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89화 (89/180)

호적수 (7)

목 안쪽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울컥하고 넘어온 핏물이 입안을 채웠다.

"퉷!"

뱉어 낸 피가 땅에 흩뿌려졌다.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나면서 호흡이 조금 편해졌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당장이라도 꺾일 것 같은 고개를 들어 나라드마를 보았다.

아마 한평생 잘려 본 적 없을 그의 머리카락이 절반 정도 잘려 있었다.

나머지 절반의 머리카락도 불에 그슬려 제멋대로 하늘과 땅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마나 소드에 베여 보이지 않을 왼눈과 이글이글 불타는 오른눈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르륵……. 그르륵……."

속이 엉망이 된 듯, 나라드마의 숨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그의 코와 입에서 나온 피가 턱과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부러진 곡도를 나를 향해 겨눈 나라드마가 말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죽어 줘야겠다. 그것이 형제들을 위한 길이다."

곡도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와 나라드마 모두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싸운 탓에 몸 상태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더 이상 마나 소드를 만들었다가는 죽는다는 느낌이 전신을 지배했다.

덜그럭.

발에 무언가 걸렸다.

녹이 슬어 버려 처음에 버렸던 강철 검이었다.

지금은 이런 고철일지라도 반가웠다.

비척비척 허리를 숙여 검을 집어 들고 말했다.

"나도 너를 죽이고 싶긴 한데, 내가 죽고 싶지는 않아. 이건 나를 위한 길이니까."

그 순간 말을 탄 기사 하나가 나라드마의 뒤에서 그를 덮쳤다.

내가 출격을 금지했음에도 나라드마를 지키기 위해 몰려온 이민족을 보고 각 초소에 있던 병력이 그에 맞서 출격한 상태였다.

그에 따라 주변은 아비규환으로 변해 있었다.

"죽어!"

기사가 몸통과 팔 사이에 창을 단단히 끼우고 나라드마의 등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나라드마는 등과 배에 창이 관통되어 죽을 것이었다.

휙.

뒤도 돌아보지 않던 나라드마가 창에 찔리기 직전 몸을 날려 말의 목을 감았다.

부드러운 동작으로 회전해 말 위에 올라탄 나라드마가 부러진 곡도로 기사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타고 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피해야 한다.

위기감이 온몸에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된 다리는 땅에 뿌리라도 박은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시시각각 나라드마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검을 들었다.

피할 수 없으니 막아 내야 했다.

쾅!

옆의 수풀에서 튀어나온 투브가 나라드마가 타고 있던 말의 옆구리에 충돌했다.

말이 밀려 쓰러지고 나라드마가 흙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그렇게 말하는 투브의 털 곳곳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었다.

발톱과 이빨에 붙은 뱀의 깨진 비늘과 피가 눈에 들어왔다.

"뱀은? 죽였어?"

"카악!"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투브의 뒤에서 나라드마의 뱀이 아가리를 우악스럽게 벌리고 투브를 물려 들었다.

거대한 송곳니 하나가 부러져 덜렁이고 있었다.

-아직, 이 정도야.

투브가 뱀의 배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아래로 쭉 그어 내렸다.

뱀의 배가 갈라지며 내장이 밖으로 흘러내렸다.

-금방이지.

뱀은 죽어 가면서도 투브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노려 댔고, 한 몸이 된 것처럼 엉겨 붙은 두 영수는 다시 서로의 힘을 이기지 못해 주위를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다리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라드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주위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대족장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지만 아군의 거센 저항에 막혀 도달하지 못했다.

마침내 나라드마 앞에 도달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늘게 등이 올라갔다 내렸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강인한 남자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여기서 죽여야 한다.

검 끝이 아래로 가게 양손으로 검을 들고 오러를 그러모았다.

심장이 힘차게 뛰며 피와 함께 오러를 전신으로 밀어 보냈다.

우웅! 우웅!

강철 검이 오러와 함께 공명했다.

검의 끝에서 투명한 오러가 솟아 나왔다.

팔을 힘껏 들어 올렸다.

나라드마의 목을 노리고 검을 찍어 내렸다.

모든 힘을 다한 내 일격은 한 남자에 의해 가로막혔다.

머리를 박박 깎은 남자가 어느새 아군이 만들어 낸 진형을 뚫고 들어와 내 검을 막고 있었다.

키기기기기긱.

검과 검이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비켜라, 죽는다."

내 경고에도 남자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내 몸은 정상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 정체불명의 남자의 오러와 완력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는 마나가 있었다.

검을 잡고 있던 손 중 왼손을 떼어 나와 나라드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올려놓았다.

내가 위에서 찍어 누르는 자세였기에 내 손은 남자의 눈과 머리를 덮는 형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나를 모아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열을 가했다.

남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통스러운 비명이 아니었다.

"나라드마아아! 일어나아아!"

남자의 고함이 여명을 찢고 울려 퍼졌다.

엎어져 있던 나라드마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덮은 내 손가락 사이로 불이 치솟았다.

그러나 남자는 끝까지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족장을 지켜라! 대족장을 보호해!"

그리고 초인적인 힘으로 내 검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경이로울 정도의 의지였다.

남자의 외침을 들은 이민족들이 더욱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몇몇 이민족 전사가 포위망을 뚫고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아군이 검을 휘둘렀으나 이민족 전사들은 자신이 베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드마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이 녹아내린 남자의 가슴에 칼이 닿기 직전, 그가 내게 말했다.

"나라드마는 천상의 별이다. 인간인 네가 어찌할 수 없다."

푸욱!

강철 검이 남자의 가슴을 찔렀다.

검을 뽑아내자 남자가 무너져 내렸다.

그의 가슴에서 피가 울컥울컥 밀려 나왔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땐 나라드마가 이민족 전사의 등에 업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우카아아알!"

나라드마의 찢어진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그의 하나밖에 남지 않는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별이라.

피눈물 흘리는 외눈별이라.

언제든 다시 나타나거라.

남은 눈도 없애고 지상에 곤두박질치게 해 줄 테니.

"프하……."

깊은 곳에서 숨이 밀려 나왔다.

투브가 죽은 뱀의 머리를 물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각하! 각하!"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였더라?

"각하! 괜찮으십니까! 이민족들이 관문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로하나스였다.

"때가, 때가 됐군. 쿨럭!"

다시 한번 피를 쏟아 냈다.

로하나스가 놀라 나를 부축했다.

"부축하겠습니다. 각하,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로하나스가 나를 만류했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고 쩌렁쩌렁 하게 외쳤다.

"전군! 무너지는 적의 숨통을 끊어라! 제국의 적을 섬멸하라!"

***

싸움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행위가 적에게 등을 보이는 행위이다.

복종할지라도 상대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몸을 낮춰야지, 돌아서서 등을 보이는 순간 바로 상대의 날카로운 일격이 내 숨통을 끊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떤 싸움에도 통용되는 법칙이다.

설령 그 싸움이 수만, 수십만 단위의 싸움인 전쟁일지라도.

우리는 뒤돌아 후퇴하는 사힘군을 악착같이 따라가 죽이고 또 죽였다.

이민족들이 망가진 전열을 추스르고 기세를 끌어올리기 전에 더욱 몰아쳤다.

추격은 기세로 하는 것이지 수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세등등한 기사들이 적의 후미를 박살 냈다.

그 결과 며칠 동안 일야관 앞에는 적의 시체를 태우는 불이 길게 늘어져 꺼지지 않았다.

악착같이 따라붙는 우리의 추격에 사힘군 내의 이민족들은 자신들끼리 분열하고 갈라졌다.

10만의 군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인원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자신들이 온 서쪽으로 돌아가는 부족도 있었고,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향하는 이민족도 있었다.

수도를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제국의 턱 바로 아래까지 밀고 들어온 이민족을 막아 낸 개선장군이 되어 수도로 돌아왔다.

리오스 드와이트와 나라드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저 당당한 자태를 보라! 짐은 그대를 믿고 있었노라!"

황제가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나를 감싸 안았다.

아주 이례적인 경우였다.

흐뭇하게 나를 바라본 황제가 정전 내부까지 동행을 허가 받아 내 옆에 있던 투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황제가 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투브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영물이로다! 영물이야! 짐에게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 준 영물이로다!"

황제가 기뻐했지만 투브는 영 시큰둥했다.

-권력 있는 놈들은 뭐든 자기 좋을 대로 끌어다 해석하지.

'나도 잘 알고 있는데 괜히 송곳니 드러내지 말고 기분 좀 맞춰 줘. 괜히 머리 털지 말고.'

-너도 어렵게 산다.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다행히도 투브는 머리를 털지 않았고, 황제가 동물에게 거부당하는 불경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짐이 그대에게 무엇을 내릴까 여러 날을 고민했으나 어떤 것이 좋을지 떠오르는 것이 없더구나. 그리하여 카몰 후(侯)가 원하는 것을 내리고자 하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직 나라드마와의 결전의 여파가 남아 있어 찌르르하게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고통을 애써 무시한 채 황제에게 말했다.

"신하 된 자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또한 아직 반역자들이 제국 곳곳에 남아 있는데 무슨 염치로 폐하께서 내리는 상을 받겠나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정전에 모여 있던 다른 신하들과 귀족들이 외쳤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나는 말을 계속했다.

내 할 일을 멈추고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생각은 절대 없었다.

황제에게 얻어 낼 것은 얻어 내야 했다.

"다만."

"다만?"

내 말에 황제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신(臣)이 남쪽의 역도(逆徒)들을 소탕하던 중 폐하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온 터, 아직 소임을 다하지 못했나이다. 제국의 남부는 인력과 물산이 많은 곳, 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지오니, 부디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더 많은 물자와 병력을 보내 주기를 청해 올리나이다."

황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펴졌다.

이미 내 아래 있는 병력은 1개 군단을 넘어선 상태고, 후작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민족의 침략도 막아 냈으니 수도에서의 내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재의 나에게 더 많은 병력을 쥐여 주는 것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들인 시간과 날린 기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분도 확실하지 않은가.

역도 소탕.

그렇다고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황제 스스로가 본인의 말을 어기는 상황이 만들어지니 외통수였다.

"하하하하하!"

황제가 웃었다.

"짐과 제국을 향한 그대의 충심이 태산을 넘어서고 대양을 메우겠구나. 그러나 현재 그랑베르트의 상황이 심각하다 들었기에 그것은 불허한다."

다른 곳의 상황을 들어 황제는 내게 병력을 더 부여하는 것을 에둘러 거절했다.

더 주장하기도 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나 카몰 후의 주장이 그른 것이 없는 바, 50의 붉은방패 기사단원을 그대 휘하에 내린다."

기사단만 놓고 보았을 때 제국 최고의 전력이었다.

나를 향한 황제의 견고한 신뢰가 느껴졌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나라드마를 확실히 죽이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지만 다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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