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91화 (91/180)

편린 (2)

"이쪽으로."

얼굴로 들이치는 바람을 오러로 보호하며 말했다.

나를 태우고 있던 투브가 내 지시에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뭐길래, 이렇게 급하게 나오는 건데?

"이민족들의 인신 공양 흔적이 또 발견됐어."

-그게 네가 직접 움직일 정도로 큰일이야? 지금 성을 공략하네, 마네 하더니?

"사실 내 생각도 내가 그쪽에 있는 게 맞긴 한데, 지금 발견된 흔적은 기존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검은늑대 기사단과 붉은방패 기사단을 따로 분리해 주위의 이민족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찾으라고 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그동안에도 남쪽으로의 진군은 계속 이루어져 현재 우리는 리벤트 지방 아래에 있는 크팅이라는 이름의 백작령의 마지막 성 하나를 두고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성만 넘어가면 남부에 있는 공작령 둘 중 하나인 리히트 공작령에 진입할 수 있기에 우리 측에서도 연일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었고, 남부 측의 다른 귀족들이 보낸 지원군과 용병들이 연일 성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첩보도 들려왔다.

제국 남부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두 왕국인 나시와르와 툴리앗의 병력이 크팅 성에 합류한 것도 관측되었다.

1황자의 의지인지 리히트 공작이나 에베 공작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외세가 제국의 일에 끼어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시와르와 툴리앗, 두 왕국과 1황자 세력 간의 동맹을 주도한 것이 스와라 위샤인의 아버지인 홈 위샤인 백작이라는 소문이 전해졌다.

내 아래 참모들과 다른 귀족들은 위샤인 백작이 무슨 줄이 있어 왕국을 둘이나 끌어들일 수 있었겠냐면서 소문의 진위를 의심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되돌아보면 지난 삶에서 위샤인 가문은 절묘한 외교적 처세와 줄타기로 자신의 세를 불린 가문이었다.

중립인 척하면서 분리 운동을 지지하는 척, 분리 운동을 탄압하는 척 능글맞은 처세를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미 다른 왕국들과는 밀수나 용병 장사 등으로 줄을 터놓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추측의 영역이긴 했지만 내가 아는 위샤인 가문, 그중 스와라 위샤인은 그렇게나 간교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홈 스와인 백작은 스와라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니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었다.

여하튼 이 과정을 통해서 홈 위샤인 백작은 현재 남부에 있는 1황자파 귀족 세력 중 실세로 떠올랐다고 봐도 좋을 것이었다.

내가 우려했던 위샤인 가문의 부상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스와라 위샤인이 내 또래이니 따라서 그녀의 아버지인 홈 위샤인이 4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의 나이일 것이다.

한창때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직 작위를 물려주기에는 먼 나이이기에 스와라 위샤인이 본격적으로 활개 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큰 위안이었다.

멀리 검은 갑옷과 붉은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늑대 기사단과 붉은방패 기사단이 틀림없었다.

그들 앞에는 이민족들이 인신 공양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있었다.

일전에 목격했던 것보다 더 크고 울창한 나무에 시체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전 것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눈에 띄었다.

며칠 전에 목격했던 괴기스러운 조형물은 나무에 시체가 걸려 있는 것이 전부였던 반면, 지금 앞에 놓인 것은 나무 주위에 복잡해 보이는 거대한 마법진과 술식이 그려져 있었고, 마법진 내부에 이민족의 복색을 한 사람들이 마치 피가 모두 빨린 미라처럼 바짝 말라 쓰러져 있었다.

더 가까이 가니 강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치 고고히 흐르는 거대한 강처럼 장대한 마나의 흐름이었다.

칼이 내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된 거죠?"

"각하께서 내리신 명대로 주위를 탐색하면서 이런 구조물과 이민족 들을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처음에 목격되었던 것을 포함해서 총 다섯 개의 구조물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구조물들은 특이한 점이 없었는데 이 구조물만 이렇게 시체와 마법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칼이 나무 주위에 넓게 펼쳐진 마법진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파지직!

검은 불꽃이 튀며 칼의 발이 밀려 나왔다.

"이렇게 밀려 나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진입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마법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누군가 뒤에서 대답했다.

"거대한 소환진의 일종 같은데, 자기 수준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답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붉은방패 기사단의 책임자로 내려와 있는 팔크였다.

50기의 붉은방패 기사단과 함께 황실 마법사 하나가 내려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 황실 마법사의 의견인 듯싶었다.

팔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진입을 막는 마법은 아래에 깔린 마법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안에 있는 마법사가 인위적으로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게 복잡한 마법이라면서 대체 안에 있는 마법사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더군요."

팔크가 손을 들어 나무 근처를 가리켰다.

나무 아래에 사람 하나가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마나가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고고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마법진에서 만들어지는 기운을 억지로 억누르려는 느낌이 났다.

분명 마법사일 텐데도 뒤에서 보는 그의 옷차림은 군복도, 귀족의 복식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의 옷이었다.

이 기묘한 구조물과 마법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가 내가 전장을 두고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펑!

들고 온 빗자루와 빗을 땅에 내려놓자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로 변했다.

인간보다 더 오랜 기간 마법을 다뤄 온 도깨비들이니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데리고 왔다.

둘은 황실 마법사와 함께 마법진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들이 마법진 안으로 진입하려고 해도 역시나 검은 불꽃과 함께 밀려 나왔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본 도깨비 둘이 내게 와서 말했다.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어유. 말이음이 님도 느껴지시쥬? 마치 벽이 있는 것 마냥 분리되어 있는 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와 황실 마법사가 마법진 주위에서 마법을 썼을 때, 당연히 공기 중의 마나가 그들 근처에서 마법으로 변환되었다.

그러나 마법진의 안쪽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마나의 흐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녀유. 저 사람 자세히 한 번 봐 보셔유,"

벼랑구른돌의 말대로 안쪽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본 나는 깜짝 놀랐다.

앉아 있는 남자의 몸은 지면으로부터 미세하게 떠 있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마치 지면에 있는 것처럼 안정된 자세였다.

"몸을 띄우거나 잠시간 비행을 하는 건 어렵지 않은 마법이지만 그렇게 왜 안 하는지는 아시쥬?"

공중 부양이나 비행은 비교적 간단한 기초 마법이지만 본인의 몸을 띄우는 것은 실생활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마법이었다.

한 번 구현되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마나를 이용해 주위 기류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술식이 복잡해지고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한평생 비행 마법을 연구한 마법사들도 30분 이상의 비행을 권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툭 하면 저택 안에서 둥둥 떠다녔던 캐슬린이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저렇게 공중에 몸을 띄운 것이 얼마나 되었죠?"

"저희가 이곳을 발견한 것이 최소 4시간은 되었습니다. 게다가 마법진을 따라 주위를 돌아도 저 사람의 등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팔크의 말이었다.

추측이 맞는다면 마법진이 가동되려는 것을 막으면서 주위에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결계와 비슷한 마법을 만들고 정체 노출을 피하고자 인식에 혼란을 주는 마법까지, 각각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법 셋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속세에 이름을 감추고 살아가는 은거 기인 마법사가 아닐까 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때 황실 마법사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기사단과 같이 다녀 본 결과, 다른 네 곳의 구조물은 마나의 흐름을 이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래에 그려진 마법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마나와 많은 제물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법사의 시선이 마법진 안쪽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미라와 같은 이민족의 시체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일련의 규칙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법진을 발동하는 매개체는 시체나 피가 아닐까 싶은데, 저희의 추격으로 주위에서 인간을 잡아 올 수 없게 되자 아마 자신들을 제물로 바쳐 마법진을 가동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법진이 어떤 마법을 발동하려 하는지는 알 수 있나?"

"저희와 마법의 체계가 달라 파악이 어렵습니다. 조악하고 위태롭게 설계되어 있어 사실 이걸 마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소환진 같기는 한데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바꿔야 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인신 공양을 통해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끔찍한 것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걸 저 안에 있는 마법사가 막고 있는 거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렇습니다."

"밖에서 마법진을 해지할 수는 없는 건가?"

마법사가 굉장히 곤란한 얼굴을 했다.

"마법진 자체의 가동 방식도 굉장히 낯선데 안에 있는 마법사가 그 위에 여러 마법을 덮어 씌워 놔서 꼬일 대로 꼬였습니다. 어렵습니다."

황실 마법사는 실력과 지위 모두 마법사 사회에서 최상층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에서도 조금씩의 실력 차이는 있겠지만 이 시대에서 이 마법사 이상 가는 마법사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법사가 어렵다고 했으니 외부에서 인위적인 힘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내게는 주위 마법의 위력을 약화하는 변환 인자가 있었다.

개의 모습으로 변한 투브를 데리고 천천히 마법진 쪽으로 걸어갔다.

마법진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주위의 마나 흐름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힘차게 흐르는 강처럼 흐르던 마나가 마구 요동쳤다.

마법진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만들던 마법이 변환 인자 덕에 힘을 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여파로 돌풍이 마구 휘몰아쳤다.

그때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법진 곳곳에 쓰러져 있던 이민족들이 한 줌 검은 물이 되어 사라졌다.

검은 물은 복잡하게 그려진 마법진의 선과 문양을 메우면서 빠르게 흘렀다.

순식간에 검은 물이 마법진을 메우자, 마법진의 중심에 있던 나무 위 허공에 검은 원이 생겼다.

그어어어어!

원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소름 끼치다 못해 마음을 꺾어 버릴 듯 깊고 음침했다.

마구 요동치던 마나가 그 검은 원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마법진 안쪽으로 넣어 보았다.

검은 불꽃은 튀지 않고 나를 밀어 내는 것도 없었다.

그어어어어어!

다시 한번 음습한 소리가 원에서 밀려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 세상 어떤 생명체의 팔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징그럽게 생긴 손이 튀어나와 원과 허공의 경계를 꽉 움켜쥐었다.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경계를 짚고 힘을 주어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모양새였다.

-사령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토악질 나는 냄새야.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투브가 말했다.

-지금 돌려보내야 해. 저게 여기에 나왔다 가는 끔찍한 일이 펼쳐질 거란 직감이 들어.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검은 원에서 다른 손이 뻗어 나와 다시 한번 원과 허공의 경계를 짚었고, 이미 나와 있던 손은 어깨까지 밀려 나온 상황이었다.

원에서 뻗어 나온 손이 허공을 마구 휘저었다.

원 바로 아래 있던 나뭇가지들이 피인지 뭔지 모를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에 닿아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나무 아래 앉아 있던 남자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쉬익.

내가 날려 보낸 날카롭게 만든 바람이 남자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던 나무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나무 아래의 남자는 여전히 앉아 있기만 할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걸 본 기사와 마법사, 도깨비가 마법진 안쪽으로 들어오려 했다.

"오지 마!"

나는 변환 인자가 있어서 마법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가 되고 투브는 영수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일단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손에서 마나 소드를 만들어 냈다.

오러를 운용해서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며 나무를 향해 접근했다.

투브는 이미 앞서나가 허공을 휘젓는 무언가의 팔목을 물어뜯는 중이었다.

검은 원이 허공에 있었기에 나무를 딛고 뛰기 위해 앉아 있던 남자의 곁을 지나면서 나는 슬쩍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자는 평안한 표정으로 앉아 가슴 앞에서 손을 모아 수인(手印)을 맺고 있었다.

은퇴한 노마법사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는 생각보다 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었다.

-피해!

크아아아아!

잠시 남자의 얼굴에 놀라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 머리 위로 무언가의 손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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