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6)
베고, 베고 또 베었다.
검을 쥔 손이 얼얼하면 왼손에 모여 있는 마나로 얼리고, 불태우고, 가르며 적의 진입을 막아 냈다.
그렇게 내 온몸이 적의 피에 젖고, 옆으로 시체 더미가 만들어질 무렵, 검은늑대 기사단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없이 적진으로 돌격해 하나하나 적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기사단원들이 무기를 들어 올릴 때마다 달빛이 반사되어 주위를 비추었다.
주변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적의 목이 두셋씩 떨어져 나갔다.
"사, 살았다……."
내 뒤에서 적을 향해 활을 쏘던 필리페가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았다.
갑자기 내게 끌려와서 다수를 막아야 했으니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필리페 예거입니다."
그가 일어나 답했다.
어두운 밤인데도 아직 그의 무릎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잘했다, 필리페. 네 판단과 행동 덕에 아군이 안전할 수 있었다."
내 짧은 치하에 필리페의 얼굴이 자부심과 결연함으로 가득 찼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칼이 다가왔다.
"관문은 잘하고 있나요?"
"공세가 거세긴 하지만 나름대로 잘 막아 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로하나스가 와서 관문이 아니라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잘못하면 그대로 뒤를 잡혀 전멸할 수도 있었어요."
내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목과 몸이 분리된 데마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칼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말끔하게 처리하셨군요. 적들은 현재 후퇴 중입니다. 밤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습격한 적중에는 이민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변경백의 병력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내통하는 사람이 열어 준 길을 통해 우리 뒤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다면, 더 사납고 빠른 이민족 부대를 보내는 것이 적절한 판단일 텐데, 이민족이 하나도 없었어요."
적군을 이끄는 것이 리오스 드와이트이기에 사힘군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사실 구성원은 이민족이 더 많은 부대였다.
당최 왜인지 모를 이유로 저들이 힘을 합쳐 제국 내부로 진격하고 있으나,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죽이고 싶어 난리를 치던 족속들이었다.
내부에서 분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칼, 이 초소를 지킬 인원은 올라오고 있나요?"
"사람을 보내라고 해 두었습니다."
"좋아요. 기사단을 불러 모으세요, 초소에 인원이 도착하는 대로 우리는 출격해서 적의 뒤를 칩니다."
칼이 기사단을 불러 모으러 떠났다.
내부 분열이 있었는지, 리오스가 전공을 혼자 차지하려고 벌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 수뇌부에 혼선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 사실을 이용해야 했다.
필리페에게 말했다.
"관문으로 가서 리오스가 이끄는 사힘 주력군이 우리에게 붙었다고 크게 소리치고 다녀. 할 수 있겠지?"
"예!"
필리페가 내려갈 준비를 했다.
초소의 한쪽에 말 몇 마리가 매어져 있음에도 그는 그냥 뛰어 내려갈 태세였다.
"잠깐! 말 타는 법을 모르나?"
"보병인지라 배운 적이 없습니다."
"후, 관문까지는 안 되고 본영까지 데려다줄 테니 전력으로 올라가서 내가 시킨 것을 하도록. 투브!"
투브를 부르고 이곳에 올 때처럼 필리페의 갑옷 틈새에 손을 밀어 넣고 오러를 운용해 그를 한 손에 들었다.
필리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투브가 나 말고는 안 태우겠다는 걸 어떻게 하겠냐.
네가 참아야지.
***
필리페를 데려다주고 오니 초소에는 새로운 인원들이 도착해 있었고, 기사단원들도 모두 출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철저하게 방어적으로 돌격한다. 우리의 역할은 적을 궤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힘군이 우리에게 붙었다는 거짓 소문을 이민족들이 믿게 하고 관문에 집중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전투는 자제하도록."
급한 대로 시체에서 사힘군의 투구만 벗겨 내어 착용한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다.
어둠이 우리의 정체를 가려 줄 것이다.
"늑대를 타고 가시면 각하께서 이곳에 있는 것이 들킬 수 있습니다."
"내가 사힘군 투구를 쓴 그대들 사이에 있으면 이민족들이 더 쉽게 소문을 믿고 혼란해 하겠지. 괜찮아."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알려졌지만 투브와 내가 멀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져도 상관은 없지만 투브와 나 사이의 비밀 같은 것이라 왠지 주위에 말하기가 꺼려졌다.
게다가 적의 화력 분산을 위해서 나가는 것이니 이왕이면 시선을 확 돌릴 수 있게 내가 직접 나가는 방안도 나쁘지 않았다.
"가지."
대형을 이루어 초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적진의 측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오느라 길게 늘어져 있던 진형을 정비했다.
나를 태운 투브가 가운데에서 달리고 다른 기사들이 좌우로 늘어선 형태였다.
"가볍게 하나 정도 부수고 시작하지."
기사들이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적 부대 하나와 그대로 충돌했다.
그동안 우리는 철저하게 방어로 일관했기에 자신들이 공격당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민족 부대 하나가 그대로 쓸려 나갔다.
그동안 관문 위로 올라오려는 이민족만 막아야 해서 욕구불만에 차 있던 기사들이 참아 온 욕망을 오래간만에 폭발시켰다.
미친 듯 적진을 헤집으며 쉬지 않고 무기를 휘둘러 댔다.
그러나 10만 대군에 고작 100명 남짓한 인원이 달려들었을 뿐, 수적으로 너무나 열세였다.
"계속 달려! 멈추면 포위당해 죽는다!"
앞을 막는 것들을 향해 마법을 날려 보내며 외쳤다.
"꺾어!"
내 지시에 적군 병사의 몸통을 물고 있던 투브가 고개를 들어 밖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내 뒤를 따랐다.
그리고 기사들은 시키지도 않은 구호를 외쳤다.
"제국을 위하여!"
"너희들은 이곳에서 죽는다!"
"동맹은 너희들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다! 더러운 이민족 놈들!"
사힘군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웃음이 날 정도로 어설픈 연기였지만 다들 제법 진지했기에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이민족과는 쓰는 말이 달라 과연 알아들을까 싶었는데, 이민족 중 제국어를 알아듣는 자가 있는지 자기들끼리 크게 외치고는 당황해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적군의 외곽을 공격하고 빠져나오길 몇 번 하다 보니 멀리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이 정도면 적들이 서로를 불신하기에 차고 넘쳤다.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 환영처럼 사라져야 했다.
빠르게 우리가 내려왔던 초소로 향하는데 뒤에서 강력한 기운이 빠르게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뭔가 온다.
뒤를 돌아보니 적진에서 필마단기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투브만큼의 속도는 아니지만 다른 말들과 비교하면 굉장한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기사단원 하나가 그 사람을 떨쳐 내기 위해 살짝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던 기사는 우리를 추격하는 남자의 곡도에 가슴이 꿰뚫려 낙마했다.
그것을 본 다른 기사 둘이 동료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남자에게 붙었다.
"안 돼! 계속 달려!"
내 외침이 닿기도 전에 기사 둘의 목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단원 셋을 잃은 칼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했다.
오델리아가 남자를 상대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려는 것을 거칠게 제지했다.
"다 달려! 이대로 초소까지 달려! 놈은 내가 맡는다!"
오델리아가 다시 속도를 올려 진형에 합류했다.
멀리 초소가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놈은 계속해서 우리를 추적할 것이다.
내가 아는 놈은 충분히 그럴 놈이다.
"칼! 모든 초소에 전달해서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알아서 할 테니 모든 전력을 방어에만 투입하라고 해요!"
재빠르게 칼에게 명령했다.
내 말을 들은 로하나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칼이 먼저 알겠다고 하고 기사단을 이끌고 올라갔다.
놈은 더욱 속도를 높여 다가왔고, 이제는 놈의 얼굴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라드마였다.
"속도를 줄여."
내 말에 투브가 나라드마의 말과 속도를 맞추었다.
속도는 완전히 같아져 나라드마와 나는 평행하게 달리고 있었다.
각각 달리는 늑대와 말 위에서 우리는 곡예와 같은 움직임으로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내가 그의 목을 노리면 그는 내 심장을 노렸다.
내가 그의 심장을 노리면 그는 내 목을 파고들었다.
이전 삶에서 내 개인이 보유한 무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스스로의 무력이 강하기보다는 전체적인 판을 읽고 병사들을 움직이는 용병술에 능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지장(智將)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나라드마는 지장의 면모는 조금 부족했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민족들을 통솔했다.
지장보다는 용장(勇將)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아마 개인의 무력으로는 오델리아 이상의 인물일 것이다.
오델리아도 사로잡아 죽였던 나지만 이 나라드마만큼은 어떤 수로도 잡아낼 수가 없어, 결국에는 이민족들 간의 분열을 유도해서 부하의 손에 죽게 했다.
그런 나라드마와 대등한 위치에서 검격을 나누고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내가 자신의 공격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빈틈을 파고들자 나라드마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멈추게 했다.
나도 투브를 멈춰 세우고 초소로 올라가는 길을 막았다.
이미 기사단은 초소로 다 복귀해 있었다.
"강하다, 너는."
나라드마의 입이 열렸다.
서툰 제국어였다.
"늑대, 이 녀석과 비슷하다."
나라드마의 왼팔에서 투명한 뱀의 형상이 생기더니 이내 완연한 형체를 갖추었다.
뱀이 쉿쉿거리며 혀를 날름댔다.
그걸 본 투브가 송곳니를 보이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마음에 안 들게 생긴 놈이야.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너는 이곳을 지나갈 수 없어."
내 말에 나라드마가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의 말을 아나?"
이민족끼리도 각자 다른 말을 쓰는 판국에 내가 자신의 부족이 쓰는 말을 정확히 했으니 놀랄 만했다.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해 직접 그의 부족이 쓰는 말을 배울 정도로 나는 그의 죽음을 열망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다.
"돌아가, 이미 한계에 다한 걸 알고 있어. 제국이 지금 분열 중이란 것은 알고 있겠지? 돌아가거나 1황자의 영역으로 가면 추격하지 않겠어."
"앞으로만 나아갔던 삶이다. 고지를 목전에 두고 뒤로 향하다니, 말도 안 되지."
"무모하네."
"무모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나."
나라드마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을 향해서 말을 세워 놓고 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말은 히힝 소리를 내며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 버렸다.
"너는 관문의 우두머리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씩 웃었다.
"다 알면서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 나는 나라드마, 초원과 사막의 대족장이다."
나라드마의 왼팔에 감겨 있던 뱀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며 뱀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아직도 뱀의 꼬리는 나라드마의 팔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땅에 닿은 부분은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꼬리까지 다 빠져나왔을 때, 뱀은 주위 아름드리나무만 한 몸통을 가진 엄청난 크기로 변해 있었다.
나라드마가 손을 뻗어 뱀의 머리에 올리자, 뱀이 나라드마의 팔에 몸을 비볐다.
"세르페의 주인이기도 하지."
세르페라 불린 뱀이 우리를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날카로운 이와 그것을 타고 뚝뚝 흐르는 독이 보였다.
-주인? 인간이 영수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뭔가로 저 영수를 속박해 두고 있는 건가?
뱀에게 맞서 몸을 낮추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자세를 한 투브가 말했다.
"네 늑대도 평범한 짐승은 아니겠지? 세르페가 이렇게 흥미를 가지는 건 처음 봤어. 주인 된 사람으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나라드마와 뱀이 순식간에 나와 투브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뱀이 투브를 옭아매려 들었기에 등에 있는 내가 움직임에 제약이 될까 싶어서 뛰어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라드마가 곡도를 휘둘렀다.
채앵!
검을 들어 나라드마의 곡도를 막아 냈다.
그의 엄청난 힘과 오러에 검을 들고 있는 내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교차한 검 사이로 나라드마가 말했다.
"전사 대 전사로서 나도 네게 흥미가 있으니 잠시 직책은 내려놓도록 하지."
강철 검과 곡도를 감싼 서로의 오러가 첨예하게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투브는 벌써 뱀과 엉겨 붙어 싸우고 있었다.
나라드마가 왼손으로 내 검신을 잡았다.
검에 순식간에 녹이 오르기 시작했다.
콰앙!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오러가 마침내 폭발했다.
나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가볍게 뒤로 빠져 몸을 추슬렀다.
강철검을 내려다보니 그의 손이 닿은 대로 녹이 올라 있었다.
"뱀을 몸에 품고 있으면 그런 것도 할 수 있게 되나 보지?"
"부럽나? 왼손으로 뭘 함부로 못 만진다는 점만 빼면 나쁘지 않아."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떨어진 검이 바닥의 자갈과 부딪혀 챙그랑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적당히 상대만 해 주다가 돌아갈 심산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이민족은 나라드마의 강력함 때문에 통합된 것뿐이니 나라드마가 죽으면 사분오열되어 오합지졸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이전 삶에서 내가 경험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라드마를 죽여야 했다.
과거에 비하면 나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지만 그래도 나라드마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로 엄청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를 이곳에서 죽이는 것만큼 확실하게 이민족의 공세를 막는 방법은 없었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고 손에 마나 소드를 만들어 냈다.
여유가 넘쳤던 나라드마의 얼굴이 굳었다.
"어때, 부럽나?"
말이 끝나자마자 나라드마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지혜로 너를 한 번 죽였으니, 이번에는 용맹으로 밟아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