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1)
"끔찍하군요."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로하나스가 말했다.
그의 눈은 우리 앞에 놓인 기괴한 조형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대한 나무 위 여기저기에 사람들의 시체가 걸려 있고, 까마귀들이 나무 주위를 배회하며 시체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었다.
나무 위에 걸린 시체 중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이리저리 조각나 있었다.
그리고 나뭇가지 곳곳에 피로 쓰인 괴문자들이 보였다.
"우욱!"
그것을 보고 있던 한 마법사가 참지 못하고 옆으로 달려가 토악질을 했다.
평시의 마법사는 귀족 계층, 이렇게 잔혹하고 적나라한 전쟁의 참상을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른 기사나 병사 들도 이 참상에 고개를 마주하지 못했다.
인간 아닌 존재인 투브와 도깨비 둘만 멀쩡히 구조물을 바라보며 의견을 말했다.
-인신 공양인가. 끔찍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
"뭔가를 소환하려구 만든 건가 봐유. 뭔지는 모르겄는디……."
"소환하기에는 너무 술식이 조악한 거 아녀? 이대로라면 뭘 멀쩡히 소환하기는 힘들 것 같은디?"
"멀쩡히 소환하면 사역이 힘들잔여. 적당히 팔이나 다리 하나가 읎게 나와야 부리기가 쉬운 거 몰러?"
소환?
잠시 고민하다 손에서 불을 만들어 나무를 향해 던졌다.
불이 잠시 작아지더니 이내 나무를 타고 무섭게 치솟았다.
불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시체와 나무가 타들어 갔다.
"이게…… 서부의 이민족들……. 어떻게 죄 없는 양민들에게 이렇게 잔혹한 짓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그레이스 바크하임, 산탄다르 공작이 내 옆에서 신음 같은 말을 흘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카몰 후작,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들을 막아 낸……."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막사로 돌아왔다.
막아 냈다…….
막아 냈나……?
이민족이 수도로 향하는 것은 막았으나 나라드마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는 눈 하나 잃은 정도로 죽을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나라드마를 생각하니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한 번 더 그와 생사를 겨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아쉬운 만큼 커졌다.
복잡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일야관에서 나라드마와의 결전 이후 석 달, 나는 다시 한번 진로를 남쪽으로 돌린 상태였다.
바다에서는 발시안을 비롯한 안즈의 해양 도시들에서 밤낮없이 건조한 함대가 출항해 1황자에게 붙은 남부의 함대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지상에서는 나를 비롯한 군세가 하루가 다르게 제국의 남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산탄다르 공작도 주위의 영지 정리를 마치고 병력을 이끌고 내려와 내게 합류한 상태, 내 아래에는 10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모여 있었다.
내가 남부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부의 영주들 사이에는 결사 항전을 택할 것인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황제에게 잘못을 빌 것인지를 두고 두 패로 갈렸다는 첩자의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끝까지 1황자의 편에 서기로 했다.
남부는 공작령이 둘이나 있고, 물산이 풍부하다.
또한 다른 왕국들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니 외세를 끌어들이는 한이 있어도 나를 막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나라드마를 막는 동안 도시민들의 봉기 역시 차근차근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쉬운 일이었다.
지난 생에서 10년 이상 제국을 휩쓸었던 분리 운동은 이번에는 도시민의 봉기라는 형태로 비슷하게 발생했지만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마법을 만들어 낼 때 기존의 술식과 조금만 다르게 시도해도 원래 의도했던 것에서 천양지차의 마법이 발현되기 마련이다.
화살을 쏠 때는 각도가 1도만 틀어져도 원래 예상했던 도착점보다 한참 다른 곳에 떨어진다.
지난번 삶과 다른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 인과를 바꾸고 새로운 사건들이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주먹을 꾹 쥐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금의 나는 그 시절과 비교하면 시작점도 달랐고 성취한 것도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다.
누가, 무엇이 내 앞을 막아도 나는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산탄다르 공작이 내 천막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그녀가 워낙 거칠게 들어왔기에 졸고 있던 투브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꼬마 모습을 한 도깨비들도 잠시 긴장하나 싶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허공에 불로 무언가 그려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진영에 합류한 지도 한 달, 많이 익숙해졌다는 뜻이었다.
"시안."
"각하, 적어도 그 차림새로는 저를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갑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분상으로 그녀는 공작이고 나는 후작이기에 내가 예를 표하는 것이 맞지만, 갑옷을 입었다는 것은 전장에 나서겠다는 뜻, 현재 이 전장에 나보다 높은 군인은 없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상호 존대하는 것이 옳았다.
"딱딱하게 굴긴. 우리끼리인데 어때?"
"우리가 그리 가까웠습니까?"
그레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꼬맹이는 예전이 훨씬 귀여웠어."
"농담이나 하자고 오신 건 아닐 텐데요."
"이민족들이 만들어 놓은 아까 그 나무, 어떻게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이민족이 강대한 힘을 끌어오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인신 공양 방법 중 하나였다.
주로 악마나 다른 차원의 괴물들, 뭐 그런 존재와 계약하거나 소환하기 위한 방책.
대개는 술자가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나는 아주 멍청한 마법, 아니 그것은 법(法)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술(術)이었다.
설마 그런 것까지 그레이스가 알고 있나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인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일야관에서 뿔뿔이 흩어진 이민족 중 서쪽으로 가지 않은 부족들이 각지에 흩어져 죄 없는 자들을 저렇게 약탈하고 죽이고 있어. 우리 정도의 힘이라면 이민족 잔당을 소탕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남쪽으로의 진군을 조금 늦추고 주위의 이민족을 먼저 정리하는 게 어때? 그 일로 인해서 민심이 우리 쪽으로 기울기도 할 것 아니야."
"일리는 있지만 불가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속도를 늦출수록 적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아군은 대군이 되어 버린지라 자연스레 보급로가 길어지고 정보 전달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아군을 분리하는 것은 효율 면에서 크게 손해를 보게 됩니다."
"보급은 산탄다르에서 발시안으로 보내지는 식량을 해운으로 옮기고 있잖아. 내가 데리고 온 마법사들 덕에 내부에 통신망이 한층 강화되기도 했고."
내 시선과 그레이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그녀는 전혀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병 때문입니까."
그레이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역병에 죽어 갔던 각하의 영민들이 아까 나무에 걸려 있던 시체들과 겹쳐 보였습니까?"
"……무례하군, 시안."
그녀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안 될 일입니다. 각하께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고 계십니다."
"하지만 전 병력이 아니라 일부만이라도 돌릴 수는 있잖아!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야?"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가 없지 않습니다. 난세에 자신의 몸을 지킬 힘을 가지지 못한 죄이지요."
"시안! 너랑 일반 사람을 같은 선에 두지 마! 오러와 마법을 쓰는 네가 그 사람들의 심정을 어떻게 알아!"
"왜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장수의 재(才)가 드러나기 전까지 전장에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내 앞의 여인은 모른다.
공작가의 후예지만 다른 귀족들의 질시와 견제를 받고, 맨몸으로 병사들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아끼던 기사가 나의 잘못된 지휘로 죽어 가는 것을 본 이전 생의 나를.
목에 무언가 울컥하고 차오르는 것을 밀어 내렸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그레이스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숨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이민족과 싸워 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빠르고 간교하며 영악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궁지에 몰려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쥐는 독기를 품고 고양이를 물어뜯습니다. 그런 쥐를 죽이는 방법은 더욱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감추고 지켜보다가 쥐가 안도하거든 번개같이 덮쳐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때를 기다리느라 저런 끔찍한 만행을 보고 있으라는 것은 말도 안 돼! 우리에게는 힘이 있어! 게다가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네 책임도 있어!"
"무슨 책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야관에서 네가 이들을 격멸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잖아."
"4만과 10만의 싸움이었습니다. 기세를 타고 그들의 뒤를 따라나선 것만 해도 아주 위험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수장이 무너졌고, 아군의 기세가 불과 같았기에 가능했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지키는 것만으로도 이기는 것인데 적을 공격해 붕괴시켰습니다. 제게 책임을 전가하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스의 한쪽 입이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나를 쉽게 보는군. 너는 더 추격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어."
그랬다.
나는 사힘군과 이민족을 더 추격할 수 있었음에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칼끝을 향할 때는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였지만 내게 적대하지만 않는다면 유용한 제3세력이었다.
1황자파 귀족들의 영토로 그들을 교묘하게 몰아붙였고, 그 결과 이민족의 거센 침략을 받은 1황자파 귀족들의 영지는 쑥대밭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의 고난을 겪는 중이었다.
게다가 일야관에 있던 병력은 수도방위병단의 병력도 있었지만 내가 데리고 온 카몰군이 많았다.
일야관 이후에 있을 남부행을 생각해 봤을 때, 카몰군의 전력을 최대한 아껴야 했고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추격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분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당황스럽습니다."
"네가 무얼 꾸미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위해서 대의(大義)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각하야말로 사사로운 감정에 매몰되어 무엇이 대의인지 잊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레이스가 말했다.
"네 대의는 사람들이 저리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폐하의 명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이지?"
"이민족을 처리하는 동안 남부의 적들은 더욱 태세를 강건히 하고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희생되는 것은 아군의 목숨입니다. 아군이 비참하게 죽을 것은 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민족에게 사지가 찢겨 나무에 걸려 죽는 것은 비참하고 슬프고 애잔한 죽음이지만 전장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는 것은 군인이기 때문에, 기사이기 때문에, 영주에게 불려 나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데려온 산탄다르군만이라도 데리고 가서……."
"제 말을 어떻게 들으신 겁니까. 불허합니다."
화가 잔뜩 난 그레이스가 나가고, 로하나스를 불러 말했다.
"검은늑대 기사단과 붉은방패 기사단을 데리고 주위를 순찰하면서 아까 봤던 인신 공양 같은 흔적이 더 있나 살펴봐. 그 과정에서 이민족을 보게 되거든 자의적인 판단을 내려도 좋아."
"그 말씀은……."
"대신 4일 이내에 아군으로 합류해야 하고 한 명의 손실도 허용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로하나스가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보고 있던 투브가 한마디를 했다.
-어차피 그럴 거였으면 아까 산탄다르 공작에게 맡겨도 되는 것 아니었어?
"안 돼, 목적이 달라. 그녀는 주위 이민족의 완전 소탕을 원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인신 공양의 흔적을 찾는 거야. 나는 이민족들이 내 영역에 오지 않는 이상 공격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다른 지역을 더 휘저어 줬으면 해."
-어쨌든 말이라도 한번 살펴보겠다고 했으면 됐잖아.
"그레이스는 본인이 직접 나서기를 원했잖아. 내가 총 지휘를 하고 있긴 하지만 10만의 병력 중 과반수가 그녀의 산탄다르군이야. 껄끄러워. 최대한 활약 할 기회를 줄여야 해. 아직 그녀의 속셈이 뭔지도 정확하지 않아."
투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는 참 좋고, 말도 그럴듯하게 잘하는데 너는 여자한테 인기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