터 화살을 쐈습니다. 몇 발은 놈에게 직격으로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놈의 왼팔에서 무언가 일렁였습니다. 마치 팔이 세 개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오러인가?"
오러를 신체 바깥으로 뻗어 내는 것만 해도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그것을 밖으로 내보낼 뿐 아니라 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니, 굉장한 실력자였다.
내 물음에 답하던 책임자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이 조금 정리된 듯, 쉬지도 않고 말을 줄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저도 성취가 낮기는 하지만 무기에 오러를 올려 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러가 아니었습니다. 팔……이라고 하기보다는 마치 어깨에서 펄떡이는 뱀이 생겨난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팔보다는 뱀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가만히 걸어오고 있는데 그 뱀이 재빠르게 움직여 다가오는 화살들을 물어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목책에 다가서자 뱀이 몸을 길게 뻗어 목책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뱀이 무는 곳, 지나는 곳마다 보시는 것처럼 녹이 생기고 부스러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적 부대가 초소로 돌격하기 시작했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워 지키긴 했으나……."
"고생했네. 사상자는?"
"사망자 3명, 부상자 12명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피해 규모가 작네. 잘해 줬어."
"감사합니다."
"그 뱀을 달고 있는 남자와 싸우다 죽은 사람이 있나?"
"사망자 세 명 모두 그 남자에게 당했습니다."
"한번 보자고."
책임자가 초소 한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마법사와 의사 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뒤, 책임자가 요철이 있는 흰 천을 걷었다.
그곳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죽은 병사가 있었다.
거대한 턱이 물어뜯은 것처럼 남자의 목은 절반 정도가 날아가 있었고, 그 목에서 생겨난 녹이 몸을 잠식하듯이 위로는 얼굴까지, 아래로는 가슴까지 번져 있었다.
"다른 사망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려 보려고 애썼지만, 녹의 진행을 막지 못했습니다. 마법사들의 말로는 마법도 아니라 합니다."
그때 옆 천막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책임자가 말했다.
"팔을 물린 녀석이 있습니다. 녹이 가슴까지 퍼지기 전에 절단해야 한다고 해서……."
그는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귓전을 파고드는 비명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었다.
"……그 남자의 인상착의는?"
"평범한 이민족 기마대의 모습이었습니다만, 머리카락이 아주 길었습니다. 묶었는데도 허리를 훌쩍 넘기는 길이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인가?"
"이마에 붉은 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머리가 길고 이마에 붉은 칠을 한 남자.
내 기억 속의 나라드마와 일치했다.
잔혹한 전사이자 냉철한 전략가인 그가 미지의 힘을 지닌 채 이번 삶에 등장했다.
과거보다 더 젊고 강인한 모습일 것이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죽어 있는 병사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손을 들어 그의 눈꺼풀을 덮어 주었다.
이미 생을 뒤로한 병사의 몸은 소름 돋게 차가웠다.
"충원할 병력을 보내 주겠다. 지시가 있기 전까지 방비를 단단히 하라."
***
"어째서 마음대로 움직인 거요!"
사힘군을 이끄는 리오스 드와이트가 나라드마를 윽박질렀다.
통역이 리오스의 말을 나라드마에게 전했다.
나라드마가 기지개를 쭉 켜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식량이 떨어져서 마실 나간 김에 적이 보여 살짝 건드린 것뿐이외다."
리오스가 분이 잔뜩 오른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대족장이라는 당신부터가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니 아래의 부족들이 내 말을 안 듣는 것 아니오! 모범을 보이시오, 나라드마!"
통역은 굳어 가는 분위기에 몸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으나 말을 절면서도 훌륭히 통역을 해냈다.
통역의 말을 들은 나라드마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가만히 있으면 식량이 땅에서 솟나? 우두머리라면 아랫것들이 배곯지 않게 해야지!"
군사를 동원하면 절반 이상을 보급 인원에 할당하는 제국과 달리 이민족들은 동원된 인원 전체가 전투 인원이었다.
이들은 필요한 것을 적에게서 얻었다.
식량이 필요하면 적의 것을 뺏어 먹었고, 옷이 필요하면 적의 것을 빼앗아 입었다.
이민족에게 보급은 앞에 있는 것이지, 뒤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일야관에 막혀 10만이 넘는 인원이 2주 넘게 발이 묶여 있었다.
가지고 온 식량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주위의 마을이나 영지는 개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몸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식사는 곧 근원이자 목적이었다.
이민족들 사이에서 식량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소리와 왜 총공세를 하지 않고 주변 초소만 찔러보냐는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공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쉽게 이야기하지 마시오!"
"그리 잘 알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
"나라드마!"
리오스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라드마는 그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 없는 눈으로 리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오스, 나는 수도로 가야 하지만 내 아래 모든 부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오.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면 더 많은 식량, 재화, 보물, 여자가 있는데 왜 여기에 묶여 있냐 하는 거지. 내가 대족장이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모두를 힘으로 묶어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패도적인 기운이 나라드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라드마의 어깨에 꼬리가 연결된 뱀이 기어 나와 그의 앞에 놓여 있던 탁상을 기었다.
뱀이 가는 모양대로 녹이 생기고 부스러졌다.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나라드마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부족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당연한 것 아니오? 그들의 대족장은 나지, 당신이 아니외다."
나라드마가 일어섰다.
탁상을 기던 뱀이 순식간에 나라드마의 어깨로 돌아와 사라졌다.
"리오스,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그 자리에 오른 것뿐이오.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시오,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통역이 침을 꿀꺽 삼키고 나라드마의 말을 통역했다.
"내려와야지."
나라드마가 몸을 돌려 천막 밖으로 나갔다.
리오스는 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탁상을 보며 나라드마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실은 '죽어야지.'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분노를 억누르며 부하를 불러 명령했다.
"각 부족에게 전해라. 내일 아침부터 일야관 공략에 들어간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후방에서 지원하는 척만 해라."
"알겠습니다."
이민족과 드와이트 가문이 대립한 역사는 아주 길었다.
그렇게 서로 치고받고 했으면 미운 정이라도 들 법했으나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도 께름칙했다.
사힘 변경백, 아니 지금은 사힘 왕국의 왕이라 주장하는 자신의 아버지, 하마렐리온 드와이트의 야욕 때문에 이민족을 이끌고 제국 안쪽 깊숙이 들어와 있는 리오스였지만 당장이라도 저 불결하고 냄새나는 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
리오스가 자신의 막사 한쪽에 놓여 있는 서신을 떠올렸다.
관문 안에 있는 사람 중 하나가 그와 내통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아서 무너질 관문인데, 멍청한 이민족 놈들이 죽고 싶어 용을 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