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종말 (1)
철푸덕!
무언가 내 앞으로 내던져졌다.
분명 사람의 형체였을 그것이 꿈틀거리며 가늘게 신음을 흘려보냈다.
"끄으으……."
에이젤 서비어였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고, 코와 입으로 끈적거리는 핏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시퍼렇게 부어오른 눈을 한 에이젤이 손을 꿈틀거렸다.
힘겹게 바닥을 기던 그의 손이 내 발에 닿았다.
그가 고개를 올려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살았다는 듯 기어와서 내 다리를 안았다.
"가, 각하! 아버지를 말려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저를 죽이실 겁니다. 제, 제발! 각하!"
"애도 아니고,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에이젤."
퍼억!
발끝을 그의 명치에 한 번 박아 주니 에이젤은 커헉 소리를 내며 숨을 고르기 바빴다.
그런 에이젤을 보고 있으니 이런 멍청하고 나약한 녀석에게 골치 썩었던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에이젤을 한 손에 집어 들고 들어와 내게 던진 이후 미동도 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에베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걸 내게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그놈의 아비이자 그놈을 그대에게 보낸 사람이오. 배신으로 우리 간의 동맹을 파기하려 했던 자이니 마무리는 그대가 해야 하지 않겠소?"
"짐만 되는 아들에게 전공을 주기 위해 내게 떠맡긴 것도 모자라 처분까지 내게 넘긴다? 너무 편한 길만 걸으려 하는 것 아니오?"
"……합당한 처분을."
한편 마무리라는 얘기를 들은 에이젤이 눈물, 콧물을 짜며 에베 공작에게로 기었다.
"아버지!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리히트 공작의 뱀과 같은 혀에 잠시 농락당했을 뿐입니다! 어찌 제가 아버지를 배신하겠습니까!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제, 제발 용서를!"
에베 공작은 아들의 처절한 호소에도 그를 향해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본 에이젤은 다시 나를 향해 애원하기 시작했다.
"후작 각하, 각하의 말씀이라면 아버지께서도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자비를,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발을 핥으라면 발을 핥고, 시중을 들라 하시면 시중을 들겠습니다. 제발, 제발!"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입에서 진득한 핏물을 튀겨 가며 고개를 처박고 호소하는 에이젤의 모습은 참으로 애절했지만 그를 보는 내 가슴은 차갑게 식어 갔다.
"얀타라나는 회수하셨소?"
에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돌려주기로 한 때가 되지 않았음은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소. 아직 그 물건은 소유권은 내게 있소이다."
에베 공작은 흠칫하더니 복잡한 시선으로 에이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갑옷의 가슴 부위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밖으로 꺼낸 그의 손에는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천이 들려 있었다.
천 안쪽에 무언가 불룩한 것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얀타라나임이 분명했다.
"부탁…… 하나 들어 주시겠소?"
내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대가 지금 내게 부탁할 입장이오? 영내에 무슨 말이 도는지는 알고 계시오? 당신이 추후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일부러 아들을 이용해 나를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판국이오. 에이젤은 물론이거니와 당신까지 참수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부탁?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아니오?"
에베 공작은 내 앞에 두툼한 천을 올려 두었다.
"이러니저러니 설명을 하는 것은 변명으로밖에 비치지 않음을 알고 있소. 또한 그대의 분노가 큰 것도 능히 짐작할 수 있소."
"……."
"나는 그대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대의 조부이신 프리드리히 공과 부친인 제로 공을 잘 알고 있소. 부디 두 가문 간의 오랜 친교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내 부탁을 듣기만이라도 해 주시오."
나는 입을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 듣지 못했던 에베 공작과 에이젤의 관계가 내심 궁금했다.
내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해석한 것인지 에베 공작의 입이 열렸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에이젤은 내 적자가 아니오. 녀석의 다른 두 형들과는 다르게 서출이요. 녀석의 어미는 어느 시녀로, 녀석을 낳고 일찍 죽었소."
나도 모르게 눈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에베 공작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서출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지!"
에이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퍼억!
내가 발로 한 번 더 에이젤을 걷어차니 그는 피거품을 물며 기절해 버렸다.
"부인의 배려로 에이젤은 적자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자랐소. 가문 내에서도 소수만 아는 비밀이오.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서 나를 겹쳐 보고 있었나 보오. 제 형들은 엄하게 길렀어도 에이젤에게만큼은 조금 느슨했던 게 사실이오. 녀석이 형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어미가 없는 탓인 걸로 여기고 오히려 더 응석을 받아 준 내 잘못이오. 어차피 제 형들이 내 뒤를 이을 테니, 내가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편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해 주려고 오냐오냐 기른 것이 문제였나 보오."
털썩.
에베 공작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얀타라나를 돌려주지 않아도 좋고, 폐하께 진언해 나를 대공으로 만들지 않아도 좋소. 전장의 가장 앞에 서라면 군말 없이 그곳에 서겠소.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내 모자란 아들을 살려 주시오. 평생 그대에게 감사하며 살겠소. 내 부탁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소. 에이젤이 잘못을 저지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녀석의 아비요. 자식이 잘못했다고 해서 죽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소. 부디 자비를…… 부탁드리오."
그렇게 말하는 에베 공작의 표정은 더 없이 슬퍼 보였다.
커다란 그의 체구가 쪼그라들어 마치 어느 시골의 촌부와 다름없이 보였다.
에이젤은 형식적이기는 하나 에베 공작령의 봉토를 수여 받은 남작, 잘못한 가신에게 벌을 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도 아군을 배신하고 잡혔으니 당연 목을 쳐야 했다.
그러나 어느 아비가 아들을 참수해야 한다고 쉬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작,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사누스 서비어의 고통스러운 심정이 내게 다가왔다.
얀타라나를 싼 천을 붕 띄워 무릎 꿇은 에베 공작의 앞에 내려놓았다.
"가져가시오.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겠다 한 것은 동맹의 증거 이상의 뜻은 없었소. 지금에 와서는 증거가 굳이 필요할 것 같지 않소."
아직도 거품을 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에이젤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에이젤은 엄연한 배신자, 그를 쉬이 용서할 수는 없소."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만 동맹의 두 번째 조건을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한다면 에이젤의 처분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소."
"약속을…… 해 주실 수 있으시오?"
"목숨은 붙여서 그대에게 보내 드리겠소."
에베 공작이 이를 질끈 물었다.
그리고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아직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는 이를 것이오. 그대가 하기에 달렸으니."
에베 공작이 천에 감싸져 있는 얀타라나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앞에 다시 천을 내려놓았다.
"나는 이것을 지니고 있을 자격이 없소. 아들과 함께 받아 가겠소."
"편하실 대로."
에베 공작이 나가고, 사람을 불러 에이젤도 임시로 만든 독방에 가둬 두니 누군가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애이젤이 이곳저곳에 묻혀 놓은 피를 보고 그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오래간만에 뵙는데, 장소가 영 그렇습니다."
"전장에서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숙소지 뭘. 어서 와."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것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몸을 가까이 당겨 앉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와 신기한 물건을 앞에 두고 나누는 이야기는 밤이 깊어도 도무지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
"이런 걸 꼭 써야 하는 거요?"
내가 내민 것을 손에 든 에베 공작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권유하는 것뿐이오. 하고 나가서 해 될 일은 없을 것이오."
"후……. 대체 이 무슨……."
에베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에 들려 있던 코와 하관을 가리는 형태의 가면을 착용하고 투구를 썼다.
"불편하지는 않으시오?"
"거치적거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소이다. 호흡도 자유롭고. 그건 그렇고 대체 이건 왜 하라는 것이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고맙겠소만."
"일단 나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니 나중에 고마워하지나 마시오."
"거참."
에베 공작의 뒤로 다수의 에베군, 특히나 기사들이 에베 공작과 같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한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다 손해가 되어 돌아올 거다.'
다시 에베 공작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계시오. 곧 출격 명령을 하겠소."
"기다리고 있겠소."
"어제 당신이 했던 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 주길 바라겠소."
공작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과 투구로 인해 하관이 가려져 눈만 보이는 상태라 왠지 더 결연해 보였다.
전투에 들어가면 저 눈이 하얗게 변해 더 기괴한 분위기를 내뿜을 것 같았다.
지휘부로 돌아오니 나 대신 로하나스와 그레이스가 참모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았다.
"오셨습니까. 에베군의 출격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적들의 움직임도 포착되었습니다. 아직 전체적인 움직임은 아니지만 몇 개의 기사단이 우리를 넓게 포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우회하고 있습니다. 지시만 하시면 전투가 개시될 겁니다."
내 시선이 헐겁게 매어 놓아서 그레이스의 턱과 목 사이에 달랑거리고 있는 가면에 닿았다.
"그건 일선에 있는 부대에게만 먼저 보급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가지고 계십니까?"
"각하께서 직접 명했다기에 뭐가 있나 싶어 하나 받았습니다. 대체 이 가면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그레이스의 물음에 지휘부 천막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눈이 내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 남자가 가져온 이 가면을 나는 일언반구 없이 전투 부대들에 보급할 것을 명령했다.
가면의 개수는 약 1만 개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기에 모든 병력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었지만, 일단 기사들을 중심으로 나누어 주니 대략 숫자가 맞아떨어지기는 했다.
더 많은 수의 가면을 만들어 오길 기대했는데, 세부적이고 복잡한 많은 공정이 필요해 이 정도 수량을 가지고 온 것도 기적에 가깝다는 말을 들었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레이스가 '또 자기만 알고 있네.'라고 예상할 만한 표정을 지었지만 깔끔하게 못 본 척 넘기고 명령을 내렸다.
"에베군에게 출격 명령을 전하라."
뿔피리가 울려 퍼지고, 통신 마법사들이 바빠졌으며, 신호기가 올랐다.
양측의 후방에서 마법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에베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부군 측에서도 전진하는 에베군에 대항하기 위해 부대 몇이 본영에서 출격했다.
천막 밖으로 나오니 멀리 에베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선명했다.
옆에 있던 누이론트 백작에게 말했다.
"지금입니다."
누이론트 백작이 휘하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법으로 보호한 유리구슬 같은 것을 투석기로 날려 보냈다.
둥그런 고체 같은 그것은 전장 위를 한참 날아가다 적진에서 날아온 번개와 같은 마법에 요격되었다.
그리고 요격된 구슬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확 하고 뿜어져 나와 전장을 온통 뒤덮었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에베 공작이 이끄는 에베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적을 향해 전력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충돌의 순간, 그레이스가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왜 적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겁니까? 저쪽 기사단은 란겔 백작의 백귀 기사단 아닙니까? 백작가의 기사단 중에서는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기사단이 왜 저리 허무하게……."
그레이스가 경악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에베 공작은 자신의 기사단과 함께 백귀 기사단을 박살 내고 이미 다른 목표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적들도 당황했는지 여러 부대를 더 내보내는 것이 보였다.
"전군의 기사단을 내보낸다."
내 명령과 동시에 그동안 잔뜩 인원을 늘려 왔던 각 가문의 기사단들이 가면을 착용한 채로 전장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누이론트 백작이 몇 번 더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때마다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던 커다란 유리구슬이 날아가 전장에 반짝이는 가루를 흩뿌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적군의 기사단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전군, 진격. 오늘 역도의 무리를 소탕하고 제국 남부를 평정한다."
내 명령에 모두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효과 좋네. 네 덕에 평화가 더 빨리 찾아 올 거야."
시종일관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저비스가 간신히 입을 뗐다.
"……부디 그 말씀이 맞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의 눈에는 공포인지 희열인지 모를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