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94화 (94/180)

편린 (5)

어금니와 관자놀이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을 꾹 참았다.

참자, 참자.

상대는 마음만 먹으면 몇 번이고 나를 먼지로 만들 수 있는 대마법사다.

"장난치지 마시고요. 진지합니다. 당신이 싼 똥…… 아니, 남겨 두고 간 것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내 말에도 이타르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텟신교라는 사교 집단이 있다는 것은 들었어. 그런데 그게 나와 관련이 있다니? 나는 모르는 일이야."

답답한 일이었다.

내가 직접 사제라 불리는 마법사와 대면하지 않았던가.

"저는 사교의 핵심 인물과 직접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물이 행했던 기적에 가까운 마법은 당신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 오러를 없애는 감자를 만드는 것이 당신 아니면 누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젠장……."

이타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순간 하나의 가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당신이 남겨 놓은 책에서 내가 만났던 당신의 기억처럼 당신도 본체가 아닌 겁니까?"

이타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공허하고 슬픈 눈이었다.

몇 초 사이에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어?"

실제로 그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눈가에 주름이 많아지고 있었다.

머리가 길어지고 수염이 덥수룩해졌다.

허리가 굽고 손목이 비쩍 말라 들어갔으며 손이 덜덜 떨렸다.

이타르의 변화에 놀란 투브가 바닥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노인이 된 이타르의 모습이 다시 급속히 어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 헐렁해질 정도의 어린아이가 되어서야 급격한 변화가 멈추었다.

스테판 유제프의 역행 마법도 저렇게 극적으로 시간을 되돌리진 못한다.

초월적인 마법을 목격 중인데도 마치 그의 신체는 이 세계와 단절된 다른 공간에 있는 듯 마나는 일절 움직임이 없었다.

"후!"

어느새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다시 내가 알고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타르가 길게 숨을 내뿜었다.

"미안, 생각이 형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꿀꺽!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긴장하지 마, 너한테는 어떤 피해도 없어. 일단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는 '본체'가 맞아. 네가 걱정하는 분신들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죠?"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야."

"잠깐만요! 분신들? 정말로 그 책 속에 기억 같은 걸 여럿 만들었어요?"

넘겨짚어 물어본 것인데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 걸려 나왔다.

이타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왜죠?"

"할 일은 많은데 내 몸은 하나니까."

"제가 경험한 것에 의하면 그 분신들도 자아를 가지고 있던데요, 당신과 연결된 것 같지도 않았고요. 심지어 당신의 기억은 저를 가차 없이 압도하기도 했어요. 너무 위험한 행위 아니에요?"

"왜? 그 분신들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세계를 파괴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 돼? 꽤 소년 같은 면이 있네? 옆에서 본 바로는 그런 것 같지 않던데. 의외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타르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야, 농담. 표정 좀 펴. 각 분신은 목적을 마치면 사라지게 해 놨어, 너도 체험해 봤을 것 같은데?"

순간 그 공간에서 빠져나오면서 마주쳤던 다른 선택들의 내가 떠올라 흠칫 몸을 떨었다.

대체 그곳은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질 것 같았기에 일단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일종의 제한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셈이야. 그걸 자아라고 불러도 될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이상 없이 각자 목적을 마치고 사라졌을 거야."

"믿기 힘들군요."

"예상은 했지만, 의심이 지독하구나?"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이타르가 둘이 되어 있었다.

앉아 있는 이타르가 말했다.

"내가 본체."

이번에는 옆에 서 있는 이타르가 말했다.

"내가 분신."

이번에는 둘이 동시에 말했다.

"보여 줄게."

앉아 있는 이타르에게서 다른 이타르가 천천히 분열되어 나오더니 서 있는 이타르의 옆에 가서 섰다.

이타르가 셋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이제는 셋이 입을 모아 말했다.

"한 번 더."

다시 같은 광경이 반복되었다.

이제 네 명의 이타르가 내 눈앞에 있었다.

투브도 고개를 돌리면서 각 이타르의 얼굴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혀 구분이 안 돼……. 이건 그냥 같은 사람 넷이 있다고 해도 믿겠어.

"한 번……."

다시 똑같은 걸 반복하려는 이타르를 급히 막았다.

"잠깐만요! 이걸 왜 보여 주는 건데요?"

그러자 서 있던 이타르의 분신들이 앉아 있던 이타르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입이 열렸다.

"분신들은 마법을 사용할 당시의 내 기억을 가져가서 내가 사용하는 마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 그런데 딱 한 가지 마법은 사용할 수 없어. 그게 나와 분신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야. 뭔 줄 알겠어?"

"……분신이 다시 분신을 만들 수는 없군요."

"정답! 바로 알아챌 줄 알았어. 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내가 본체라는 거지."

"그렇다면 사교를 만든 것은 당신의 분신이었나요?"

분신이었고 목적을 달성해서 사라졌다고 하면 본체가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렇지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이타르가 물었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그 사교를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지? 안타깝지만 네 추측은 틀렸어, 그건 내가 맞아. 분신이 아니야."

"아까는 기억 못 한다면서요!"

"그것도 맞아. 기억이 안 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장난하려면 나중에 하세요."

내 언성이 높아졌지만 이타르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무슨 목적이 있던 건 아닐 거야. 굳이 목적이라는 이름을 붙이자면 그 마을에서 조금 쉬어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타르가 웃었다.

씁쓸하고 아련한 웃음이었다.

"나는 조금씩 기억을 잃고 있어."

책 속에 있던 이타르의 분신이 말했었다.

-본체의 건망증이 좀 심해지긴 할 건데, 괜찮을 거야. 나는 머리가 좋아서 잊어버린 것도 금방 기억해 내거든.

"설마 그 건망증이라는 게……?"

"너한테 그런 얘기도 했어? 하여튼 입이 방정이야."

이타르가 문 쪽을 살폈다.

"정말 아무도 안 와? 같은 마검사를 만났으니 내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그런데."

"누가 온다고 해도 저보다 훨씬 빨리 알아챌 것 같은데, 아닌가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이타르가 손가락을 튀겼다.

나와 이타르 앞에 주석 잔이 생겨났다.

잔 안에는 술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야기라는 안주가 있으니 술이 있어야지."

이타르가 잔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나도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부딪치고 안의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향긋한 과일 향과 알싸한 술 향이 같이 느껴졌다.

내려놓은 잔에는 어느새 술이 다시 차올라 있었다.

"크으! 먼저 하나 물어보자. 내가 마법 도서관을 어디에 만들었을까?"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낸 이타르가 물었다.

"왜 한 단계를 생략하시죠?"

"……."

"'만들었을까? 만들지 못했을까?' 이 질문이 선행되어야 맞는 것 같은데요."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만들지 못했군요."

"말은 바로 해. 만들지 않은 거야."

"왜죠?"

"의미가 없다고 느꼈거든. 내가 세상 모든 마법을 다 모아서 한 곳에 둔다 한들 그것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그냥 작은 자기만족이잖아."

"인간은 그 작은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알아,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야."

다시 잔을 들어 술을 털어 넣은 이타르가 나를 바로 보고 말했다.

"시안, 나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어. 그리고 세계 곳곳을 다녔어. 오직 세계의 마법을 다 모으겠다는 허상에 가까운 꿈을 가지고 말이야. 다양한 곳에서 발현하는 다른 양식들의 마법을 발전시키기도 했고, 사특한 마법은 막기도 했지. 너와 만났던 그 나무 앞에서처럼 말이야."

이타르는 마나가 어두운 기운을 띠는 것을 알아채고 범상치 않은 소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리를 잡은 거라 했다.

내가 접근해서 그가 만들어 둔 결계가 옅어지자 결국 소환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자신만 있었다면 그곳에서 꼬박 일주일은 있었어야 할 것을 내가 와서 몇 분 만에 마치게 되었다고도 했다.

"엄청난 시간 동안 나는 항상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어. 내 근원이고 뿌리니까. 인간이라는 자체를 사랑한 걸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인간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되었지. 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고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그런 거……. 음, 뭐 대충 의미는 알겠지? 여하튼 이런 경지에 오르고 보니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까……. 회의가 들었어."

그리고 그가 나를 가리켰다.

"네가 입고 있는 그 갑옷. 지겹도록 봐 왔어. 장소, 얼굴, 무기, 갑옷만 다를 뿐 인간들은 항상 싸워. 못 싸워서 안달이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바라보기보다는 타인의 것을 탐하기에 바쁜 게 인간이야. 나는 그걸 보고 있기 힘들었어. 그래서 되도록 인간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어. 내 정체를 감추고 말이야. 내 전력을 내면 사람들은 나를 괴물로 보더라고. 그렇게 사람들을 돕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분신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

"그런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냥 정체를 드러내고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왕이 된 세상을 바라? 마법사왕 이타르? 그렇게 내 발아래 세계를 두고 마법으로 통제되는 세상을 만들면 그걸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통제와 감시, 억압으로 만들어진 억지야.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어. 그건 자유 의지를 억누르는 것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아. 인간들 스스로 가능성과 잠재성을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길고 긴 시간 동안 인간들은 달라지지 않았어. 악한 자가 선한 자를 죽이고 비열한 자가 선량한 자를 강탈했어. 이번에는, 이번에는 다르겠지 하고 몇 번이고 역사의 뒤에서 최소한의 도움을 주며 지켜본 것이 수백 수천 번이야. 하지만 결국엔 서로를 죽이기 시작하더라.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는지도 몰라. 인간은 서로 경쟁하고 싸우며 발전하게 되어 있는데, 내가 그 물줄기를 억지로 바꾸려 하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이타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강박이었는지도 몰라, 선민의식이었는지도 모르지. '나만이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어!' 하는 되도 않는 알량한 자만이었을까? 나는 이제 지쳤어. 나이만 노인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정신도 노인이 되었나 봐.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어,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해. 그런데 그거 알아? 한 가지 목표에 오랫동안 전심전력을 쏟았는데 그 목표가 사실은 원래부터 안 되는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배되는 때에 오는 그 공허감? 처음에는 인정할 수가 없었어. 그런 공허감이나 허무감을 내가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다시 세계 곳곳을 다녔어, 여행은 잡생각을 떨어지게 해 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걸 깨달았어.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가지는 분신 마법의 부작용이었던 거지. 사라진 분신들과 함께 내 기억들이 조금씩 날아가고 있더라고."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연신 술로 목을 축이는 이타르와 달리 나는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입을 댈 틈도 없었다.

"나를 과신했던 거지. '건망증 정도야.' 하면서. 그런데 기억은 톱니바퀴 같은 거야. 어떤 기억이 다른 기억과 또 다른 기억을 잇는 톱니인 거야. 그리고 그 톱니들이 맞물려서 움직여 한 사람이 이루어지는 거지. 작은 톱니가 사라지면 그것과 연결된 큰 톱니들이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해. 지금도 내 안에서는 톱니들이 사라지고 있어."

고통스러운 이야기였다.

길고 긴 고뇌와 외로움, 절망을 견뎌 온 초월자의 고백이었다.

나는 감히 그의 이야기에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너와 내가 돌려보냈던 그 괴물 기억해? 모르긴 몰라도 소환이 됐다면 이 땅은 쑥대밭이 됐겠지?"

"그, 그렇겠죠."

"솔직히 말할게. 나는 그 괴물보다 더 강해. 세계의 기원에서부터 종말까지 통틀어 봐도 나보다 마법에 정통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것도 그렇겠죠. 근데 그게 왜……."

"나는 두려워. 기억이 점점 사라져서 내가 인간이라는 뿌리를 사랑했던 것을 잊는 날이 오는 것이 너무 두려워. 회의와 절망만이 남은 내가 이 세계에 무슨 짓을 할까?"

뒤통수에 소름이 쭈뼛 올랐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불벼락이 내리고 땅이 뒤집혀 도시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재앙이라는 말로는 차마 다 담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타르가 다시 술잔을 쭉 비웠다.

"누구도 두려워 해 본 적 없는 내가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니 재밌지? 나는 이제 지쳐 버렸어. 그래도 한쪽으로는 후련하기도 해. 짐을 내려놓았으니까."

"무겁네요."

"너무 그렇게 듣지는 마. 그래도 두 가지 목표 중에 하나는 이뤘잖아."

이타르의 목적은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마법 도서관을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과 같은 마검사를 만나는 것.

"직접 보니 어떤가요?"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 아주 좋아."

"스승으로 모셔야 할까요?"

"스승이라…… 나쁘지 않네. 그럼 제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이어지는 이타르의 말에 나는 놀라서 일어나느라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쏟고 말았다.

"나를 죽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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