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4)
크팅 성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너진 한쪽 성벽에 깔린 어느 병사의 손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거하게 한판하셨나 보네."
-어후, 아주 작살을 내 놨네. 산탄다르 공작 성깔이 보통이 아니더라니까.
알고 있다.
그러니 왕을 해 보겠다고 나선 것 아니겠는가.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던 로하나스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아군의 시체도 눈에 많이 들어왔다.
전쟁은 양측의 소모전이다.
피해가 하나도 없는 완벽한 승리는 곧 완벽한 거짓말이다.
"끄으으……."
가슴을 깊게 베인 아군 병사 하나가 성벽의 파편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베인 곳 근처의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해 가는 것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철그렁.
투브 위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딜 때 난 갑옷 소리가 울렸다.
병사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낮췄다.
눈에서 힘이 풀려 가는 병사가 간신히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나를 바라봤다.
"가, 각하……."
"출신 지역과 이름을 말하라. 그대의 가족들에게 유품을 전해 주겠다."
"푸헉!"
병사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몇 방울이 튀어 내 뺨에 묻었다.
로하나스와 오델리아가 그것을 보고 나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손을 들어 둘을 저지했다.
"카, 카몰 직할령의 눔바르트에서 온 일리아스입니다. 가족은 없습니다."
"그런가. 고생 많았다."
내 말에 병사의 표정이 잠시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색색거리는 가쁜 숨을 이어 가던 병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게 말했다.
"각하……."
"말하라."
"왜 그리 슬픈 표정을 하고 계십니까?"
일리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병사의 입 옆으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피가 차올라 그륵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만, 한 번만 웃어 주시겠습니까? 전쟁의 신이 제게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전쟁의 신이라.
웃기지도 않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병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간신히 뒤로 당겼다.
일리아스의 얼굴이 충만해졌다.
"아아, 이제 마지막인가 봅니다."
"일리아스, 그대가 있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덧없는 희생이 되지 않게 노력하겠다."
내 말이 끝났을 때, 일리아스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손을 올려 그의 눈을 감겨 주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손가락에 감겨 오는 질척한 감각에서 스러지는 생명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말에서 내려 걷는다. 구하지 못한 목숨들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다."
칼과 팔크를 필두로 검은늑대 기사단과 붉은방패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크팅 성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있건 없건 이겼을 싸움이다.
그런데도 내가 있었더라면 하나라도 덜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후우!"
크팅 성의 연회장에서 깊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던 것이 아침 무렵이었는데 어느새 창밖으로는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 앞에는 많은 서류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전투 상황 보고와 적의 추후 동향, 전후처리 등을 결정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분투했던 흔적이었다.
"멀리서나마 전투를 봐야 했어."
눈으로 보지 못한 전투를 글과 그림으로 보려니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 서류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끄아아아."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와 팔을 쭉 펴서 굳은 몸을 풀었다.
무슨 일이든 벌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마무리하고 수습하는 것은 지루하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대충 했다가는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끼이익.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갑옷이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네발 동물이 걷는 소리가 들렸다.
투브와 누군가가 같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참모들과 기사들이 드나들고 있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누구?"
"바쁘신가 봅니다?"
낯익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걸맞지 않은 낮선 말투였다.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 나는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각하."
산탄다르 공작이었다.
그렇게 하지 말래도 줄곧 반말을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뒤통수가 쭈뼛 섰다.
"좀 마무리가 되어 가나 싶어 왔는데 아직인가 봅니다?"
"거의 끝났습니다. 심경의 변화라도 겪으셨던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제가 아는 공작 각하가 맞나 싶습니다."
그레이스가 빙긋 웃고 내 앞에 앉았다.
"심경 변화라면 심경 변화지요."
그녀의 갑옷 어깨 부분에 급히 닦아 낸 듯한 흙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합류한 이후에도 그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 있었다.
오늘도 최전선에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동안 겪은 전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니 뭔가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항상 말로는 상호 존대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녀가 격식을 차리니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상황이 재미있어 나도 살포시 웃고 물었다.
"듣기는 좋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칼에게 들었습니다. 이민족들이 인신 공양을 하는 곳에 가셨다가 고생을 하셨다고요."
"예상치 못한 일은 항상 벌어집니다. 게다가 전쟁 중에는 그 빈도가 잦지요. 감사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하의 생각처럼 민간인들을 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선을 그었다.
그녀의 호의를 받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추후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위험이 있었다.
내 의도를 확실히 전해야 했다.
"근처까지 수색했으나 더 이상의 인신 공양 흔적은 없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민족들이 주위 민가나 야산으로 숨어들었을 수도 있지만, 1차적인 목표는 달성했기에 저는 병력을 물렸습니다.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나는 정면으로 자신의 의견을 반박한 셈이었으니 한마디 타박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건만 의외였다.
"그대의 다른 뜻이 있었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제가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전혀 다른 분이 되어 나타나셨습니다."
그레이스가 웃었다.
입과 소리는 웃고 있으나 눈과 시선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대의 시선으로 전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시간 동안 그대가 겪었던 중압과 고뇌를 얕게나마 체험했습니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거였나.
나는 이전 생부터 항상 느껴온 것이라 이제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는데 그레이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의도치 않게 그녀를 한 단계 성장시켜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또 듣기로는 그곳에서 굉장한 마법사를 만났다고 하던데, 그는 누구고 어디 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사라졌습니다."
강아지의 모습으로 내게 안겨 있던 투브가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나와.
'그럼 그 사람이 잊힌 대마법사 이타르고 어쩌고저쩌고 줄줄 이야기할까?'
나와 투브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들을 수 없는 그레이스는 고개를 든 투브가 마냥 귀여운 듯 한 번 보고 계속 말했다.
"황실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그 마법사가 펼친 마법은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라던데 그게 가능합니까?"
"저야 모르지요."
"마법을 쓰실 줄 아시지 않습니까?"
"운이 좋아 능력을 얻었을 뿐 조예가 깊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마법사 덕에 이 땅에 괴물 하나가 탄생하는 걸 막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묘하군요."
그레이스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종이 살그머니 들어와서 켜 놓은 촛불이 일렁이며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레이스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나는 한쪽으로 밀어 두었던 서류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투브가 탁상에 턱만 올려놓고 말했다.
-인간들은 참 복잡하게도 살아. 이기고 졌으면 끝인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어쩌겠어? 아직 완벽히 이긴 게 아닌데.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아직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니니까.'
그렇게 서류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종이가 밀려 나가 탁자 아래로 떨어져 그레이스의 발 언저리를 스쳤다.
여전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레이스가 놀라 일어섰다.
"이런! 미안합니다. 바쁘신데 방해했습니다."
내 짧은 목례를 받은 그레이스가 일어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손을 들어 연회장 문을 향해 마법을 썼다.
철커덕.
문에 자물쇠가 걸렸다.
"이제 올 사람 없을 겁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레이스가 미처 밀어 놓지 못한 의자에 사람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청춘들 사이를 한참 늙은이가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오."
"쓸데없는 소리."
-이타르!
투브가 내 품에서 껑충 내려가 이타르의 옆으로 가서 붙었다.
이타르가 자연스레 투브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에 올려놨다.
저 녀석이 남자한테 저러는 걸 볼 줄이야.
강아지 모습의 투브를 안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로하나스가 보면 절망에 빠질 광경이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를 했소?"
"거, 하오체 좀 어떻게 안 됩니까?"
이타르의 기억과 초대 황제의 기억을 통해 이타르의 모습과 말투를 본 나는 무슨 고승(高僧)처럼 득도한 것 같은 말투를 쓰는 이타르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이해는 해 줘, 너는 나를 만났지만 나는 너를 처음 보는 거니까."
"감안하죠."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검은 원을 없앤 후, 이타르는 투브와 자신의 반지 그리고 내게 흥미를 가졌고 먼저 이야기를 좀 나누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는 한눈에 내 몸 안에 변환 인자가 있음을 파악하고, 내가 자신과 같은 마검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기 전에 재빠르게 이타르에게 당신이 남겨 둔 기억을 봤으며, 초대 황제와의 만남을 통해 아직 황제가 되기 전 레인 서비어와 당신이 만났던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놀라워하며 대화를 더 이어 가고 싶어 했으나 그의 엄청난 위용을 목격한 눈이 많았기에 당장은 곤란하다고 했고 모습을 감추고 나를 따라오면 조금 정리가 된 뒤에 부르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즉시 이타르의 모습이 사라졌는데, 마치 공기가 되어 버린 것처럼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다.
황실 마법사의 말을 빌리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자신을 잊을까 봐 몇 시간 간격으로 어깨를 톡톡 치고 있었다.
만약 적이었으면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나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마법사라는 칭호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마나가 잠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이타르에게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그가 남긴 책에 담겨 있던 그의 기억에게 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내 앞에 있는 이타르의 모습이 노인이 아니라 그의 기억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배경만 바뀐 채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제법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내가 이타르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아텟신교라는 종교 집단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타르의 대답은 내 이마에 힘줄이 솟게 만들었다.
"내가? 그게 나랑 관련 있다고?"
이 노인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