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07화 (107/180)

기사의 종말 (2)

"적군의 기사단은 신경 쓸 것 없다. 궁병 부대와 마법사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내 지시가 각 기사단에 배정되어 있는 통신 마법사들에게 전해졌는지, 전장을 누비던 기사단들이 적군 진영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마법사 부대들을 노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부대거나 마법사는 핵심 전력 중 핵심 전력이기에 많은 적군들이 아군의 기사단을 막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오러를 쓸 수 있는 자, 그것도 수십 년간 오러와 자신을 연마하며 갈고닦았던 기사 앞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자들은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많은 아군의 기사단들이 적진을 휘젓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에베군 선두에 서 있는 에베 공작과 그의 가문 기사단인 청옥 기사단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행동으로 보이겠다더니, 빈말은 아니었나 보군.'

적 마법사 부대들이 능력을 상실한 지금, 보병의 보호를 받아 적군 지척까지 접근한 아군 마법사들이 적군을 향해 전력으로 마법을 쏟아 냈다.

기존의 방식이었다면 마법사들은 기사들의 접근에 쉬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지금처럼 적진에 가까이 가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멀리서 지원이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비스가 감자에서 추출해 만들어 낸 물질 때문에 오러를 끌어 올리지 못하는 적군의 기사단은 지금 대부분 죽거나, 사지의 일부분을 잃고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때 가면을 착용한 로하나스가 내게 다가왔다.

"각하, 검은늑대 기사단 전원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간다고 해."

모든 기사단을 내보내고 전군을 진격시킨 상태였지만 검은늑대 기사단만은 제자리를 지키라고 사전에 말해 놓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말에 올라 내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팔을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시킨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리히트 공작과 붙었다가 튕겨 나가면서 팔이 부러진 오델리아였다.

매섭게 불타는 눈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검은늑대 기사단도 코와 하관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각하도 가시는 겁니까?"

그레이스가 나를 보고 물었다.

"저는 검은늑대 기사단과 함께 우회해서 적들의 후방을 치겠습니다.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이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적군에 속해 있는 귀족들이나 참모들이 쉽게 항복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직접 내 손으로 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수많은 전장을 겪으면서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하게 된 군인들과 귀족, 무엇보다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낸 그레이스가 있으니 내가 일선에 있더라도 지휘에 대한 걱정은 놓을 수 있었다.

"승리가 눈앞에 있지만, 부디 조심하시길."

"암요, 그래야지요. 완벽한 승리를 위해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리려는데, 그레이스가 무언가를 건넸다.

"제게는 지금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목에 헐겁게 매어 놓았던 가면이었다.

"이건, 저도……."

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투브가 끼어들었다.

-그냥 받아.

'왜? 나도 있어.'

-좀 하라는 대로 해.

투브의 압박에 못 이겨 얼떨결에 가면을 받아 얼굴에 둘러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조였다.

비록 변환 인자가 있어 몸 안에 들어오는 안 좋은 것들을 없애 준다지만, 아직도 전쟁에 흩날리는 저 반짝거리는 가루에 효과를 발휘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저비스에 말에 따르면 감자에서 추출한 성분을 극도로 강화시켰다고 했으니, 일단은 가루의 체내 유입을 막아 주는 이 가면을 믿어야 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십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게 낫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내 농담에 그레이스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그레이스를 두고 투브에 올라앉아 말했다.

"농담입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운이 네게 깃들길, 시안."

"왜 갑자기 말을……."

"너는 가문의 기사단을 통솔하는 입장이고, 나는 사령관 대리잖아? 누가 더 위지?"

투브가 킬킬거렸다.

-하하하하, 진짜 독특한 여자야. 너 좀 고생하겠어.

'내가 고생을 왜 해.'

-너만 빼고 다 알걸?

알 수 없는 투브의 말을 제쳐 두고 적당히 그레이스의 장단을 맞춰 주었다.

"사령관 각하, 출정 허가를."

"시안 몬트라우, 이기고 돌아오라."

"한 치의 그름 없이 명을 시행하겠나이다."

그리고 검은늑대 기사단 선두에 서서 외쳤다.

"가자! 각자가 한 마리의 늑대가 되어 적의 숨통을 끊는다. 오늘 이후로 남부에서 감히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의심할 여지없이 믿어 왔던 오러에 대한 신뢰가 붕괴된 지금, 적군은 혼비백산해서 후퇴하기 바빴다.

각 가문의 지휘관들이 큰 소리로 대열을 맞추고 침착할 것을 병사들에게 종용하고 있었지만, 이미 충격으로 뇌가 하얗게 되어 버렸을 기사와 병사 들은 그런 지휘관을 짓밟고 어떻게든 이 전장을 빠져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거, 검은늑대 기사단이다!"

"늑대가 있다! 카몰 후작이 직접 왔다!"

우리를 발견한 적병들이 크게 소리를 질러 혼란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후방으로 우회한 부대들은 여럿 있었지만 이곳까지 도달한 부대는 우리가 처음인 듯, 주위에 다른 아군은 보이지 않았다.

"죽여라. 특히 마법사들은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오러를 운용할 수 없게 하는 물질을 추출할 수 있는 감자는 나만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물질을 확보한 마법사들이 연구를 통해 해독제를 만들어 낼지도 몰랐다.

아마 언젠가는 해독 물질이 나오겠지만 가능하면 이 독점적 지위를 오래 가져가는 것이 좋았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은퇴를 한 것이 아니라면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가장 우선적으로 모집되는 인원이니, 최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곳에 남부에 있는 마법사 중 대다수가 모였을 것이다.

이 전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을 살려 보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랴!"

내 명령과 동시에 기사들이 말을 몰고 적진으로 달려들어 지옥도에 한 획을 더했다.

이미 감자에서 추출한 물질이 살포된 곳에서 상당히 멀어지기도 했고, 시간도 조금 지난 터라 저비스가 알려 준 지속 범위와 지속 시간에서 멀어진 지는 꽤 된 상황이었다.

적군이 저항하기 위해 오러를 끌어 올리면 끌어 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압도적인 패배의 여파로 머릿속에 공포가 새겨진 것인지 기사와 병사를 가리지 않고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았다.

티잉! 티잉!

화살 몇 개가 갑옷에 부딪쳐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궁병 몇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일정 정도 이상의 오러를 운용해야 시위가 당겨지는 활을 쓰는 강궁병(强弓兵)이었다.

제대로 오러를 운용하지 못해 활시위가 당겨지지 않아 가까이에서도 내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푸욱!

창처럼 길게 변한 마나 소드를 던져 강궁병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가슴이 뚫린 궁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을 때 이미 마나 소드는 내 손으로 회수되어 있었고, 그는 피 흘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어, 어떻게……."

옆에 있던 다른 강궁병 하나가 나를 보고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도 평등하게 구멍을 내주었다.

아마 평생 다뤄 왔을 강궁을 마지막에는 당기지 못한 강궁병이 가슴과 입에서 피를 흘리며 절명했다.

다른 적군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나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향하는 사방에 검은늑대 기사단이 있었다.

말에 탄 채로 검은 갑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투구를 써서 눈만 보인 채로 병장기를 휘둘러 적을 참살하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지옥에서 목숨을 거두기 위해 현세로 올라온 사신 같았다.

"으, 으…… 괴물……."

처음에 마나 소드에 가슴을 꿰뚫린 강궁병이 엎어진 채로 마지막 말을 내뱉고 그대로 굳었다.

"괴물이라. 잘 알고 있네."

괴물이라니, 여기서 괴물 아닌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두 욕망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몸에 품고 이곳에 서 있지 않던가.

정의와 기사도를 외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다들 품고 있는 욕망을 인두겁으로 덮어 놓았을 뿐.

자신의 지금 삶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누군가는 그것이 기사단장일 수도, 누군가는 대공일 수도, 누군가는 왕일 수도 그리고 누군가는 황제일 수도 있었다.

그 욕망 때문에 이렇게 서로가 못 죽여 안달하는 것 아니던가.

감히 어느 누가 그 욕망을 더럽고 추하다 할 것인가.

욕망으로 세상은 작동하고 있었다.

넓고 거대한 세상에서 지금 이 순간, 이 전장에서 그 작동 원리가 조금 더 많이 부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서 있는 자 중 괴물 아닌 이가 없었다.

콰앙!

나를 향해 달려드는 무언가를 막아 냈다.

내 의지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것인지 마나 소드는 어느새 방패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으읏!

투브 등에 있는 나를 향한 공격이었지만 투브까지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강격이었다.

방패 형태의 마나 소드와 교차한 검 사이로 온통 하얗게 변한 눈이 보였다.

"그렇지 않소? 이곳엔 괴물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하얀 눈의 주인공이 잠깐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미친놈.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황제를 죽이는 것보다 네놈을 죽이는 것이 더 가치 있을 테니 말이다."

"리히트 공작, 그 말은 아주 심각한 불경죄외다. 그리고!"

키기기기기기긱!

오러를 불어 넣은 리히트 공작의 검과 마나 소드가 서로를 긁어 대며 우는 소리가 강렬하게 귓전을 때렸다.

리히트 공작의 검이 꽈드득 소리를 내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재빠르게 손에 잡고 있던 검을 놓고 뒤로 몸을 날렸다.

퍼버벅!

압력을 견디지 못해 깨진 검이 사방으로 조각을 뿌렸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검편의 폭풍에 말려들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리히트 공작이 착지하는 곳으로 투브가 몸을 날리고 내가 창을 만들어 던졌으나, 리히트 공작은 절묘하게 몸을 틀며 빠져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죽은 기사의 검을 챙겨 나를 공격하고 있으니, 그 역시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니었다.

이윽고 몇 합을 겨룬 뒤 그가 떨어져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나는 그쪽한테 죽을 마음이 전혀 없소이다. 오히려 그대가 죽어 줘야겠소. 이 세상에서 서비어를 죽여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소?"

"건방진 놈!"

그가 전신에서 오러를 폭사시키며 폭발적인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죽이고자 하는 리히트 공작의 말에는 일절 거짓이 없다는 걸.

그는 자신의 생명력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오러를 운용하는 중이었고, 그의 검에는 오로지 나를 죽여 막아 세우겠다는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육체를 잊고, 자신을 잊고, 생각과 의지만이 남아 그의 오러와 검을 불태우고 있었다.

"각하!"

오델리아와 로하나스를 비롯한 기사들이 갑자기 등장한 리히트 공작을 막기 위해 재빨리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러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서비어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피워 내는 오러를 따라 올 순 없었다.

-죽어라.

달려드는 리히트 공작을 향해 투브가 앞발을 휘두르고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으려 했으나 리히트 공작은 신묘한 움직임으로 모두 피해 냈다.

-인간 따위가!

잔뜩 성이 난 투브가 주위 마나를 응축시켜 리히트 공작을 향해 쏘아 보냈다.

웬만한 기사 정도는 타고난 영수의 육체만 가지고도 피떡으로 만들기에 차고 넘쳤다.

투브가 직접적으로 마나를 쓴 것은 사령 마법사가 된 스테판을 상대할 때와 나라드마가 데리고 있던 영수와 겨룰 때 말고는 없었다.

그 정도로 리히트 공작의 위력과 기세는 엄청났다.

마치 송곳처럼 변해 쏘아지는 응결된 마나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하면서 리히트 공작이 나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방패로 변한 마나 소드와 그의 검이 닿았다.

수십 번 이상 방패를 때리는 충격에 나는 결국 투브의 등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각하!"

기사단이 나를 보호하려고 뛰어들었지만 오히려 리히트 공작의 검에 찔려 몇 명이 낙마했다.

공작의 선전을 본 적군들이 기사들과 투브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리히트 공작이 생생히 보였다.

당장이라도 주위의 것들을 질식시킬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오러를 퍼트리며 그가 검을 바로 잡았다.

"젠장, 에베 공작한테 얻어터지는 것을 보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서비어는 서비어네."

왼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주위의 마나가 내 몸 안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진과 술식이 빠르게 왼손 주위에서 마법을 구성했다.

그것을 본 리히트 공작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자세를 낮춰 나를 탐색했다.

"미안하지만 전력을 다하겠소. 성장을 확인해야 하거든."

내가 몸을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