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3)
마나 소드를 들어 나를 향해 떨어지는 무언가의 손을 마구 베어 냈다.
잘려 나가는 느낌이 아닌, 무언가 끈적거리며 엉겨 붙는 느낌이 마나 소드를 통해 전해져 왔다.
미친 듯이 마나 소드를 휘두르고, 짬짬이 불과 바람을 만들어 막아 내 보려 했지만, 무언가의 손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대로 나와 옆에 있는 남자를 짓뭉갤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뒤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저벅.
여전히 가슴 앞에 수인을 맺고 있는 남자가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남자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일렁이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심한 욕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 남자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고 아직 가슴 앞에 있는 왼손의 수인을 바꿨다.
나와 남자의 머리 위에 빠른 속도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가공할 정도로 빠른 속도에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이, 이건……."
찰나라고 해도 좋을 순간에 마법진이 완성되고, 몇 개로 분열하며 각기 다른 술식을 그려 냈다.
콰앙!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무언가의 손바닥이 그대로 머리 위의 마법진과 충돌했다.
마법진에서 번개와도 같은 불꽃이 피어올라 무언가의 손바닥을 태워가기 시작했다.
검은 손이 머리 위에 펼쳐진 마법진 중 하나를 움켜쥐자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마법진이 그대로 소멸했다.
남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충분한 제물을 받았다는 건가, 악독하군."
여전히 눈에서 푸른 안광을 흘리고 있는 남자가 재빠르게 왼손의 수인을 몇 번 바꾸자 들고 있던 오른손 위에서 마법진 몇 개가 다시 전개되더니 거대한 검은 손을 봉쇄하는 형태가 되었다.
허공에서 정지한 검은 손의 팔뚝 부근을 투브가 달려들어 물어뜯어 끊어 내 버렸다.
투브를 본 남자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크아아아악!
다시 한번 검은 원의 안쪽에서 음침하고 거대한 비명이 퍼져 나왔다.
처음 들을 때보다 더욱 가까이서 들리는 것을 보아 본체가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투브가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지면에 착지했다.
검은 팔의 절단면에서 촉수가 뿜어져 나와 떨어져 나간 부위를 이으려는 것이 보였다.
몇몇 촉수는 옆으로 뻗어 나와 팔을 감싸고 있는 마법진과 부딪쳐 타 버렸다.
"흡!"
남자가 계속 수인을 바꾸자 잘린 검은 팔을 감싸고 있는 마법진들이 더욱 밝게 빛나며 조여들었고, 마침내 엄청난 빛과 폭음이 발생하면서 팔꿈치 아래로 잘려 있던 검은 팔의 잔해가 사라졌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나무 위의 검은 원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검은 원과 허공의 경계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무언가의 다른 쪽 손은 아직 건재한 생태였다.
남자가 내게 빠르게 말했다.
"기회는 단 한 번이오. 놈의 머리가 나타나는 순간, 내가 만들어 준 발판을 밟고 뛰어올라 미간에 마나 소드를 꽂으시오. 명심하시오. 놈을 막지 못하면 이 땅엔 재앙이 내리게 될 것이오."
내 뒤에 있던 투브가 놀라서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길래 마나 소드를 알아?
답해 주려는 찰나 검은 원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날카롭고 흉측해 보이는 두 개의 뿔이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가시오!"
남자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을 튀겼다.
순식간에 공중에 발판 몇 개가 등장했다.
재빠르게 발판을 밟고 뛰어올랐다.
내가 검은 원 아래에 도달했을 때는 무언가의 뿔은 이미 형체를 다 갖추어 밖으로 나온 상태였고, 얼굴의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마치 오물이 흐르는 것처럼 번들거리는 피부, 새빨갛게 빛나는 눈, 제멋대로 자란 것 같이 들쑥날쑥한 이,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독기와 끈적한 침까지, 당최 이 세상의 무언가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생김새였다.
데굴.
피같이 붉은 놈의 눈동자가 옆으로 구르더니 나를 향했다.
놈은 입을 쩌억 벌리고 괴악한 소리를 쏟아 냈다.
그어어어엌!
이놈을 막지 못하면 재앙이 내릴 거라는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직감이 강력하게 들었다.
있는 힘껏 몸 안으로 마나를 끌어들였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과 동시에 마나 회로가 후끈해지는 느낌이 순식간에 전신을 지배했다.
끌어들인 마나를 이미 만들어진 마나 소드를 향해 힘껏 밀어 넣었다.
우웅! 우웅!
무기에 오러를 밀어 넣는 것처럼 마나 소드가 공명하며 더욱 길어졌다.
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길이로 검신(劍身)이 늘어났으나, 무게는 마치 깃털을 쥔 듯 가볍고 내 몸의 일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질감이 없었다.
몸을 한 바퀴 돌려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의 얼굴을 그대로 베었다.
마나 소드는 정확히 놈의 양 눈동자와 얼굴을 그었다.
검은 손을 벨 때 느꼈던 끈적한 감각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크아아아아아!
목을 넘어 어깨까지 드러낸 놈이 입을 벌리고 다시 한번 포효했다.
벌어진 입에서 독기가 화악 밀려 나왔다.
숨을 참고 마나 소드를 몸 안쪽으로 끌어 붙였다.
'미간, 미간이다.'
지척까지 다가온 놈의 미간에 마나 소드를 찔러 넣었다.
눈동자 하나가 내 얼굴 정도의 크기일 정도로 거대한 놈이었기에 창처럼 늘어난 마나 소드가 미간에 쑥 밀려 들어갔음에도 마치 얇은 침이 꽂인 것처럼 보였다.
슈와아아아!
마나 소드를 뽑자 놈의 주위에서 마나의 흐름이 날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고, 공간이 뒤틀렸다.
일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마나가 격하게 난동을 부렸다.
"내려오시오!"
아래 있던 남자가 외쳤다.
내가 서 있던 발판이 붕괴하고 있었다.
아직 유지되고 있는 다른 발판을 밟고 재빠르게 내려왔다.
땅에 내려서서 위를 보니 미간에 작은 구멍이 뚫린 놈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은 원을 통해 몸이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잘했소."
나를 향해 말한 남자가 투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쓰마."
-엇?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나가 투브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털썩.
현기증이 일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걸 본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그런 것이었나? 잠시 쓰고 다시 넣어 두겠소."
남자가 다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에는 투브의 몸 안에 있어야 할 이타르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차원의 틈에 사는 부정한 것아,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돌아가거라."
그의 오른손에서 몇 개의 빛줄기가 생기더니 검은 원과 무언가의 몸을 감쌌다.
정신을 차린 무언가가 신음을 흘리고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빛줄기는 놈을 억지로 검은 원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마침내 원 안쪽으로 무언가가 사라지고, 빛줄기는 검은 원마저 삼켜 버렸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을 때, 나무 위의 허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깨끗해졌다.
남자가 오른손을 내렸다.
그리고.
타악.
손가락을 튀겼다.
그의 손에 있던 반지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마나가 투브에게 흘러가는 것이 멈춰졌다.
그가 뒤돌아서자 남자의 얼굴을 본 투브가 놀라서 말했다.
-이타르?
***
"그래서 시안은 어디로 간 겁니까?"
산탄다르 공작, 그레이스 바크하임이 팔짱을 낀 채로 참모들에게 물었다.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었기에 참모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시안에게 가슴을 베인 이후로 설설 기고 있는 링스톤 백작이 나서서 말했다.
"각하께서는 기사단이 발견한 이민족의 흔적에 잠시 갔다 오겠노라고 말씀하시고 잠시 그쪽으로 향하셨습니다. 말을 타고 두세 시간 거리에 있다 들었습니다."
그레이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안이 기사단을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직접 듣게 되니 더 부끄러웠다.
'한마디 말이라도 미리 해 주면 어디가 덧나?'
시안에게 성을 잔뜩 내고 나온 그날이 생각났다.
전장에서는 시안의 직위를 넘는 사람이 없다지만 그레이스 자신은 엄연한 공작이고 시안은 후작이었다.
상급자로나, 연장자로나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그레이스의 머릿속을 채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 그레이스는 생각했지만, 많은 군인이 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오러를 익히고 있어 해질녘의 어둠은 그들의 시야를 크게 가리지 못했다.
참모들은 군영에 돌던 '산탄다르 공작이 카몰 후작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소문에 각자 나름대로 방점을 찍었다.
그레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참모들을 질책했다.
"총공세는 오늘 밤이라고 들었는데, 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닙니까?"
"이미 다 지시해 두고 가셨기에 공성은 문제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4군단 72사단장, 제크 스카스발트였다.
고지식하고 절차를 따지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였으니,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모든 부대가 출격할 것이 틀림없었다.
제크도 그 사실을 그레이스에게 주지시켰다.
"사령관이 부재한 상태인 현재, 공작 각하께서 이 전장의 총 책임자이십니다. 명령만 하시면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덜컥 겁이 났다.
제국이 두 갈래로 쪼개진 다음, 그녀 역시 주위의 1황자파 영주들을 제압하느라 전장에서 제법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시안의 남부행에 합류한 지 한 달, 자신이 겪었던 전장들은 이곳에 비하면 어린아이 소꿉장난이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그레이스였다.
대군을 이끌고 가면 대개 항복하고 성문을 열던 게 산탄다르 주위의 영주들이었다.
자신은 그런 영주들을 날름 흡수해서 산탄다르 공작령으로 끌어들였을 뿐이었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뉴인 공작이 점점 영역을 넓히는 자신에게 제약을 걸까 봐 시안에게 미리 말해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정작 제뉴인 공작은 땅 넓히기보다는 1황자파 세력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어 연일 크고 작은 전투로 쑥대밭이 되고 있는 그랑베르트 공작령에 병력을 지원하느라 정신이 없긴 했다.
남부의 영주들은 근처에서 무력시위만 해도 문을 열던 산탄다르 주변의 영주들과는 달랐다.
악착같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아군의 목을 쳐 내기 바빴다.
멀리 보이는 크팅 성만 해도 위치가 좋기는 했지만 10만의 공격을 막아 낼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항복은커녕 성 안팎에 똘똘 뭉쳐 공격을 대비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이 많은 자들의 생사가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이 그레이스의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돌게 했다.
제크 스카스발트는 평생을 군인으로 산 남자였다.
비록 군인으로 살아 왔던 긴 시간 중 전장에 서 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시안과 함께했던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괄목한 성장을 이루어 냈다.
그의 눈에는 그레이스의 얼굴에 스쳐 가는 망설임이 보였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결정.
그것이 책임의 무거움이었다.
'그것 또한 각하께서 감내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그가 보기에 시안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안으려 했다.
항상 그런 모습만 보아 와서 당연시하고 있었는데, 공작인 그레이스조차 어려워하는 결정을 시안은 수도 없이 내려 온 것이었다.
제크는 새삼 나이에 맞지 않는 시안의 과감함이 굉장한 것이었음을 실감했다.
"후우!"
그레이스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눈빛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공작은 공작이라는 건가.'
제크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무렵, 그레이스의 입이 열렸다.
"공격을 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