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 (2)
"가, 각하. 그곳은……."
누이론트 백작이 말까지 더듬어 가며 당황하는 것을 재빠르게 막았다.
"테르다마스, 에베 공작령의 직할 도시죠. 제가 알기로는 오랜 기간 동안 세파르트강을 이용해 이루어지던 수운의 핵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니, 규모가 조금 작은 수송선과 전함을 가지고 충분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배를 이용해 밤낮없이 간다고 해도 사흘에서 나흘이 걸릴 겁니다."
"도보로 가면 10일 정도가 걸릴 겁니다. 그것도 아무 방해 없이 오로지 행군만 했을 경우죠."
"저항은 조금 있을지언정 몇 시간이면 전군 도하가 가능합니다. 반대편 강둑에만 닿으면 곧바로 리히트 공작령인데, 어째서 한참 멀리 있는 에베 공작령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가까운 목표를 두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는 내게 참모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어 의견을 개진했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무 말이 없던 그레이스의 입이 열렸다.
"리히트 공작을 남부의 귀족들에게서 완전히 분리하려 하시는군요."
모두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내가 씩 웃었다.
그렇지.
내 아래 백작들은 나름대로의 세력과 병력은 가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아 정무적 감각이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다.
평생 군에만 몸담아 온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몸 약한 자신의 언니 대신 바크하임 가문의 적통 역할을 오래 해 왔고, 그녀의 할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그녀를 중앙 정계에 데뷔시키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나 이상으로 귀족, 그것도 고위 귀족의 생리에 정통한 것이 그레이스였다.
그녀는 내가 지시하려는 군사 행동을 바로 정치로 치환해서 이해하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역시 전장에서의 감각이 조금 부족할 뿐, 쉽게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다.
확실히 내 편으로 잡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참모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측의 첩자들이 이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리히트 공작이 우리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을 뿌리고 있겠죠. 지금은 이민족들을 토벌하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아마 남부의 귀족들의 귀에도 다 전해졌을 겁니다. 다들 설마설마하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겁니다."
제크가 바로 반론을 냈다.
"남부의 이민족들이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남부군도 그것에 대항에 대군을 보냈다고도 들었습니다. 이민족과 첩자들의 활동에만 의존해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큰 패착일 수 있습니다."
"귀관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하지만 상대도 우리가 그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을 거라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민족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 우리가 도하할까 봐 강의 건너편에 병력을 증강시킨 것을 보면 아마 확실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남부의 병력이 이동하는 이 절호의 기회에 일주일씩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었지. 귀관들 중에서도 이 결정에 납득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몇몇 군인들이 내 눈을 피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을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일주일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리히트 공작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낸 것만으로도 저들 간의 신뢰는 매우 약해져 있을 것이다."
"리히트 공작은 항복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예상했던 바다. 그의 항복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미적거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심지어 먼저 항복 권유를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먼저 사절을 보낸 적이 있던가?"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이 다들 기억을 곱씹는 얼굴이 되었다.
방어할 때나 공격할 때나 나는 적에게 먼저 회담이나 항복을 제의한 적이 없었다.
이미 내 명성은 제국을 넘어 타국에까지 퍼져 있을 테니 남부의 귀족들이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항상 상대를 밟아 왔던 내가 먼저 항복을 제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와 리히트 공작과의 유착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 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리히트 공작이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느냐, 받아들이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방어 일변도로 나와서는 안 됐다.
크팅 성이 함락됐던 시점에서 다른 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번 나와의 결전을 치러야 했다.
지금처럼 자신의 영토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했더라면 적어도 내가 이렇게 계략을 펼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리히트와 에베는 모두 원래 황가에서 분리되어 나온 공작가문,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황가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 왔다. 그 버릇이 남아 있는 것이겠지.'
그레이스가 내 말을 받았다.
"이런 시기에 바로 앞에 있는 리히트 공작이 아닌 에베 공작령을 공격하면 더욱 의심이 짙어지겠죠. 배를 끌고 며칠이나 강을 거슬러 올라올 정도라면 더더욱."
역시 그레이스는 내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자! 들었을 테니 최정예 부대 하나씩을 각출하도록. 3만의 병력으로 에베 공작령을 침공한다. 이상!"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다음 날 저녁에는 각 부대의 정예들 3만이 탄 배가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제크와 그레이스를 책임자로 남겨 두고 싶었지만, 그레이스가 부득불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우겨 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른 배에 태워 같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전체 병력의 과반수 이상인 산탄다르군의 총책임자인 그녀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하루 만에 가신들에게 모든 책임과 과업을 분배해 버리고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내가 없는 동안 강을 건너 리히트 공작령을 침공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해, 결국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다짐받은 후에야 승선을 허가했다.
일단 내 편으로 잡아 두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요것은 또 요것대로 재밌네유."
강을 거슬러 항해하는 배의 선미에서 바람을 맞던 벼랑구른돌이 말했다.
한동안 어린아이의 모습이었기에 지금의 건장한 모습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장관이어유. 이런 걸 또 어디가서 보겄슈."
역시나 맨발에 다리털이 숭숭 난 건장한 체격으로 변한 이끼위의물이 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들고 벼랑구른돌의 말을 받았다.
항상 싸우던 둘이 어쩐 일인지 의견이 맞았다.
하긴 누이론트 백작이 이끄는 최선두의 쾌속선을 비롯해서 수십 대의 수송선과, 쾌속선, 전함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닐 것이다.
바람도 적절히 불어 주어 원래 목표했던 시간보다는 반나절 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신호가 전해졌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이었다.
강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향해 불 모양 새를 날려 보내던 벼랑구른돌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예요? 200년은 족히 걸릴 거라면서요."
"말이음이 님이 해 준 거 아니었어유?"
"제가요?"
"예, 말이음이 님이유. 이타르인가 하는 양반이 사라진 날에 투브 님이 우리 둘을 밖으로 데려갔잖어유. 그때 안에서 막 빛이 번쩍번쩍 하더니만 막 마나가 쏟아져 나오는 거여유. 그렇게 정순한 마나가 막 퍼져 나오는 건 제 평생 처음 봤어유. 그걸 맞고 있으니까 막 몸이 커졌어유. 저놈도 마찬가지여유."
벼랑구른돌이 턱 끝으로 이끼위의물을 가리켰다.
하긴, 다른 마법사들도 강력한 마나의 요동을 느끼고 달려왔었다.
내 천막에서 연구소 몇 개가 동시에 폭발한 정도의 엄청난 파장이 뿜어져 나왔단다.
그렇긴 그래도 주위로 새어 나온 마나가 몇백 년 치라니…… 다시 한번 이타르의 초월적 능력에 몸을 떨었다.
"원래는 몸이 커질 때까지 저를 호위해 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럼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건 그렇지만서두……. 이렇게 빠르게 돌아갈 줄은 전혀 모를 때 한 말이라……."
벼랑구른돌이 도움을 요청하는 듯이 이끼위의물을 바라봤지만 분명 그 눈빛을 알아챘을 이끼위의물은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 이 둘은 일부러 몸을 키우지 않으면서 내 곁에 붙어 있을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일에 환장하는 종족인데 내 주위에 있으면 오만가지 일이 터지니, 나는 도깨비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벼랑구른돌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배배꼬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조금 더 붙어 있으면 안 될까유? 지들 나름대루 열심히 호위 일도 허고 있구……."
내 호위는 무슨, 차라리 투브 호위라고 하는 게 나을 뻔했다.
둘이 투브를 어찌나 좋아하던지 하루의 절반은 투브를 졸졸 따라다니고, 나머지 절반은 자기들 둘이 뒤엉켜서 싸우는데 하루를 다 보냈다.
그러면서도 내 편의로 하루에 술 한 동이를 비워 대고 있으니 전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몰론 쓰려고 하면 극상의 전력이었겠지만 지금 이상으로 이들을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했다.
내가 아닌 그들에게.
"안 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제뉴인으로 돌려보내 드릴게요.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더 이상의 도움은 폐만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요."
당연히 자신들을 데려갈 것이라 생각했던지 이끼위의물이 눈이 똥그래져서 달려들었다.
"왜유! 왜유! 지들이 술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려유? 절반만 먹을게유! 아녀! 안 먹을게유! 왜 가라는 거여유! 왜!"
막강한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려는 이유는 황제에게 있었다.
도깨비만 해도 동화적인 존재인데 그 도깨비가 등장해서 리벤트군을 떼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소식은 당연하게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이를 하늘이 자신을 돕는 증거라면서 자신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전 요소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었다.
이민족의 진군을 막기 위해 일야관으로 향하기 전 입궁했을 때도 직접 도깨비를 보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인재 욕심이 유별나서 이전 생에서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형과 대립하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욕심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벗어나려는 것이 느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도깨비 모두 아이의 모습으로 변한지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또한 휘하 부대에도 함구령을 내려 도깨비에 대한 말을 일절 꺼내지 못하게 했다.
도깨비들도 리벤트군과의 일전 이후에는 불 마법을 자제하는 중이라 수도방위병단의 군인들은 도깨비를 보고 내가 따로 키우는 소년병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도깨비들이 본모습을 찾았으니 황제는 더더욱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할 것이 뻔했다.
애초에 이런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들을 불러오지 않으려 했는데, 당시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들을 데려왔고 후폭풍을 치르는 셈이었다.
이런 사정을 일일이 도깨비에게 말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라 그냥 딱 잘라 말했다.
"인간은 인간의 삶이, 도깨비는 도깨비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제 욕심 때문에 두 분은 인간사에 너무 많이 들어오셨어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야죠."
이끼위의물이 뭐라 말하려는 것을 벼랑구른돌이 그의 어깨를 잡아 세우며 말렸다.
"그려유, 말이음이 님 말 틀린 것 하나 없어유. 저그들은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돌아갈게유."
"왜 그러는겨!"
"가만있어! 금방 돌아간다 했는디 제법 나와 있기도 혔잖여. 슬슬 가야제."
단번에 이끼위의물을 제압한 벼랑구른돌이 내게 물었다.
"하나만 약속해 주셔유."
"뭔데요?"
"말이음이 님이 목표하는 것을 다 이루면 술 잔뜩 사 가지고 우리 마을로 놀러 와유. 그렇게 할 거쥬?"
"당연하죠. 밤새도록 씨름도 하죠."
"그려유, 그럼 된 거여유."
그리고 벼랑구른돌은 아직도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이끼위의물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배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서 낙오시키기에는 아쉬운 전력 아니야?
'아쉽지. 그런데 너무 노출됐어. 나는 황제의 그 욕심을 잘 알아. 황제가 도깨비들에게 미처 집중하지 못할 때 돌려보내야 해.'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투브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로하나스가 배 갑판을 가로질러 내게 달려왔다.
"각하, 누이론트 백작이 탄 배에서 통신입니다. 테르다마스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