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6)
이타르의 말에 나는 쏟아진 술잔을 바로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엎어진 술이 탁상에 놓여 있던 서류 끄트머리를 적시고 나서야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반문할 수 있었다.
"……왜죠?"
"그게 내가 괴물이 되는 것을 막는 길이니까."
"제가 그걸 거부할 수도 있는 건가요?"
"나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어. 하루하루 기억의 조각들이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것이 일상이야. 이 상태로도 몇십 년을 버틸 수도 있겠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나를 잃고 인간을 죽이려 들지 몰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 줘."
"스스로 소멸할 수는 없는 건가요?"
"잔인한 얘기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네?"
그리고 이타르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퍼억!
이타르의 머리통이 깨지면서 피가 튀었다.
-뭐야!
예기치 못한 상황에 꽤 멀리 앉아 있던 투브가 질겁하며 내 쪽으로 달라붙었다.
나도 이 당황스러운 사태에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머리에서 튄 피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치 연기처럼 변하면서 그의 머리로 되돌아갔다.
마나가 스르륵 움직이며 그의 몸을 원래대로 복구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머리 윗부분이 다 달라붙지 않은 채로 이타르의 하관이 움직였다.
"말했지? 신은 아니지만 인간도 아닌 그 무언가라고? 굳이 비교하자면 나는 마나에 가까워.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마나와 가까이 지낸 탓이지. 지레 겁먹지는 마, 적어도 천 년 이상 변환 인자를 가지고 있어야 이렇게 되는 것 같거든. 별일 없으면 너는 일반 사람보다 오래 살긴 하겠지만 나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은 이타르가 말했다.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된 거야. 마나가 죽는다는 소리 들어 봤어?"
후룩.
이타르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거의 강박적으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할게. 나를 흡수해서 마나 소드로 만들어서 날려 보내 줘. 시안,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
"……니다."
"……할까요?"
"……지시를. ……각하?"
정신이 훅 들었다.
"어?"
야전 막사의 긴 탁상에 둘러앉은 참모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혀 있었다.
그레이스가 나를 보고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충실히 부관 역을 수행하고 있는 로하나스가 재빨리 옆에서 상황 정리를 했다.
"리히트 공작의 사절이 와 있습니다. 접견하시겠습니까?"
"어……. 공식적인 사절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말을 듣던 그레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배신이라도 할 셈인가 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다시 시선을 로하나스에게 돌렸다.
"저쪽 진영에 침투한 첩자들 중 아직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
"있습니다. 게다가 상류층 귀족들 중에도 뒤로 접촉 의사를 밝히는 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의 위엄과 각하의 위용에 겁을 먹은 것이겠지요."
"좋아. 사절의 접견은 거부하고 남부군 사이에 침투한 첩자들에게 나와 리히트 공작이 결탁했다는 소문을 뿌려. 리히트 공작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일주일 뒤, 리히트 공작에게 사절을 보낸다."
"그럼 병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곳에서 대기한다. 진군 시기는 일주일 후, 다만 일주일보다 짧아질 가능성도 있으니 긴장은 풀지 않도록 해. 이상."
하나둘 막사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밖으로 나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살펴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바다라고 착각할 정도의 거대한 폭의 강이 흐르고 있고, 발시안을 비롯한 안즈의 해양 도시들에서 건조된 함대가 합류해서 정박해 있었다.
제국의 많은 강 중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세파라트 강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파라트 강을 경계로 리히트 공작령과 크팅 백작령이 갈린다.
제국에 단 일곱밖에 없는 공작의 영지에 발을 들이기 일보 직전이었다.
게다가 남부의 에베와 리히트 공작은 황실의 핏줄이었다가 갈라져 나온 공작들이니만큼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다른 영주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물자와 인력을 동원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결국 이기적인 귀족들의 집합체.
이합집산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상황만 봐도 몰래 우리에게 전향 의사를 타진하는 남부군 귀족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얕은 신뢰로 무슨 전쟁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들에게 불신의 씨앗을 뿌려 각개격파 할 심산이었다.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는다면 몇 달 내에 남부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잠이라도 설치십니까? 요새 부쩍 집중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뒤에서 나타난 그레이스가 내게 물었다.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고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사령관으로서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레이스를 남겨 놓고 먼저 개인 막사로 들어왔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타르가 자신을 죽여 달라 말한 것이 며칠 전이었다.
나는 그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잠시간의 유예기간을 달라고 한 상태였다.
그는 순순히 알겠다고 했지만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선택은 네 자유지만 난 내일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상태야.
그리고 자신을 부르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것은 안에 담겨 있던 술이 사라진 주석 잔 밖에는 없었다.
"그딴 게 무슨 선택이야. 협박이지. '나를 안 죽이면 내가 세상을 죽일지도 몰라. 그런데 스스로는 못 죽으니까 네가 좀 죽여 줘.' 이 소리 아니야. 안 그래?"
그 말에 막사 안에서 서로 뒹굴고 있던 투브와 도깨비 둘이 반응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고 허는디, 원하는 대로 해 줘유."
이끼위의물이 말했다.
도깨비들도 오랜 시간을 살고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타르가 말한 초월자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어 둘에게는 이타르와 나 사이의 대화를 알려 준 상태였다.
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네가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세상에 뜻이 없다는데.
이끼위의물이 투브가 끄덕이는 걸 보고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투브 님도 그렇게 생각허시는 거쥬? 목을 베는 것도 아닌디 눈 딱 감고 해 줘유."
그러자 벼랑구른돌이 질색하며 반대했다.
"이놈 이거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허는 것 좀 봐? 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줘? 웃기도 않는 소리 허덜 말어. 죽은 사람이 자기 죽여 달라는 소원 비는 것 봤어? 거기다 이타르 그 양반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뭣하잖여. 그려 안 그려? 장로 할배가 더는 장로 짓 못 해 먹겄다고 승천하려는디 자기는 못 하겄으니까 너보고 해 달라고 하면 할 껴?"
또 투브가 끄덕거렸다.
-이놈 말도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어찌 되었든 무책임하긴 해.
이번에는 벼랑구른돌이 기쁜 목소리가 되었다.
"이것 보셔유, 투브 님도 제 말에 더 크게 끄덕이시잖어유. 그쥬?"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 말에 더 동의 하신 겨. 그리고 예시가 이상하지 않어? 장로 할배는 이주하고 나서부터는 더는 승천 소리 안 하잖어. 아주 주름이 쫙 폈어. 앞으로 천 년은 더 장로 해 먹을 겨."
"가정을 한 겨, 가정! 만약 몰러? 여하튼 그렇게 되면 너는 장로 할배 승천 시켜 줄 겨? 그것도 뭐시기여, 할배가 의자로 변해 있을 때 분질러야 된다고 혀 봐. 할 겨?"
"허지! 왜 안 혀? 그렇게 장로 할배 승천시키면 난중에 내가 승천할 때까지 이야깃거리 떨어질 일은 없겄네. 아녀?"
"저, 저 못 배워 먹은 놈 말하는 것 좀 봐? 헐 말이 있고 못 헐 말이 있는 겨."
벼랑구른돌의 말에 이끼위의물이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고 물었다.
"너는 안 그럴 겨? 딱 말 혀. 몰래 허는 것도 아니고 부탁 받아 허는 건디 네가 안 허고 배길 수 있을 것 같어? 장로 도깨비를 한 방에 승천시킨 도깨비!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겨. 도깨비들 사이에 영원히 네 이름이 남을 일인 겨. 그려 안 그려?"
그러자 벼랑구른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을 알아챈 이끼위의물이 기세를 타고 더욱 몰아붙였다.
"3초 안에 딱 대답 못 하면 그건 아닌 겨."
"이타르는 장로 할배가 아니잖여!"
"아까는 뭐 그 양반도 인간은 아니람서! 아주 지 마음대로 붙였다 뗐다 그려!"
그리고 둘은 다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재미와 이야깃거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도깨비의 사고방식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했다.
이제는 둘이 싸우는 것도 질리도록 봐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발 굴러다니다가 물건을 부수지 않기만을 바랄 뿐…….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투브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너는 그래도 나보다 먼저 이타르를 알았잖아."
-솔직히 말해?
"솔직히. 가감 없이."
투브는 훨씬 이전부터 이타르를 알고 있었고, 나와 이타르가 대화를 나누던 자리에 있었던 유일한 제3자였다.
-그는 너무 위험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타르 본인일 거고. 오죽하면 처음 보는 네게 자신의 죽음을 맡기겠어. 많이 몰려 있다고 생각해.
"흠."
-내가 느낀 바로는 그래. 결국은 너와 이타르 간의 문제겠지만.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다시 생각해도 어려운 문제였다.
어쩌다가 이런 일에 휘말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한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도 있던데, 복수를 위해 닥치는 대로 힘을 쌓은 것의 인과인가 싶었다.
"후……. 이타르."
이타르를 부르자 허공에서 이타르의 형상이 나타났다.
"뭐여! 아무 기척도 없었는디!"
엉겨 붙어 싸우던 도깨비 둘이 이타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불에 특화된 종족이긴 했지만 도깨비들은 인간보다 훨씬 마나에 민감했다.
그런 도깨비들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타르의 경지가 아득한 걸까?
"도깨비?"
이타르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깨비를 데리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영역 밖으로 잘 안 나오는 종족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마음은 정했나 봐?"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든지."
도깨비들은 이타르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투브가 둘을 몰고 나갔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니까.
"일단 당신이 죽으면 알버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알버트의 말에 따르면 당신이 그에게 마법을 걸어 줘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는 거라던데요."
"그리운 이름이네. 내가 죽으면 알버트도 죽는 상황을 염려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문무를 겸비한 데다가 충성심도 누구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사라져도 알버트가 바로 죽지는 않을 거야. 다만 그에게 남은 시간도 길지는 않아. 아마 100년 안 쪽이겠지. 내가 마법을 걸어 준 건 맞지만 내게서 떨어져 나간 지 오래야. 알버트 본인의 의지와 생명력이 마법을 지속하고 있을 거야. 아마 본인은 모르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정도면 답이 됐지?"
"좋아요. 하나 더. 당신이 모아 온 마법들은 어떻게 되죠?"
이타르가 능글맞게 웃었다.
"솔직하지 못하네."
"……."
"'당신의 마법은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날려 버리기는 아까워요.' 이거지?"
"그렇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대놓고 물어 봤으면 솔직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려고 했더니……. 결론부터 말해 주면 내가 익힌 마법들이 네게 전수 되지는 않아. 아마 네 머릿속 한구석에 들어가긴 할 것 같은데 네가 그걸 쓰긴 힘들 거야. 대충 살펴봤는데 너는 마법을 제법 능숙하게 쓸 줄 알지만 그 의미와 원리,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거든. 맞지?"
언젠가 투브가 내게 했던 말과 같았다.
수학으로 치면 식을 보고 풀어낼 줄은 알지만 식을 풀어내기 위해 사용된 공식이 왜 탄생했는지, 어떤 원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죠. 엄밀히 말하면 미래 지식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 마법에 대한 재능도 크지 않은 것 같아요. 다 변환 인자 덕이죠."
"본인에 대해서는 솔직하네?"
"자기를 솔직하게 대해야 남도 저를 솔직하게 대하죠."
"나쁘지 않은 자세야. 다시 얘기를 돌리면, 나는 내 지식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아. 위험성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 하지만 세계 곳곳에 내가 들른 곳들이 있으니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을까?"
"결국 저는 대마법사를 죽였다는 찝찝함만 가지게 되는 건가요?"
"삐진 거야? 한 가지 가설이긴 한데, 아마 나를 흡수함으로 해서 마법에 대한 네 이해도가 크게 오를 것 같긴 해. 나는 오랫동안 마나와 친밀하게 지내 왔잖아? 내 몸 자체가 엄청 정순하고 거대한 마나라는 소리야. 따라서 나를 받아들이고 몸 안을 흐르게 하면 뭔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야."
"위험성은 없는 거죠? 막 당신이 한쪽에 남아 있다거나, 아니면 내 몸을 지배한다거나 뭐 그런 거요."
이타르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하려면 진작 했지."
저 말은 무조건 진담이다.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황당할 지경이었다.
얘기를 듣고도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기억을 더 잃은 당신이 세상을 때려 부수는 것보다는 낫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