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종말 (3)
피를 잔뜩 머금어 철퍽이는 진흙을 털어 내며 리히트 공작, 하르난 서비어가 주위를 돌아봤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어 주위 풍경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 가득한 시체와 많은 피들은 대부분 아군의 것이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하며, 그는 옆의 어느 기사의 시체에 단단히 쥐어져 있던 검을 빼냈다.
그와 한평생을 함께 했던 애병은 첫 충돌에서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죽게 되면 그 이름 없는 검과 함께 묻힐 줄 알았건만.'
휘익.
하르난이 기사의 검을 털어 냈다.
후두둑.
검에 몽글몽글 맺혀 뚝뚝 떨어지던 피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꺾인 나무에 가서 묻었다.
그가 호흡을 집중하며 검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모습이 변하는 기묘한 병기를 쓰는 저 애송이 녀석에게 이 검이 얼마나 버텨 줄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이 검뿐이었다.
"후우우……."
하르난 서비어는 평생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리히트 공작령은 제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공작령인 대신 다른 공작령의 1.3배는 될 정도로 넓은 땅이었으며, 그곳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출과 특산품은 중앙으로 올려 보내도 넉넉히 남아 가문의 창고를 두둑이 채워 주었다.
그는 그런 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당당히 공작 위에 올랐다.
같은 남부의 동갑내기 공작인 에베 공작을 서출인 이유로 무시하긴 했지만, 그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피장파장이라 생각했다.
여태껏 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를라 치면 그저 오러를 조금 끌어올려 주면 그만이었다.
서비어의 상징인 흰 눈과 인간을 뛰어넘는 영역의 오러를 본 이들은 제자리에서 엎드려 벌벌 떨기 일쑤였다.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무시한 2황자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1황자의 편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대군을 이끌고 수도로 향하고 싶었지만 빌어먹을 도시들이 좀 살 만해졌다고 봉기를 일으키는 통에 진압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동부의 카몰이라는 코딱지만 한 땅에 백작으로 봉해졌던 제뉴인 공작의 아들놈이 다른 지역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천둥벌거숭이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빠르게 봉기를 진압하고 수도로 진군해 2황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1황자 앞에 올려 1황자를 황제를 만들 생각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못해도 대공, 더 나아가 제국에서 독립하기를 원했다.
하르난 서비어는 절대 충신감은 못 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들과 딸 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
-같은 서비어인데, 왜 누구는 왕이고 누구는 공작이란 말이냐!
새어 나가면 경을 칠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자식들은 내심 그 발언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집령이 내렸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
또한 그는 뜻을 같이하기로 한 에베 공작이 시안과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천한 소생이 천한 짓을 했을 뿐이다. 놈의 목도 잘라다가 황자 마마의 즉위식에 올리면 아주 좋은 장식이 될 것이다."
이민족들이 물밀 듯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사누스가 자신을 배신하고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애송이와 동맹을 맺은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몰군의 집요한 추격에서 도망치면서도, 사누스 서비어와의 격돌로 정신을 잃고 후방으로 이송되었을 때도 그는 시안 몬트라우라는 이름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대한 검은 늑대를 타고 다니는 독특한 놈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자신과 비견되기에는 그저 시운을 조금 잘 타고 태어난 애송이라 생각했다.
'검은 늑대는 정말이라 하니 그 검은 늑대의 무용이 애송이의 것으로 와전된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이 패착이었다.
화아!
불 줄기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하르난은 공작이라는 체면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닥을 굴렀다.
"거기 계신가, 공작 나으리?"
하르난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땅이 열에 녹아 진득한 액체로 변한 것이 보였다.
그는 직감했다.
'이곳에서 패배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아직 나시와르와 툴리앗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고 남은 병력도 많다. 오러를 운용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 후에 정비 과정을 거치고 다시 진군하면 된다. 남부의 물산과 인력은 아직 남아 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안을 바라봤다.
시안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꾸물거리면서 날이 잔뜩 서 있는 긴 창으로 변했다.
'설령 이곳에서 패배할지라도 저놈은 죽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귀족들, 내 아들딸들에게 활로가 열릴 것이다. 저 미친놈은 이 전장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이곳의 승리는 더 큰 무언가를 얻기 위한 발판일 뿐. 저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쉬익!
시안이 창을 어깨 위로 들고 하르난을 향해 던졌다.
회전하며 다가오는 창끝이 시시각각 그의 시야을 덮쳤다.
까앙!
"크윽!"
검으로 막아 내기는 했지만 충격이 하르난의 내부를 마구 뒤흔들었고, 그 충격을 이겨 내기 위해 하르난은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이미 시안의 무기에 당한 상처가 다시 터지는 것이 느껴졌다.
입안에서도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하르난이 아직도 충격에 떨고 있는 검에 힘을 준 뒤, 재빠르게 신형을 앞으로 날렸다.
'이미 창을 던졌으니 놈은 빈손……!'
하르난의 예상과 다르게 시안의 오른손에는 다시 무언가 꿀렁이더니 방패가 만들어졌다.
콰앙 하는 폭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르난이 시안을 몰아붙이고 있었으나 시안 역시 방패로 잘 막아 내고 있었다.
방어하는 사이사이 오른손에서 불이나 마력탄이 하르난을 향해 터져 나왔다.
간단한 마법이라도 발동하려면 마법진이나 영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들 중 아주 극소수만이, 그것도 자신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마법사들이나 영창이나 마법진 없이 생각만으로 마나를 마법으로 즉시 변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안은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마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시안을 죽여야 한다는 하르난의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방패를 내리치던 하르난의 검이 방패에 닿은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검과 방패를 넘어 시안이 힘에 겨워 부들거리는 것이 하르난에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그러나 시안은 신경을 긁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어째 처음보다 많이 약해지셨소이다? 죽을 때가 다가오면 사람은 기저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끌어낸다던데, 아직이신가? 아! 이미 그것마저 다 써 버리신 게요?"
콰아아아아.
하르난은 저급한 도발에 응하느니 오러를 더 끌어내는 쪽을 택했다.
이 정도로 분노해서 전력을 다한 적이 언제였던가.
있기는 했었나.
슬슬 삐걱거리는 몸이 버텨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시안도 무기를 검으로 바꾼 뒤 태산을 가를 듯 짓누르는 하르난의 검에 맞서기 시작했다.
둘의 움직임은 느리지만 빨랐고, 빠르지만 느렸다.
오로지 상대를 죽여 없애겠다는 의지가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묻어났다.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검의 궤적에 주위로 폭풍과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각자의 주군을 돕기 위해 돌입하려던 기사들이 시안과 하르난이 만들어 낸 바람만으로도 상처 입고 뒤로 물러섰다.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르셨단 말인가……."
검은늑대 기사단의 단장, 칼이 낮게 읊조렸다.
사누아와 하르난의 격투를 보고 괴물이라며 놀라워하던 시안이었지만, 지금 시안은 하르난에게 전혀 밀리고 있지 않았다.
찰나의 헛된 판단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혈전이었다.
그리고 칼은 주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보았다.
'내가 미친 건가?'
칼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거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비껴 맞아도 사망일 것이 분명한 리히트 공작의 검을 상대하면서 시안이 웃고 있다니, 칼은 눈에 더욱 오러를 집중해서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시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은 에베 공작에 비하면 얼마나 약한 거요?"
시안의 말이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도발이나 비꼼의 의도가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의문에서 나온 말투였다.
오히려 그 순수함이 하르난을 더 분노하게 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호흡을 잠시 진정시킨 뒤, 다시 한번 검을 찔러 가며 포효했다.
"잠시 방심했을 뿐, 그 천한 녀석보다 내가 못하지 않다!"
"그런 거요?"
시안이 움직이는 것을 본 하르난은 시안이 자신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세를 취한다고 생각했다.
콰직!
다음 순간 하르난은 마치 몸 곳곳의 관절이 풀려 버린 듯,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 곳곳을 지지하던 오러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러가 밖으로 마구 새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기분에 하르난은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려 했다.
'무슨 짓을!'
그러나 그저 의도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 그의 말은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주륵.
그는 무언가 흘러 갑옷의 가슴 부위 안쪽을 적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힘이 빠져 버렸으나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최대한 시안을 경계한 채로 검을 잡고 있던 손 중 한 손을 놓았다.
손을 올려 이 축축한 액체가 무엇인지 손을 대 본 순간 그는 화들짝 놀랐다.
'어째서…….'
자신은 자연스럽게 손을 목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투구에서 이어져 내려온 목 가리개가 가리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아무 의심 없이 목으로 손을 가져갔을까.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람이 들어와 자신의 목 주위를 간질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시안의 찌른 창이 자신의 목 가리개를 부수고 목까지 관통해 버렸고, 자신은 미처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하르난의 머릿속에 몰려 들어왔다.
그의 목에 난 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밀려나오고 있었다.
'나와 상대하면서 전력을 내지 않은 게냐!'
하르난이 부릅뜬 눈으로 시안에게 외쳤지만 목에서 피만 더 많이 뿜어져 나왔을 뿐, 시안에게까지 전달되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새하얗게 변해 있던 그의 눈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매서움도, 총기도 그 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기를 잃은 눈만이 멍하니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리히트 공작, 하르난 서비어는 선 채로 목이 뚫려 죽음을 맞았다.
털썩.
마나 소드를 없앤 시안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라드마 이후 큰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도 다 늙어 가는 노인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서비어도 무력으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입에 차오른 피를 뱉은 시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록 피가 흐려져 많이 약해졌겠지만, 무신이라 일컬어지던 자의 후손을 직접 죽였다.
믿기지가 않아 손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시안이 몸을 살폈다.
사지가 잘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몸이 온통 긁히고 베인 상처투성이였다.
마법도 한계치에 가깝게 써 대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극도의 어지럼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리히트 공작을 죽였을 뿐, 전투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공작의 죽음을 본 적들이 패주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늑대는 상처 입은 사냥감을 놓아 보내지 않는다.
더욱더 맹렬히 추격해서 결국 사냥감의 피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늑대다.
시안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시안! 시안!
적군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제법 고전하고 있던 투브가 마침내 포위망을 부수고 시안의 앞에 도달했다.
-정신 차려! 시안!
무너지려는 시안을 투브가 자신의 몸으로 지탱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을게.'
지금은 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시안도 잘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말을 타고 다가와 낙마하듯 굴러 시안에게 접근했다.
"각하! 각하!"
시안은 흐려지는 눈을 찌푸려 투구를 내팽개치고 급하게 가면을 벗은 남자를 확인했다.
"로하나스군."
"그렇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괜찮아 보이냐 인마? 그리고 기껏 히베아에서 구해 온 건데 투구를 그렇게 내던지면 어떻게 해……."
시안의 농담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로하나스가 시안을 와락 안았다.
"해내셨습니다! 각하께서 리히트 공작을 죽이셨습니다! 저는 각하께서 해내실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그만 어떻게 되신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안도감에 로하나스가 말을 두서없이 마구 내뱉었다.
시안은 남자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로하나스를 밀어낼 힘이 없었기에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로하나스."
"예! 각하!"
"이럴 시간에 가서 하나라도 더 죽이고 사로잡아. 오늘 적을 끝장낸다고 하지 않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