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어 대 서비어 (2)
전장의 좌측, 산양을 탄 기수들이 등장했다.
자신들이 드워프에서 갈라져 나온 친척이라 주장하는 툴리앗 왕국군에만 존재하는 특수 병종, 산양 기병이었다.
제국인에 비해 체구가 작은 툴리앗인들은 말 대신 탈것으로 산양을 길들여 타고 다녔는데, 말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대신 적게 먹고 지구력이 아주 좋았다.
또한 고지대의 절벽에서 사는 산양의 특성상, 이들은 말로는 절대로 진입하지 못할 험지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은 언덕과 산지가 혼재하는 곳, 나름대로 험지라고 불러도 이상 없는 곳이었다.
산양 기병들이야말로 이런 지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병종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수세를 취한 지도 꽤 되었으니 그들이 빨리 도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그레이스가 대단한 지경이었다.
날이 잘 선 도끼나, 보기만 해도 묵직해 보이는 망치를 든 산양 기수들이 무어라 자기네들 말로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던 기수가 자기가 타고 있던 산양의 옆구리를 발로 차자 산양은 가파른 언덕을 풀쩍풀쩍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해서 다른 산양들도 자신의 기수를 태우고 풀쩍이며 언덕을 뛰어내려왔다.
"기병대를 출격……."
그레이스의 말을 급히 막았다.
"안 됩니다! 산양들은 말보다 방향 전환이 빠르고 중심이 낮아 기병이 상대하기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접근하는 경로에 화살을 쏴야 합니다."
내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산탄다르군에 명령을 내렸고, 리히트군을 향해 활을 쏘아 대고 있던 궁병대가 절도 있게 몸의 방향을 틀어 산양 기병이 접근하는 곳으로 화살을 날려 보냈다.
화살 비를 맞은 산양과 기수 몇은 고꾸라져 바닥에 처박혔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산양 기병이 살아남아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수백에 이르는 산양 기병이 아군 진형 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한다면, 보병 부대 몇 개 정도는 작살날 각오를 해야 했다.
왕국 정벌 때 저 산양 기병에게 잃은 보병만 해도 한 개 도시는 꽉 채울 정도였다.
그때는 저들을 외진 곳으로 몰아넣고 마법사들을 동원해 마법으로 철저하게 지졌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기에 지형도, 시간도 내 편이 아니었다.
눈을 다른 곳을 돌려 보니 아직도 에베 공작은 적 한복판을 휘젓고 있었고, 기사와 마법사가 그런 에베 공작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노인네, 잘도 싸우네.'
많은 이들을 자신을 죽이려 들고 있음에도 에베 공작은 엄청난 오러 운용과 신들린 듯한 창술로 적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그의 하얀 눈은 오로지 부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리히트 공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베 공작가의 기사들도 자신들의 주군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쓰고 있으므로 한동안은 그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투브!"
내 부름에 적군의 기사 몇 명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투브가 펄쩍 뛰어 내 옆으로 내려앉았다.
나는 재빠르게 녀석의 갈기를 붙잡고 등에 올랐다.
'다 놀았으면 일을 해야지.'
-아직 성에 차려면 멀긴 했지만 뭐, 간만에 나쁘지 않았어.
'저쪽으로!'
달려드는 적병을 뿌리치며 투브가 산양 기병들 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산양 기병들의 최선두는 아군 보병진이 들고 있던 방패를 박살 내고 안쪽으로 길을 내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산양의 뿔이 복부에 꽂혀 신음하다 절명했다.
일반적인 기병은 충돌 이후 그 파괴력이 크게 줄어들지만, 산양 기병은 충돌 당시의 파괴력은 기병만 못해도 적진에 침투하는 데 성공한 이후에는 기병 이상의 전장 장악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보병들이 날뛰는 산양 기병의 기세에 어쩔 줄을 몰라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서걱.
나를 향해 날아드는 어느 산양 기병의 도끼와 함께 그의 가슴을 베어 버렸다.
미친 듯 날뛰던 산양이 기수가 죽자 조금 잠잠해졌다.
"산양은 무시해! 기수를 노려!"
기수보다는 산양을 노리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겠지만, 상처 난 산양은 죽기 직전까지 날뛰면서 사상자를 늘린다.
그 과정에서 산양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기수에 의한 피해가 더 커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기수를 먼저 공격해 죽인 뒤 산양을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이런 미친 생물이 있나!
투브가 달려드는 산양 하나를 물어다 멀리 던졌다.
찢어진 산양의 상처에서 터져 나온 피가 확 흩뿌려졌다.
-계산이 안 되나? 나한테 덤비게?
'무슨 방법을 쓰는지는 몰라도 한번 기병용으로 길들어진 산양은 죽기 바로 전까지 앞에 있는 걸 들이박으려 해. 그 자체로 전투 병기야.'
이미 아군 보병과 산양 기병이 한데 뭉쳐 있어 대규모 마법을 쓰기도 힘든 상황, 재빠르게 움직이며 하나하나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산양에게 잔뜩 열이 받은 투브가 닥치는 대로 밟고, 물고, 찢고 있으니 차츰 상황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에베 공작이 부대를 이끌고 등장했던 후방에서 몇 개의 푸른 불꽃이 나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것도 보냈어?"
제국과는 다른 독특한 마법 체계를 갖추어 항상 제국의 경계를 받고 있는 나시와르 왕국의 전투 마법사 부대가 전장에 있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마법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제국이나 나시와르 왕국이나 다르지 않았지만, 나시와르 왕국은 아예 마법사를 전격적으로 밀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윤리적, 도덕적 문제로 제국에서 금지하는 실험도 나시와르 왕국에서는 암암리에 자행되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즉, 나시와르의 마법사들은 인명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이곳은 그들에게 좋은 신무기 실험장이었다.
쉬이익!
정점에 도달한 푸른 불꽃이 회전하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마나가 불꽃에 삼켜져 불꽃의 크기를 키웠다.
허공에서 하나로 뭉친 불꽃의 모습은 마치 기다란 용이 몸을 뒤트는 것 같았다.
아주 특수한 재료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진 나시와르 왕국군 전투 마법사 부대의 마법.
천룡멸세(天龍滅世).
재료가 아주 희귀한 것은 둘째 치고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적어도 마법사 두셋은 폐인이 되기 때문에, 이전 삶에서도 몇 번 목격하지 못한 마법이어서 놀라움을 더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나시와르와 툴리앗이 제국의 내전에 이렇게 많은 전력을 투입한 거지?'
전투 마법사와 산양 기병.
1황자나 위샤인 백작이 무엇을 제시했길래 각국의 자부심이자 주력까지 보낸 건지 궁금해하는 지금에도 완연한 용의 모습을 갖춘 마법이 지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이거 피아 안 가리고 일단 죽이고 보자는 건가? 너를 엄청 죽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그랬어.
'농담할 때가 아니야! 저게 떨어지면 일대 바위가 녹을 정도야! 끔찍하다고!'
이미 후퇴 명령을 내리기에는 난전이 되어 버려 명령이 잘 전해질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변환 인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법의 규모가 워낙 거대해 혼자 막아 내기도 힘들어 보였다.
파직!
아군 뒤쪽에서 거대한 빛의 창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의 몸통을 관통했다.
거대한 마법의 충돌로 주위의 마나가 매우 불안정하게 떨렸다.
보병 부대와 궁병 부대에서 통신이나 보조를 맡고 있던 마법사들이 흔들리는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각혈하며 쓰러졌다.
파직!
파직!
2개의 거대한 창이 더 날아와 용을 토막 냈다.
마나 간의 연결이 흐트러진 용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죽은 용의 비늘이라도 되는 듯, 타다 남은 푸른 불씨들이 타닥거리며 전장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뒤쪽의 언덕에 누이론트 백작과 발시안 해군에 배속된 포격 전문 마법사들이 있었다.
일야관에 들르기 전, 수도에 있을 때 해상권 장악의 중요성을 황제에게 강력히 주장해 마법사들을 받아 발시안 해군에 맡긴 일이 있었다.
하지만 세파라트강 도하 이후로는 더 이상의 해상권 장악은 무의미하다 생각이 들어서 누이론트 백작과 마법사들을 내륙으로 이동시켰는데 그 판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양측의 마법이 불을 뿜었다.
허공에서 대규모 마법들이 서로를 요격하면서 대낮에 번개가 치고, 일시적으로 어둠이 내렸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전투가 길어지며 속속들이 양측의 부대들이 전장에 합류했다.
그중 전장을 누비는 내 눈에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남부군을 독려하는 홈 위샤인 백작과 그의 딸, 스와라 위샤인이었다.
그 뒤에 남부의 여러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깃발들이 있었다.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부대들도 속속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병사들이 질러 대는 고함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산양 기병과 말을 탄 기사가 피 흘리며 한데 뒤엉켜 생과 사를 가르고 있었다.
전장 곳곳에서 펼쳐지는 마법으로 인해 마나가 매우 불안정해져 통신 마법사들의 통신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저 광기에 지배되어 적을 죽이고 또 죽이는 난전이었다.
당장이라도 멀리 보이는 스와라 위샤인을 향해 달려가 성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지만, 이 난전에서 중심을 잡아 줄 내가 없으면 아군이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접근은 하더라도 안전하게 살아 나올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다. 복수를 마치지 못한 채로 죽는 것은 의미가 없어.'
으드득!
원수를 앞에 두고도 다가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가 갈렸다.
'기회는 분명 다시 온다. 애초에 내가 성급하게 움직여서 걸려든 함정이야. 더 깊이 들어가서는 안 돼.'
달려드는 어느 산양 기병의 머리통을 쳐 내고 외쳤다.
"전열을 유지하라! 적은 수만 많을 뿐, 실전 경험이 적다! 철저하게 전열과 조를 유지한 채 상대하라!"
이런 험지에서의 회전은 진흙탕과 같아서 전투를 계속할수록 휘말려 들어가 종국에는 빠져나오기 힘든 지경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후퇴를 하게 되면 계속 밀리게 된다는 것을.
***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양측에서 군사를 거뒀고,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종일 전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지만, 엉망이 된 이 전장을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전부 다 온 건가?"
"점령지를 지키는 부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전력입니다."
"수는?"
"기존 병력 7만가량에 에베 공작 각하께서 데리고 온 4만의 병력이 있습니다."
"그걸로 괜찮나?"
"……."
내 물음에 작전 회의를 진행하는 천막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의 규모는 최소 15만에서 최대 22만 규모.
수적 열세가 심했다.
누군가가 간신히 입을 떼어 말했다.
"수가 부족할 뿐 아니라 지형도 회전을 치르기에 좋지 않습니다. 재정비를 위해 전선을 조금 뒤로 물리는 것이 어떤가 합니다."
"불가. 우리가 적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많은 전투 경험과 높은 사기인데, 괜히 후퇴하면서 수가 더 많은 적들에게 우리의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전투 경험이 많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히트 공작을 추격하면서 평시보다 더 지쳐 있는 이런 상태에서도 적은 우리가 쌓아 온 전장의 신화 때문에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재정비를 한다고 진을 뒤로 물리면 아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적군의 사기는 오를 것이 뻔했다.
"일단 적들도 우리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일선 부대들에게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명을 전달하도록. 하나 더, 전장에서 무리한 마법사들의 회복에 신경 쓸 것. 이상."
일련의 명령을 내리고 개인 막사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