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 (1)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감각이 한층 예민해진 것이 느껴졌다.
표층에만 머물던 정보들이 한껏 빨려 들어왔다.
한계의 벽을 부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한 것처럼 몸 안팎에서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 재구성이 이루어졌다.
지금 나에게는 제약과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타르의 반지를 손에 끼웠을 때와 유사했다.
오러와 마나의 전달 통로인 혈맥이 안에서 용솟음치는 마나를 견디기 버거워했다.
심장박동이 만들어 내는 은은한 파동이 신체라는 구속을 벗어나고 있었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천막 안의 물건들이 가늘게 흔들렸다.
가늘게 숨을 쉬는 것만으로 지평선 너머에 태풍을 만들고, 손을 들었다 내리는 것만으로도 섬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천하제일, 고금제일과 같은 진부한 말로는 이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세계의 기원에서부터 종말까지 통틀어 봐도 자신과 같은 존재는 없을 거라는 이타르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지독한 겸손이었음을 알았다.
몸 밖으로 새어 나가는 기운이 조금씩 갈무리되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듯 감싸던 바람이 차츰 사그라들고 물건들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러나 심장박동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엄청난 마나가 몸 안팎을 마구 타고 흐르는데도 마나 회로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던 것처럼 차분한 기색이었다.
"후……."
천천히 호흡하며 오른손에 들린 마나 소드를 내려다보았다.
초대 황제의 기억에서 보았던 이타르의 마나 소드처럼 영롱하게 빛나며 계속해서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한손 검의 모양, 다른 차원의 괴물을 죽일 때와 같은 장창의 모양, 보기만 해도 상대가 질려 할 만큼 견고해 보이는 대방패, 당장이라도 적군의 머리통을 몇이라도 깨 버릴 것 같은 도리깨 등 찬란한 빛을 뿜는 마나 소드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차츰차츰 몸 안으로 갈무리되어 가던 마나가 마나 소드로 급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흐억!"
이타르의 반지를 먹기 전 투브가 늑대의 모습으로 변할 때처럼 급격한 마나 이동에 몸이 휘청였다.
정신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어금니를 악물고 버텼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직감과 본능이 몸을 지배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아아아.
마나 소드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폭발하듯 천막을 가득 채웠다.
왼손을 들어 올려 눈앞을 가렸다.
"이건, 말 안 해 줬잖아!"
그리고 끓어오르던 힘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빛이 잠잠해지고 왼손을 내렸을 땐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타르의 기억에서 봤던 엉망진창이 된 그의 연구실에 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이타르가 웃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저를 속인 건가요?"
웃고 있던 이타르의 얼굴이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속여? 참나, 생각했던 것보다 잘해 줘서 마지막 남은 마력으로 인사나 하려고 했더니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럼……?"
"성공했어. 나는 곧 마나로 돌아가 영면을 맞을 거야, 고마워."
대마법사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무언가 물어볼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당신을 흡수했을 때, 감각이 확대되고 힘이 넘치는 경험을 했어요. 그게 당신의 전력인가요?"
"전력인지는 모르겠네, 한 번도 전력을 내 본 적이 없어서. 전력을 내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무서워서 못 하겠더라고."
끔찍할 정도로 현실감 없는 소리를 이타르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역시 일반 사람들과는 사고의 궤가 아예 다른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말마따나 인간을 넘어선 티가 역력했다.
"항상 그런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는 소리인가요?"
"항상은 아니지. 내가 원하지 않을 때는 꽤나 둔감한 마법사의 수준으로 다녀. 예전에는 항상 감각을 열어 놓고 다녔는데 그게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라서 말이야. 그래도 뭐, 하려면 할 수 있을걸?"
말을 하는 이타르는 짐을 내려놓아서 그런지 몰라도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뚱한 표정으로 연신 술을 퍼먹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를 보니 나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복수를 마치면 저렇게 편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끔찍한 굴레에 묶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념에 잠기려는 찰나, 이타르가 내게 말했다.
"큰일을 해 줬으니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주려고."
"마나에 익숙해질 거라면서요. 그게 다 아니었어요?"
"그건 엄연히 가설이잖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네가 나를 지독히 원망하지 않겠어? '기껏 도와 달래서 도와줬더니 입 싹 닫고 도망쳤다.' 이런 식으로? 갈 때 가더라도 정산은 확실히 해야지. 원망을 남기고 가면 억울하잖아."
말을 마친 이타르가 나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푸른 실이 그의 손끝에서 마구 뻗어 나오더니 내 몸에 닿았다.
그리고 서로 엉겨 글자와 같은 모양으로 변하고 이내 몸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마나 소드를 다루는 데 조금 편해질 거야."
"편해져요? 어떻게요?"
이타르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썩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글쎄다? 직접 경험해 봐."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됐네, 고마웠어. 막무가내와 다를 바 없는 부탁이라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거든."
"거짓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던데요. 다 설계해 놓고 물어본 거죠?"
"너처럼 눈치 빠른 녀석은 이래서 있던 정도 떼게 만든다니까."
퉁명스럽게 말한 그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알버트에게 전해 줄래?"
"말씀하세요."
"고마웠어, 친구. 이렇게."
"잘 전할게요."
이타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타르의 기억이 전해 주었던 까까머리 소년 조각이었다.
본체인 그도 지니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의 기억이 전해 준 조각은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옷의 주름마저 생생한 조각이었지만, 지금 내가 건네받은 조각은 어찌나 오랜 시간 동안 가지고 다녔는지 닳고 닳아 손때가 까맣게 탄 조각이었다.
"이미 받았으려나? 그래도 가져다줘. 그리고 두 번째 주인을 잘 섬기라는 말도 해 주고."
"알겠어요."
이제 그의 목 아랫부분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머리만 남은 그가 내게 말했다.
"복수에 매몰되지 마. 네 삶을 살아."
"……안녕히."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그는 사라졌다.
잡동사니와 책이 곳곳에 늘어져 있던 그의 연구실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개인 천막 안에 서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초월적인 감각도, 주체할 수 없던 힘도 모두 아련한 옛 기억처럼 아득하게만 남아 있었다.
탁상에 놓여 있는 다 닳아 버린 조각과 안이 텅 빈 주석 잔만이 그가 있다 갔음을 알려 주었다.
천막의 입구가 살짝 나풀거리더니 투브가 들어왔다.
-잘 보냈어?
"그런 것 같아."
-다행이네.
"친구 하나 사라져서 아쉬워?"
-아쉽지. 게다가 말도 제대로 못 나누고 보내서 더더욱.
손을 들어 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타르의 잔향을 느끼려는 듯 투브가 내 손에 코를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간 저항 없이 내 손을 받아들이던 녀석이 말했다.
-나가 봐. 난리 났어.
"무슨 난리?"
-사령관 천막에서 마나가 날뛰고 빛이 쏟아지는데 당연히 난리가 나지. 도깨비들이 막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들어올 기세야.
놀라서 되물었다.
"왜 그 얘기부터 안 했어!"
-감상에 젖을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어.
평소에는 감상이고 분위기고 다 부수는데 일가견 있으면서 이럴 때만 그러는 것도 웃겼다.
분명 상황 돌아가는 걸 보니 재밌겠다 싶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재빨리 천막 밖으로 나가니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끝나셨어유? 어이쿠야! 지금은 안 된대두 계속 들어가려구 하는 거여유. 뭐라고 말 좀 해 주셔유, 말이음이 님."
원래의 거대한 덩치를 되찾은 도깨비 둘이 천막 앞을 딱 막고서 다른 사람들의 진입을 막는 중이었다.
그리고 도깨비들 앞에는 그레이스를 비롯한 귀족들, 제크를 비롯한 참모들은 물론이고 칼과 같은 기사단장들까지 몰려 우글거리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마법사들도 보였다.
"각하! 괜찮으신 겁니까? 적의 암살 시도는 아니었습니까!"
나를 본 로하나스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갑옷도 다 못 걸치고 온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만 듣고 바로 뛰어 왔음이 분명했다.
"세상에……."
내가 앞으로 나섰다.
"전쟁 났어? 왜들 이리 호들갑이야! 난 멀쩡하니 돌아가!"
그제야 슬렁슬렁 천막 밖으로 나온 투브가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전쟁 중이긴 하지.
아오! 저걸 그냥.
***
며칠 뒤, 나는 작전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부군 현 상황은?"
"리히트 공작과 에베 공작이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고, 위샤인 백작이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만 아직은 미약한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이민족들의 진입을 막느라 내부의 갈등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의 단합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부의 힘을 외부로 표출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뭉치는 것.
본의 아니게 남부로 들어온 이민족들이 남부군의 단합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민족들을 남부로 유도한 것은 나였지만 이들이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은 몰랐다.
몇몇 부족은 성을 점거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평화에 젖은 자들의 말로인가 싶었다.
"아쉽군. 자기들끼리 싸우기를 바랐는데."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민족들의 상황은 어떻지?"
"사납고 강력하기는 합니다만 자기들끼리도 통합이 안 되어 있는 상태라 곧 남부군 측에서 처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나라드마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1황자와 노체 공작이 있는 제국 북서부로 향한 모양이었다.
나라드마가 있었다면 패배한 이민족이라도 저렇게 마구잡이로 분열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리히트 공작령으로 진격하기에는 아군 손실이 너무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미 세파라트강 건너편에는 리히트군이 새카맣게 모여 방해할 준비를 완료한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함대를 끌고 합류한 누이론트 백작이 내게 말했다.
이제 그는 제독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했다.
"며칠 내로 배들이 더 도착합니다. 연안과 강변을 점거하고 포격을 하면 도하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리히트 공작을 고립시키기 위한 지금까지의 계책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리히트 공작이 나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남부군을 분열시키려는 속셈이었는데, 내가 리히트령으로 진군하게 되면 결국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하게 되고 남부군은 더욱 결속할 가능성이 컸다.
또한 이미 외세까지 끌어들인 입장이니 그들로서도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미 상당한 희생을 치르고 있는 남부 정벌이다.
가능한 한 아군의 희생을 줄이고 싶었다.
남부의 지도를 보고 있던 내 눈길을 잡아끄는 곳이 있었다.
"제독, 수송선이 모두 도달하면 병력을 한 번에 얼마나 수송할 수 있습니까?"
"2만 정도는 너끈하고 무리를 하면 3만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지도의 한 곳을 짚고 말했다.
"인원들을 선별해서 수송시키세요. 그리고 이곳에 상륙시킵니다."
내 손가락 아래에 있는 지명을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