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98화 (98/180)

공세 (1)

"해전은 쉽지 않군."

배에 걸려 있는 적군의 갈고리를 잘라 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 위에서 싸우는데 해전(海戰)이라는 표현이 맞는 겁니까?"

죽어 나자빠진 병사의 손에 들려 있던 활과 화살을 집어서 재빠르게 쏘아 대던 칼이 내 말을 듣고 능글맞게 반문했다.

제법 능숙한 폼으로 활을 집어든 그였지만 흔들리는 배에서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터라, 화살은 비척거리며 날아가나 싶더니 적선의 돛대를 맞고 힘없이 떨어졌다.

"에라이!"

칼이 활을 갑판에 내던지고 옆에 있던 병사가 들고 있던 창을 뺏었다.

적병이 배에 승선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길고 단단한 창이었다.

"읏차!"

그가 던진 창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우리 배에 올라타 있던 적병 하나를 꿰뚫었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창은 적병을 매단 채로 계속 날아가 강으로 떨어졌다.

"뭍에서 뵙겠습니다, 각하. 아니면 제가 다시 이쪽으로 오겠습니다."

항상 들고 다니던 곡도를 뽑아 든 칼이 배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안정적으로 적선에 안착한 칼이 매서운 기세로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적들의 비명이 줄지어 울려 퍼졌다.

"가자! 단장님 뒤를 따라라!"

검은늑대 기사단 몇이 재빠르게 칼을 따라 적선으로 넘어갔다.

특히 오델리아는 아주 배를 침몰시킬 기세로 마구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기사단의 패기에 짓눌린 적병이 배를 버리고 강으로 마구 뛰어들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투브가 거대해진 채로 배 하나하나를 발판 삼아 곳곳 누비고 있었다.

모두가 분투하고 있음에도 테르다마스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배가 병력을 태우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또한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몇몇 포대나 초소에서도 계속해서 배를 향해 마법을 날리고 있었다.

"이게 공작가의 저력인가……."

저항이 거셀 것이란 걸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거대 선단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으니 관측이 안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래도 목적지를 들키지 않게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에베 공작은 우리의 항로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테르다마스에 마법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상륙을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적선이 출항하여 필사적으로 우리를 막았다.

마법사들이 돛대에 올라가 균형을 간신히 잡고서 적선을 향해 마법을 쏟아부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날려 보낸지라 정확한 조준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마법이 종종 아군 배의 옆구리를 뚫거나 강에 떨어져 장대한 물기둥을 치솟게 했다.

적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적선에서 쏘아 대는 마법에 부서진 적선의 잔해가 수류를 타고 선단 사이사이로 흘러들었다.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잔해와 시체 들이 강에 떠다니기 시작했고, 배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제약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에베군의 작고 날랜 배들이 재빠르게 아군선 옆에 달라붙어 승선을 시도했다.

병력의 양은 많지만 어쨌거나 우리 측은 급조된 해군이다.

수십 수백 년간 강을 오르내리며 수운을 도맡았던 에베 수군의 배를 다루는 솜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전투 병력의 질이 우위라서 비등비등하게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지, 더 이상 전투를 이어 가도 테르다마스에 상륙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다가는 아군의 피해만 늘어날 것이 뻔했다.

배 안쪽에서 다른 배와의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모든 배에 전해, 일시 후퇴. 먼저 전장을 벗어나려다가 아군 배 간의 충돌이 없도록 유의하라고도 전해."

마법사가 빠르게 통신을 하는 사이 옆에서 깃발 신호를 담당하는 병사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가 없는 배들도 있으니 나가서 퇴각 깃발을 걸어라. 후방부터 차근차근 상류의 반대편 강둑에 정박한다."

분명 아군은 패배하고 퇴각하지만 내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에베의 수군을 몰살시킬 방책의 첫 번째 조각이 맞춰졌다.

***

그날 저녁, 각자 정비를 마친 지휘관들이 내 배에 올랐다.

다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황망한 기색이 조금씩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발시안에서도, 리벤트에서도, 일야관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첫 패배였다.

"그렇게 충격이 컸나?"

내 말에 다들 흠칫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이미 다 생각해 둔 바였지만 드러나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면서 누이론트 백작에게 물었다.

"제독,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퇴각 중에 나포 당한 배가 5척, 침몰한 배가 3척, 반파 당해 전력으로 쓸 수 없는 배가 2척입니다. 병력 손실은 파악 중입니다."

생각보다는 양호한 결과였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지는 치열한 백병전에도 불구하고 퇴각할 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나포당한 배가 피해 상황의 대부분이라는 것은 역시 병력의 질 면에서는 우위에 있다는 소리였다.

상륙만 할 수 있다면 테르다마스를 점령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적군의 피해 상황은 알 수 있습니까?"

"육안으로 침몰이 확인된 배만 12척 입니다만 적군의 배는 아군의 배보다 작고 가벼워 경중을 따지면 아군의 피해가 더 큽니다."

"역시 경험과 숙련도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제독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칼이 앞으로 나섰다.

"각하! 상륙이 어려울 뿐, 상륙 이후에는 적진을 휘저을 자신이 있습니다. 배 몇 척을 버릴 각오를 하고 저를 비롯한 기사단을 테르다마스에 상륙시켜 주신다면 반드시 도시를 점령해 보이겠습니다."

다른 기사단장들도 그 말에 공감하는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意氣)는 훌륭하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때를 찾지 못한 용기는 만용에 불과할 뿐, 조금 더 대기합니다."

칼의 말을 거절하자 다시 누이론트 백작이 나섰다.

"각하, 정탐선의 보고에 의하면 일대의 배가 다 테르다마스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다소간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금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테르다마스에 있는 방어 전력과의 전투도 고전했는데, 적의 병력이 더 불어난다면 승산은 한 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일리 있습니다."

내 말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의연함이 잠시 맴돌았다.

아마 당장이라도 공격 명령이 떨어지리라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기다립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닙니다. 공격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면서 각 배에 실린 군량 배분에 신경 쓰기 바랍니다. 이상."

그렇게 얼굴에 한가득 의문을 품은 지휘관들이 각자의 배로 떠나가고 투브와 함께 배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한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 둘이 들렸다.

"우리가 나서서 깡그리 다 불 지르면 되는 거 아녀? 그러면 말이음이 님은 걱정거리를 덜어서 좋고, 우리는 다시 작아질 테니께 계속 말이음이 님이랑 다닐 수 있어서 좋잖여. 만사형통이 이런 것을 보고 하는 말이제."

이끼위의물의 목소리였다.

"그런겨? 아녀. 우리 생각혀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는 분인디 괜히 우리가 나서면 안 좋아 하실 겨."

"그건 모르는 거 아녀? 일단 저지르고……."

쾅!

문을 열어 젖혔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도깨비 둘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제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바로 제뉴인으로 연락을 보내 장로 도깨비님을 모셔 올 겁니다."

이들이 유독 장로 도깨비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꺼낸 협박성 발언이었다.

"우, 우리가 뭘 헌다고 그려유……."

"그, 그려유……."

분명 다 들었음에도 어색한 연기로 도깨비들은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결국 둘을 다그쳐 몇 번이고 다짐을 받은 다음에야 방을 나섰다.

-한 번 정도는 써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써먹을 수야 있지.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써야 의미가 있는 거지."

도깨비들이 돌아가기 전, 가장 그들다운 방식으로 나를 도울 방법도 생각해 둔 지 오래였다.

***

이틀 후, 이제 강 건너편의 적 수군은 새카맣게 모여들어 셀 수도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대충 눈어림으로 짐작해 봐도 200~300은 될 듯한 배의 수였다.

아군의 배가 각각의 규모에서는 압도했지만 이곳은 이동의 제약이 없는 바다가 아니라 강이었기 때문에 결국 마음껏 전력을 쏟아 내지 못한다는 말과 같았다.

참모들은 시시각각 모여드는 적선을 보고 뭐라도 해야 한다며 나를 들볶는 중이었고, 늦지 않았으니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서 리히트 공작령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빙그레 웃으면 기다리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들 이곳에 처음 와 본 것일 테니.

뱃머리에 서서 적선을 관측하고 있으니 아군 전함에서 작은 조각배가 내려와 내 배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끼익. 끼익.

열심히 노를 젓는 병사 덕에 나무와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산탄다르 공작이군.

내 옆에서 앉아서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던 투브가 말했다.

그레이스가 배에 오르자 개의 모습을 하고 있던 투브가 얼른 달려가서 그레이스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저거, 저거 여자 밝히는 꼬락서니 하고는…….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자 투브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그레이스가 내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이 한번 가 보라고 합니까?"

내 말에 그레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그나마 존대하는 인물은 현재 산탄다르 공작인 그레이스, 외할아버지이자 발시안 제독을 겸임 중인 누이론트 백작, 검은늑대 기사단장인 칼밖에 없었다.

누이론트 백작과 칼은 엄연히 말하면 내 휘하의 가신과 같은 존재이므로, 결국 나와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공작인 그레이스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제발 가서 내 의중 좀 떠보라고 부탁해서 떠밀려 온 것이 뻔했다.

"감히 공작을 움직이다니 아주 위계질서가 엉망입니다."

농담에 그레이스가 웃었다.

"풉! 공작이 찾아가야 할 만큼 무게감 있는 후작 때문이지요."

가볍게 웃고 말았다.

"패배에 충격을 받으신 겁니까?"

"각하가 보시기에 그래 보였습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물어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장에서 완벽한 승리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이유로 가벼운 패배 이후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계시는 겁니까. 다들 답답해 죽으려고 합니다."

"각하, 이 세파라트강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그레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잘 답을 했다.

"처음입니다. 수백 개의 지류와 또 그곳에서 갈라진 수천 개의 내천의 기원이라 들었을 뿐, 직접 눈에 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남부를 관통하는 이 강을 통해 많은 물품이 움직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지요."

"남부의 조세도 주로 세파라트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이루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와 보시지 않은 것치고는 많이 아시는군요."

"산탄다르를 흐르는 카오린강에도 수운을 적용할까 해서 다른 선례들을 알아보다 보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 혹시 그것도 알고 계십니까?"

"어떤 것을……."

휘익 하고 강한 바람이 뱃전으로 들이닥쳤다.

그레이스의 긴 머리칼이 마구 흩날렸다.

접어 놨던 돛이 흔들리고 갑판을 돌아다니던 병사들이 바람에 밀려 나동그라졌다.

내가 기다리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기의 세파라트강은 물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물살이 강해져 도저히 강을 거슬러 오르기 힘들 정도가 되고, 바람도 에베를 향해 강하게 들이칩니다. 일주일에서 2주일 정도 이 상태가 계속 되어 세파라트강 본류를 이용하는 모든 수운이 멈추지요. 이곳 사람들은 강의 신이 기지개를 켠다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계속해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이 바람에 불을 실어 적의 배를 활활 태울 때가 다가온 것이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테르다마스를 점령한 적이 있었다.

로하나스를 불러 말했다.

"제독에게 말해 가장 빠르고 날랜 배 몇 척을 비우고 안에 짚과 기름을 가득 실으라고 해. 바람과 물살에 적이 묶여 나오지 못하니 화공으로 수장시킬 거라는 말해 주고."

로하나스가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내 명령은 곧 통신 마법사를 통해 전해질 것이다.

그레이스가 말을 더듬었다.

"서, 설마 일부러 패배한 건가요……? 적의 전력을 다 끌어모으려고……."

"이유 있는 패배는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각하."

얼어 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는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셔서 상륙을 준비하시죠. 새카맣게 타 버린 배들 사이로 상륙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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