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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03화 (103/180)

수세 (2)

'할 수 있다……. 생각해라! 기억해!'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이전 삶에서 에이젤 서비어라는 이름은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에베 공작이고 본인도 20대에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기에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떠오를 법했지만, 함께 왕국 정벌을 떠난 에베 공작은 항상 첫째와 둘째 아들 이야기뿐이었다.

셋째 아들 이야기는 항상 얼버무리듯 피해 버렸다.

아픈 손가락인가 싶어서 당시에는 캐묻지 않았던 것이 크게 후회가 되었다.

대략적인 성정과 습관 같은 것만이라도 들어 두었더라면…….

'아니야, 이미 에이젤이 부대에 합류한 지 한 달이 넘었어. 알아보려면 진작 알아볼 수도 있었을 거야. 그저 짐 취급하고 한쪽에 밀어 뒀던 내 책임이 더 커.'

어찌 되었건 그의 부대가 내 휘하로 들어오게 되었는데도, 나는 그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장식물 취급했던 내 탓이라면 내 탓이었다.

"리히트 공작의 도주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포위망을 빠져나가 옵젤린 후작령으로 향했다는 보고입니다."

"다른 소식은?"

"몰리로 향하기 위해 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남부군 일부가 리히트 공작령에서 옵젤린 후작령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는 척후입니다. 아무래도 리히트 공작령 방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부대들에 추격대를 편성해서 퇴각하는 적을 쫒으라고 해. 리히트 내에서의 전투는 각 지휘관들의 재량에 맡긴다는 말도 하고. 리히트 공작이 옵젤린으로 넘어가기 전에 잡는다."

"그리하겠습니다."

몇 주간 끊임없이 이어진 공성과 추격전에 모두 지쳐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 잡은 고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잔챙이를 잡아서는 사냥이 끝나지 않는다.

우두머리를 잡아 숨통을 끊어야 비로소 사냥이 끝났다고 선포할 수 있다.

리히트와 에베라는 제국 남부의 두 우두머리 중 에베는 내게 협력하고 있으니 남은 우두머리는 리히트 하나.

그를 복속시키면 위샤인이라는 작은 고기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서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고기를 어떻게 요리할지도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렇기에 군침 도는 사냥감을 놓칠 수는 없었다.

로하나스가 나가기 전,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로하나스와 교대하는 것처럼 그레이스가 들어왔다.

몰리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 산탄다르군을 이끌고 적군의 합류를 막는 중이었는데, 상황이 조금 정리되어 복귀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레이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도주하는 리히트 공작 주위에서 에베군과 에이젤이 목격되었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당황해서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내뱉을 뻔했다.

그레이스가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복귀 중에 들른 작은 마을에서 리히트 공작의 깃발을 든 부대와 에베 공작의 깃발을 든 부대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공작과 에이젤을 직접 목격한 것이랍니까?"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설령 둘의 얼굴을 봤다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그레이스의 의견이 지당했다.

농민이나 평민 계층은 평생 가도 백작 이상의 귀족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현재 에베 공작은 본인 영지 내의 이민족 토벌에 온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에베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부대는 에이젤의 부대 하나뿐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에이젤의 얼굴은 몰라도 가문의 문장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리히트에 사는 평민이 리히트 공작의 문장뿐만 아니라 에베 공작의 문장을 한눈에 알아본단 말입니까? 리히트 공작이 도주하면서 우리 측에 혼란을 주려고 뿌린 미끼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레이스가 문 쪽을 한번 돌아봤다.

그리고 내게 조용히 물었다.

"얀타라나가 에이젤에게 있었습니까?"

당장 표정이 굳어졌다.

하늘과 땅에 맹세컨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에이젤이 얀타라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에이젤도 멍청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걸 누구에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을에서 식량을 가져가면서 한 기사가 그랬답니다. 자기 주군에게 얀타라나가 있으니 이제 에베 공작은 자기 주군인 에이젤이라고요."

"하!"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베 공작이 우리를 배신한 건지 아니면 에이젤의 단독 행동인지, 리히트 공작이 에이젤을 회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

내가 눈 위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레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동맹의 조건이……."

손을 내리지 않고 말했다.

이 판국에 숨길 것이 무엇 있으랴.

"에이젤이 얀타라나를 가지고 있다가 남부가 평정되면 내가 에베 공작에게 돌려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럼 그게 그냥 소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손을 내려 보니 그레이스가 입을 가로막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상황을 돌이켜 봤을 때 에베 공작이 자기 아들을 떠맡기다시피 내게 보낸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그가 애초에 배신을 계획한 것일까?

그는 충실하게 내가 요구한 병력을 보냈으며, 테르다마스를 파괴하고 싹 털어 간 것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추궁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전 삶에서 얀타라나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애당초 복제품이 없다고 알려진, 세상에 하나뿐인 광물이다.

에베 공작이 종종 미친 짓을 하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내 심기를 거슬러 가면서까지 이런 짓을 계획해서 그가 얻어 갈 것이 없었다.

이미 리히트 공작은 우리 측의 첩보 활동과 계획적인 테르다마스 침공으로 인해 남부 귀족들 사이에서 신망을 잃은 상태였다.

실제로 리히트 공작이 농성 중임에도 다른 귀족군과 왕국군이 그를 구조하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도 계속 들어왔었다.

길을 막는 아군과 대치만 열심히 할 뿐이지, 열성적으로 돌파하려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베 공작은 본인의 영지에서 이민족이나 토벌하면서 내게 보낸 병력을 통해 리히트 정복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것으로도 이미 과분할 정도의 이득을 챙겨 가는 중이었다.

에이젤의 독단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가 리히트 공작과 내통을 했는지 혹은 리히트 공작의 혓바닥에 넘어가서 그쪽으로 붙은 것인지는 몰라도 이걸 나중에 에베 공작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입장에서는 정통성의 징표를 내게 넘겨줬더니 그게 라이벌인 리히트 공작의 손에 떨어진 셈이었다.

"로하나스!"

내가 크게 소리쳐 부르자 로하나스가 뛰어 들어왔다.

"명령을 번복한다. 몰리를 정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모든 기병과 기사를 동원해 리히트 공작과 에이젤 서비어를 쫓는다. 리히트 공작은 죽여도 좋으나 에이젤 서비어는 생포해야 해! 무조건! 그리고 에베 공작에게 전령을 보내. 당신 아들이 미쳐서 적에게 붙었다고! 어서!"

***

그렇게 리히트 공작과 에이젤을 따라서 리히트 공작과 에이젤을 추적한 것이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리히트 공작령을 넘어서지 말라는 내 명령은 그들이 무사히 리히트를 벗어남으로 해서 의미가 없어졌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이 거쳐 갔던 옵제린 후작령, 토카렌타 후작령, 타칼튼 백작령을 비롯한 많은 남부군 영지가 아군의 진격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제국 남부로 분류되는 곳의 1/3 이상을 점령했음에도 리히트 공작은 잡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도주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능한 양반이었다.

리히트 공작은 에이젤과 그의 부대를 데리고 다니면서 에베 공작의 배신을 증명하는 용도로 썼다.

그리고 에이젤은 얀타라나를 증거 삼아 자신이 에베 공작이라며 주장하고 다녔다.

첩자들이 보내오는 소식에 따르면 리히트 공작은 자신의 영지를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신의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데 성공했고, 나의 포위를 빠져나왔다는 사실로 인해 남부군의 중심에 올라섰다고 한다.

기껏 리히트 공작을 고립시키기 위해 고생했는데, 에이젤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아군도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라서 척후병이 우리가 현재 점령 시도 중인 카콜 백작령의 한 험지에서 리히트 공작을 발견했다.

카콜에서 조금만 더 가면 거대한 평야가 있고, 그곳에는 남부군과 나시와르 왕국군, 툴리앗 왕국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의 인원은 약 20만.

처음에 크팅과 리히트로 진입할 때는 10만이 조금 넘었지만 진격을 계속한 터라 8만 남짓으로 줄어 있는 아군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계속해서 첩자들을 통해 거짓 정보를 뿌리고 있어 남부의 귀족들의 단합력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아군과 그들의 머릿수 차이가 너무 났다.

이대로 붙는다면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따라서 리히트 공작과 에이젤이 남부군 본대로 합류한다면 한동안 그들을 잡을 길이 요원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출격할 수 있는 인원들을 모아 뛰쳐나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푸헉!

마나 소드에 목을 꿰뚫린 적병 하나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

투브가 앞발을 휘둘러 시체를 옆으로 치워 냈다.

말을 타고 있는 칼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함정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적군이 우리보다 먼저 합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도주 중에도 치밀하게 함정을 계획할 줄은 몰랐는데, 에베 공작이 리히트 공작은 교활한 놈이라며 치를 떠는 이유가 있었네요."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잡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리히트 공작은 자신을 미끼로 사용해서 거대한 함정을 판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내가 그곳에 걸려들었고.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였지만 연전연승과 다급함이 불러온 패착이었다.

칼이 달려드는 병사 하나를 쳐 내면서 말했다.

"공작들에게 이런 말하기는 참 뭣하지만 하나는 미친놈에 다른 하나는 교활한 놈이라니, 남부의 땅은 정신병자를 길러 내는 데 탁월한가 봅니다."

끝도 없이 적병이 밀어닥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칼은 특유의 농담을 던졌다.

"서부의 누구는 변경백도 마다하고 왕이라고……."

내가 칼의 농담을 받아치는 사이, 누군가 날카롭게 외쳤다.

"각하!"

눈을 돌리자 마력탄 하나가 날아들고 있었다.

변환 인자 때문에 힘이 떨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로 위력이 약해져 있는 마법이라 오른손에 잡혀 있던 마나 소드로 가볍게 쳐 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으로 온 것을 본대에서도 알고 있을 테니 조금만 더 버티라고 외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마력탄 뒤에 가려져서 미처 보이지 않던 화살 여러 개가 눈에 보였다.

일부러 노리고 이렇게 날려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속도가 빨라 쳐 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으읏!"

왼손으로는 투브의 갈기를 잡고 있었기에 마법을 사용하기 힘든 상황, 얼굴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기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화살이 머리를 뚫는 것보다는 팔이나 손에 맞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고통이 전신을 관통할 것이 분명했다.

'몸에 상처가 난 적이 언제였지? 쪽팔리게 기절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눈을 감은 내게 들리는 것은 화살이 단단한 무언가에 가로막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손에 닿아 있는 마나 소드의 감촉은 익숙한 검이나 창의 자루의 감촉이 아니었다.

"……웨폰 마스터는 각하의 아버님 되시는 제뉴인 공작 각하의 이명 아니었습니까?"

칼의 말을 듣고 눈을 떴다.

마나 소드의 형태가 찬란한 빛을 내는 방패의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이건……."

-마나 소드를 다루는 데 조금 편해질 거야.

이타르가 남기고 떠난 말이었다.

초대 황제의 기억 속에서 노인 이타르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마나 소드를 썼었다.

'달라진 걸 모르겠더니, 이런 의미였어?'

그때 우리 뒤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패로 변한 마나 소드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하늘로 높이 올려 들었다.

방패의 형태가 꾸물거리더니 검으로 바뀌었다.

"원군이 왔다! 전원! 공격하라!"

내 명령과 동시에 철저하게 방어적인 진형을 유지하고 있던 아군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칼이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띠면서 외쳤다.

"수세는 끝났다! 공세를 취하라! 카몰군에게 어울리는 것은 공격! 또 공격이다!"

한순간에 기세가 바뀐 아군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적군 가운데에서 당황하고 있는 리히트 공작이 눈에 들어왔다.

"가자!"

투브가 몸을 한 번 웅크리더니 높게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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