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어 대 서비어 (1)
동시에 검은늑대 기사단이 앞으로 나서면서 마치 곡물을 추수하듯 적병의 목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내 명령 때문에 잔뜩 웅크리고 최소한의 반격만 했던 기사들이 전장에 울분을 풀어내고 있었다.
쿵!
높게 도약한 투브가 적군 몇을 깔아뭉개면서 착지했다.
내 왼손에 빛이 모여 들었다.
가슴 언저리, 도깨비의 표식이 새겨진 곳이 후끈 달아올랐다.
"좀 뜨거울 거다."
왼손에 모여 있던 마법을 해방했다.
순식간에 주위 공기가 끓어올랐다.
재빠르게 나와 투브 주위에 마나로 막을 쳐 열기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뜨거운 공기에 노출된 주위의 적군 수십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혼절했다.
그들의 피부는 온통 붉어져 있었고 보기 흉측한 수포가 가득했다.
"후우……."
-무리하지 마. 바다를 얼렸던 때처럼 쓰러지면 답도 없어.
"조절할게."
이타르의 덕에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지고 마법에 대한 이해가 상승한 것은 분명했지만,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재능이 일천했던 터라 지금과 같은 대규모 살상 마법을 몇 번이고 시전하는 것은 아직까지 무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나 소드를 유지하는 정도로는 큰 무리가 없었다.
처음에 마나 소드를 만들고 혼절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순식간에 자기 옆의 병사가 죽어 나가자 적병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투브에게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투브가 앞발을 넓게 벌리고 땅을 단단히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
아우우우우!
영수의 울음소리가 전장에 내려앉았다.
아군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흥분과 열광에 지배되었고, 적군은 공포와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다.
전장 전체가 얼어붙은 것 같은 그 순간,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산탄다르군이다! 산탄다르 공작의 지원이다!"
지원 부대가 어디인가 했더니 그레이스의 산탄다르군인 모양이었다.
적들이 투브의 울음소리에 압도되어 경직된 사이, 그레이스가 이끌고 온 산탄다르 병력들도 전장에 뒤섞여 들기 시작했다.
"위험하니 뒤쪽에 계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느새 내 옆으로 붙은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어머, 전공을 다 차지하려는 속셈입니까? 그렇게는 되지는 않을 겁니다, 카몰 후작."
그레이스가 검에 녹색의 오러를 만들어 내며 말했다.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웬만해서는 어릴 때부터 오러를 익히기 때문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만 믿기에는 전장은 위험한 곳이었다.
"제가 여자라서 그런 거라면 조금 실망입니다."
여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중용하는 것이 제국의 정책이다.
현재 공작 가문의 수장 중 여성은 그레이스밖에 없지만 제국의 역사를 따지고 보면 상당히 많은 여인들이 당당히 가주자리에 있었다.
발터 가문은 아예 여성들의 입김이 더 강하지 않던가.
"성별보다는 능력이 우선이지요."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대검을 가공할 만한 속도로 휘둘러서 적들을 육편으로 만들고 있는 오델리아가 있었다.
당연히 그런 오델리아는 적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고, 전방위에서 오델리아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로하나스가 방패를 들고 일부 막아 내고 있었다.
공방 균형이 상당히 좋은 조합이었다.
"각하께서 저 정도 능력이 되신다면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레이스가 오델리아를 보더니 살짝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저 정도로는……."
"전장에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조심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미 전장에 발을 들인 지 오래입니다. 이제 와서 뒷전에 있지는 않겠습니다."
어깨를 당당히 편 그레이스에게서 잠시 이전 삶에서의 그녀가 스쳐 갔다.
지금은 사힘 변경백이 왕을 칭했지만 그때는 그레이스가 왕을 칭했었다.
내가 그녀가 농성 중이던 성을 점령했을 때, 그녀는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만 거두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구해 줄 것을 내게 청했었다.
지금보다 나이는 더 들었을 때이지만 당당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겁을 주듯 말하긴 했지만 이미 바크하임 가문의 기사단인 폭풍우 기사단 몇이 그레이스를 지키고 서서 적병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키야! 이게 기사지. 누구네 기사단은 주인은 놔두고 저 멀리서 자기 칼질하기 바쁜데.
'닥…….'
닥치라고 말을 하려다가 주위를 보니 정말로 검은늑대 기사단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적을 갈아 버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뭔가 소외받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의 강함을 알고 마음껏 뛰놀고 있는 거지.'
-뭐, 착각은 자유야.
'요새 오냐오냐했더니만!'
따끔하게 한마디를 해 주려는데 내 입에서 비명 비슷한 감탄사가 나왔다.
"으엇!"
투브가 몸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에 몸에 힘을 줘 녀석의 등에 붙어 있느라 나온 소리였다.
뒷발로 몸을 지탱하고 선 투브가 앞발로 달려드는 적군 기사가 타고 있는 말의 목을 후려쳤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말의 목이 괴기한 방향으로 꺾이면서 기사와 함께 한쪽에 처박혔다.
'미리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지랄, 바빠 죽겠는데 언제 말하고 있어. 왼쪽에 기사입니다. 상체를 일으킵니다. 꽉 붙잡으세요. 하나, 둘, 셋. 이렇게 말이라도 해 주랴? 그러다가 머리통에 창이 몇 개 꽂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일선에 서지 않은 터라 오래간만에 피를 본 투브가 잔뜩 흥분한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때는 이 녀석을 좀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투브 등에서 내리고 말했다.
"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투브가 화살처럼 튀어나가 적진을 헤집었다.
주인을 잃고 날뛰는 말 하나를 발견한 나는 고삐를 잡고 안정시킨 뒤 위에 올라탔다.
오래간만에 닿는 안장이라 어색함을 느끼면서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리히트 공작을 사로잡든지 죽여야 합니다. 특히 에이젤은 꼭 생포해야 합니다. 공작이 있는 것은 제 눈으로 보았으나 에이젤은 보지 못했습니다. 미리 빠져나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에이젤이 남부군 본대와 합류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리히트 공작과 에이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목격되었으니 이곳에 없더라도 에이젤은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합류한 것이 아니라면 후방을 차단하러 간 부대에게 걸렸을 겁니다."
일단 먼저 출격하고 다른 부대들에게 나를 지원하러 오라고 전령을 보내 놓긴 했지만, 벌써 우회해서 후방을 미리 점령한 부대가 있단 말인가?
"누가 후방을 맡고 있습니까?"
마치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위에서 '부우' 하는 소리의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왔나 봅니다."
리히트 공작이 이끄는 적군의 뒤쪽에서 지원군을 끌고 온 부대의 깃발이 올라왔다.
펄럭이는 깃발에는 아마 제국에서 가장 간단한 문장일 것이 분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세로로 긴 보석과 그 주위의 광채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 문장, 에베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이민족에게 빼앗긴 성을 되찾자마자 바로 이쪽으로 향했답니다. 에베 공이 아들의 행실에 여간 분노한 게 아닌가 봅니다."
그레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베군이 리히트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미쳤군. 사람이 아니야, 미쳤어."
내 말에 칼이 나를 흘끗 보고서는 말했다.
"저희가 보기에는 각하도 저것보다 더했으면 더하셨지 결코 부족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대단하시지요. 마나도 다루시지 않습니까."
말은 그리하면서도 칼은 금세 리히트 공작과 에베 공작, 2명의 서비어가 서로 눈이 하얗게 변한 채로 대지를 뒤집으며 격전을 벌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탄다르군과 에베군의 합류로 포위된 리히트군이 불리해진 것은 명백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리히트군에게 내가 포위되었었지만 한순간에 다시 리히트군을 산탄다르군과 에베군이 포위하면서 우열이 뒤집혔다.
그러나 분명 불리한 상황임에도 리히트 공작이 이끄는 리히트군은 포기하지 않고 분전하고 있었다.
에베군이 퇴각로를 포함한 후방을 점했다고는 하나 멀지 않은 곳에 다른 남부군의 병력과 나시와르 왕국군, 툴리앗 왕국군이 있었다.
그들의 합류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쪽도 일단 산탄다르군 일부와 에베군이 합류하기는 했지만 더 많은 부대들이 지원을 위해 모여들고 있는 상태,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거대한 회전(會戰)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에베 공작이 전력을 얼마를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추측해도 10만은 되지 못할 것이니, 원래 있던 아군 8만 병력과 합해도 적의 20만이 넘는 병력에 비해 열세였다.
더더욱 남부군의 중심인 리히트 공작을 꺾을 필요가 커진 상황이었지만, 적 진영 중심부에서 지휘만 하던 리히트 공작이 오러를 끌어 올려 눈이 하얗게 변한 채로 전장의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아군의 지휘관만을 노리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비록 서비어 가문의 적통인 황제나 1황자에 비할 위압감은 아니지만 어쨌든 리히트 가문도 에베 가문처럼 황가에서 분리되어 나온 가문이니 오러의 운용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그가 본격적으로 오러를 운용하며 검을 휘두르자 아군 전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달려들던 오델리아마저도 주위를 초토화시키며 리히트 공작과 300여 합을 겨루다 그의 힘에 못 이겨 튕겨 나갔다.
계속해서 그쪽으로 인원을 투입하고 있었으나 전체적인 위치만 리히트군이 포위되었을 뿐이었다.
리히트 공작은 그동안 보존해 온 병력을 모두 이 함정에 쏟아부었는지 병력의 수는 양측이 비등한 상황이라, 리히트군도 필사적으로 아군이 리히트 공작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 틈을 이용해서 리히트 공작은 재빠르게 아군 기사나 지휘관을 죽이고 안으로 숨어 버리기를 반복했다.
이 이상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아군의 사기가 꺾일 위험이 있어 내가 직접 리히트 공작을 치려고 할 때, 후방에 빠져 있던 에이젤을 직접 생포해서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은 에베 공작이 나섰다.
"저 꼴 보기 싫은 놈에게 누가 우위인지 분명히 알려 줄 필요가 있겠군."
이렇게 말한 에베 공작은 옆의 부관에게 맡겨 두었던 창을 받아 들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오러를 끌어 올려 눈이 하얗게 된 채로 거침없이 리히트 공작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주군에게 향하는 위협을 막기 위해 에베 공작을 막던 리히트 병사들은 일격에 뼈와 살이 분리되며 원혼이 되었다.
마침내 2명의 공작이 서로 마주했을 때, 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는 시간과 공간마저 얼어붙게 할 기세로 날카롭고 굳건하게 서로를 향해 있었다.
서로를 노려보던 초로(初老)의 남성 둘은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쇄도해 전력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가가 오랜 기간 번성해 온 만큼 서비어의 성을 가진 황족과 귀족은 좀 있었으나, 그들이 직접적으로 오러를 발산하며 같은 서비어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 몇 번 있지 않을 사건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은 적군 진영과 아군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날뛰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에베 공작이 창으로 날려 보낸 오러를 미처 피하지 못해 검을 들어 막은 리히트 공작이 힘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구르면서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각자의 가문이 황가에서 분리된 지 오래되어 피가 많이 옅어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에베 공작의 오러 운용과 활용은 내가 일전에 경험했던 1황자의 오러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났다.
이 무력 때문에 황실이 다른 공작들보다 에베 공작을 더욱 견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만연했을 정도였다.
그런 에베 공작이니 아무리 같은 서비어라지만 리히트 공작이 상대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에베 공작이 마무리를 짓기 위해 혼절한 채로 바닥에 구르는 리히트 공작에게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에베군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막아 대는 통에 리히트 공작을 죽이겠다는 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에베 공작이 막무가내로 돌격한지라 그가 있는 곳은 현재 적진에 가까운 위치, 아군이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나 그것도 녹록지 않았다.
돌파해서 에베 공작을 돕기 위해 투브를 곁으로 부르고 검은늑대 기사단을 모으는 사이, 멀리서 함성과 뿔피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 왔다.
혼란하던 전장이 일순간 정지했다.
저 함성이 과연 아군의 함성일 것인가, 적군의 함성일 것인가.
모두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