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02화 (102/180)

수세 (1)

"와아아아! 학살자를 죽여라!"

"정복욕에 불타는 미치광이 시안 몬트라우를 죽이자!"

아군 주위에서 큰 소리가 나며 적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적병의 물결 가운데, 말에 올라탄 채로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누며 큰 소리로 외치는 남자가 있었다.

"카몰 후작의 목을 가져오는 자는 세상을 구원한 영웅으로 길이 칭송될 것이다!"

하르난 서비어, 리히트 공작이었다.

멀리 있어 확실히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입가에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현재 내 주위에 있는 병력은 채 5,000이 되지 않았지만, 적들의 숫자는 적어도 몇만은 되어 보일 정도로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로하나스, 우리가 얼마나 버텨야 하지?"

"예정된 시간대로라면 3시간가량입니다."

오델리아가 로하나스의 말을 받았다.

"3시간이면 몸풀기에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각하?"

칼이 껄껄 웃었다.

"흐하하하! 부단장 둘이 이렇게 용맹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으시겠습니다, 각하! 명령을!"

내 손에 마나 소드의 감촉이 생생하게 감겨 왔다.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크게 외쳤다.

"전원! 이곳을 지킨다! 철저하게 뭉쳐서 방어로 일관하라!"

내 명령이 전달됨과 동시에 전 병력이 방어하기 좋은 각자의 위치를 찾았다.

투브도 내 옆에서 거대한 몸을 낮춘 채로 다가오는 적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 우리는 적과 충돌했다.

나를 향해 덮쳐 오는 적의 목을 꿰뚫으면서 생각했다.

'멍청한 에이젤 놈이 시키는 것만 제대로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망할! 어쩐지 지 형들은 다 이민족과의 전장으로 보내졌는데 혼자만 남아 놀고 있더라니! 젠장! 제엔자앙!'

***

몇 달 전, 나는 막사에 한 남자를 세워 놓고 있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에베 공작이 떼어 준 병력의 지휘관으로 내려와 있는 에베 공작의 3남, 에이젤 서비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반문했다.

"잘못 들은 부분이 어디지? 빨리 말해. 시간 없어."

그가 손을 들어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도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게 대들었다.

"각하께서는 지금 보이는 저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몰리, 리히트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이자 성이지. 지금은 리히트 공작이 안에 들어가서 농성을 하는 중이기도 하고."

"그리 잘 아시면서 저 대도시를 우회해서 매복을 하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몰리 주변은 예로부터 요충지였기 때문에 요소마다 적의 부대가 있는 데다가 마나의 기류가 불안정해 탐지 마법의 범위가 극히 줄어듭니다! 말씀하신 곳까지 가다간 다 죽습니다!"

"그럼 몰리를 점령할 때 리히트 공작이 또 도망치면 누가 잡아. 또 놓쳐? 이미 리히트 지방을 점령하면서 공작을 두 번이나 놓쳤어. 세 번 놓쳐서 누구 도는 꼴 보고 싶어?"

"그렇다면 현실성 있는 전략을 내놓으셔야지요! 저희만 사지로 모는 꼴 아닙니까!"

"우리에게 합류한 지 몇 주가 지났으니 대충 편제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기병대 중 가장 전투에 적게 투입된 부대가 어디지?"

사납게 성내던 에이젤의 입이 닫혔다.

"지휘 계통을 통합하지 않고 기사를 가장 많이 움직일 수 있는 부대는?"

여전히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합류한 6,000의 에베군 중 기병을 겸하는 기사가 1,000명이 조금 넘었고, 나머지 5,000 중 3,000이 오러의 활용이 미약한 순수 기병, 그 외 2,000이 보병과 궁병이었다.

내가 테르다마스와 주변 요새를 남김없이 약탈한 보복인지 에베 공작은 단 1명의 보급 관련 인원을 보내지 않았다.

선의인지 악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전투 병력만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지휘권을 내가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들을 적극 활용할 필요도, 활용할 마땅한 방도도 없어서 그냥저냥 후방에서 따라오게만 하는 중이었다.

리히트 지방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던 세파라트강 도하에서도 이들을 적극 투입하지 않았으니 상당히 편의를 봐준 셈이었다.

그러나 리히트 공작령의 도시를 몇 개 함락시키는 동안 리히트 공작은 용케도 몸을 잘 사려 도망가는 것에 성공했고, 나도 약이 오를 만큼 오른 상태였다.

도깨비들도 제뉴인으로 돌려보내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다른 부대와 통합하지 않고도 1,000명에 이르는 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에이젤의 부대를 움직이는 것은 응당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당장 가서 거기서 죽치고 있으래? 여기서 좀 대기하다가 도시가 함락될 것 같거나, 리히트 공작이 도주할 낌새가 관측되면 움직이라잖아."

에이젤이 고개를 돌려 막사 이곳저곳을 살폈다.

나밖에 없는 막사였지만 다른 듣는 귀가 있을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이 한쪽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투브에게 가서 닿았지만 이내 다시 시선을 내게 돌렸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했는지 내게 물었다.

"저 늑대가 각하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들었습니다. 제 말에도 반응합니까?"

"아니."

에이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에이젤을 보고 투브가 한마디를 날렸다.

-병신, 곧이곧대로 다 믿네.

그리고 고개를 돌렸지만 귀가 이쪽으로 쫑긋 서 있는 것이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반응 안 한다고 했지, 알아듣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에이젤이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속삭이듯 작고 빠르게 말했다.

"제가 뭘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동맹의 증거를 적 아가리에 밀어 넣으시려는 겁니다!"

그가 부대를 이끌고 합류한 첫날, 그가 에베 공작 가문의 주인을 상징하는 보석인 얀타라나를 가져왔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검지처럼 길쭉한 형태로, 이 세상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영롱한 광채를 뿜는 보석이었다.

그는 그것을 두꺼운 천에 소중하게 싸서 가져왔었다.

에베 공작은 충실히 약속을 지켰다.

"예상 도주로까지 도달하는 게 조금 까다로울 뿐, 도달한 이후에는 어려울 것이 없는 임무야. 심지어 도시 공격이 진행되면 요충지에 있던 적 병력이 도시로 지원을 갈 가능성이 있으니 실제 난이도는 한참 낮아져. 어차피 몰리에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몇 개 없고, 리히트 공작이 도망치려 하는 것을 나포하면 돼. 기사가 1,000명이나 있는데, 정면충돌도 아니고 도주하는 적을 치는 일을 못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그래도 이건……."

"답답하네, 정말! 이미 요충지에 주둔하는 부대 위치도 다 알고, 도주하는 적을 붙잡으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다른 부대는 뭐, 놀아? 야! 툭 까놓고 말해서 너나 보석에 손상 가면 곤란한 건 나야! 알아들어? 제일 곤란해지는 건 나라고!"

내가 버럭 화를 내자 깨갱한 에이젤이 목소리를 죽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전장에 투입될 거라는 말은 못 듣고 왔습니다만……."

전 제국이 전화(戰火)에 휘말리고 있는 이 시점에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인 제국 공작이 저놈의 아버지다.

에이젤은 형식적이기는 하나 남작의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놈의 입에서 저딴 말이 나오다니!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정강이를 걷어 차 버리고 싶은 강한 욕구가 들끓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낼 수 있었다.

'참자, 참자. 등신 같은 놈이지만 동맹이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던 말은 거짓인지 에베 공작의 그 미친 짓을 하는 성격만을 물려받은 것인지 에이젤은 사람 속을 박박 긁는 면이 있었다.

때마침 부대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하러 들어온 로하나스가 내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읽고서 에이젤을 데리고 함께 나가서 망정이지, 그 이상 함께 있었다가는 저놈 머리통을 박살 내 버렸을 것이다.

"후우, 후우. 조급해할 필요 없다. 리히트 공작은 곧 잡는다……."

내가 자기 암시를 걸고 있자 투브가 물었다.

-에베 공작이 동맹 핑계를 대고 덜떨어진 아들놈을 너한테 떠맡긴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은 안 하려고 하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합리적인 의심이야."

-얀타어쩌구 하는 보석,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에베 공작은 그걸 왜 저런 놈한테 맡겨서 보냈지?

"몰라. 내가 저놈을 전장에 투입시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아니, 전투에 투입이 안 되는 그림을 기대했으면 공병이나 의무대 같은 지원 부대를 보낼 것이지 왜 죄다 전투 병력을 보낸 거야! 부자(父子)가 쌍으로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

-나는 인간의 병법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저놈을 빼는 건 어때?

"가용 인원이 없어. 다들 몰리로 향하는 다른 영주들의 병력을 막느라 사방에 분산되어 있어. 나라고 저놈을 쓰고 싶은 게 아니야. 고양이 발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인데, 1,000명이나 되는 기사를 놀릴 수는 없어. 그렇다고 저놈이 지휘관인데 지휘관만 본영에 남아 있으라고 할 수도 없잖아."

나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어째 지원군이 아니라 짐 덩이를 떠맡은 기분이었다.

***

땅에 단단히 박힌 투석기가 거대한 바위를 날렸다.

바위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몰리를 둘러싼 높지 않은 성벽을 때렸다.

성벽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약하게 출렁였다.

성벽의 다른 몇몇 부분은 이미 부서진 곳이 있었으나 마법과 인력의 힘으로 얼기설기 기워 놓듯 메워 놓은 곳도 있었다.

전군을 동원해 공세를 강화했다면 진작 함락시킬 수 있었으련만, 그렇게 했다가는 주위에서 몰려드는 다른 영주들의 군사와 왕국의 병사들을 막기가 힘들어지기에 다들 근처로 퍼져 몰리로 향하는 길목들을 틀어막고 있었다.

각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 중이라는 소식이 전령을 통해 매 시간 전해지고 있었지만 아직 붕괴한 전선은 없었다.

"멀지 않았습니다."

줄곧 카몰의 방위를 맡다가 얼마 전 합류한 4군단 71사단장, 빌 파르의 말이었다.

그 말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투석기에서 날아간 바위 하나가 성벽을 파고들었다.

성벽이 분진과 파편을 내뿜으며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명령했다.

"전군, 몰리로 진격한다. 오늘 몰리를 함락시킨다."

내 명령을 알리는 뿔피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고, 신호기가 올랐다.

그날 내 문양이 번쩍이는 실로 수놓아진, 황제가 내려 준 깃발이 몰리의 성벽에 꽂혔다.

당당히 몰리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리히트 공작은 몰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런 일을 대비해서 에이젤을 보내 놓지 않았던가.

"리히트 공작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참모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도시 안에는 없을 수도 있지. 그래도 매복 중인 에이젤의 부대가 잡아 올 거야."

"그것이……."

참모가 아주 곤란한 얼굴을 하고 내게 말했다.

"에이젤 남작님뿐만 아니라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리신 이후 매복 부대와의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통신도 두절되었습니다."

하!

깊은 한숨이 나왔다.

"고문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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