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그 이후 (1)
어느 병법가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100번, 1,000번의 싸움을 겪고 또다시 100번, 1,000번의 모략과 계략을 몸소 체험해야 비로소 맛이라도 볼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전략과 전술이 각자의 유용함을 주창하지만, 결국 전쟁의 가장 기본은 많은 수로 적은 수를 압박하는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깨트리기 위한 전략 전술이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전 삶과 이번 삶, 두 번의 삶 모두 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저 견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사실이었다.
소수가 다수를 깨트리기 위한 전략 전술이 있다는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지만, 다수가 소수를 상대할 때 더 큰 효율을 보여 주고 적은 피해를 보장하는 것이 전략과 전술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두 배 가까운 수의 적에게 승리한 이 전투의 승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시안!"
본영으로 돌아와 격통을 일으키는 몸을 이끌고 투브에게서 내리니 그레이스가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 깨진 갑옷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는 개의치 않는 것인지 그레이스가 나를 와락 안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레이스의 포옹에 나는 잔뜩 얼어 버렸다.
"각하…… 이게 무슨……."
"다행이야, 다행입니다. 리히트 공작과 상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잘했어, 잘하셨습니다."
걱정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그레이스는 반말과 존대를 마구 뒤섞어서 말하고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겠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같은 남자인 로하나스에게 안겨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보기 좋아?
'나 뭔가 알아챈 것 같아.'
-뭐?
'왜 네가 그리 여자들에게 쓰다듬어지는 걸 좋아하는지.'
그레이스의 어깨 너머에 보이는 투브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나는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통했음을 알았다.
지금 그레이스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각자의 손을 마주쳤으리.
"각하?"
내가 부르자 그제야 그레이스가 좀 떨어졌다.
깔끔했던 그녀의 갑옷에 내 피와 내가 묻혀 온 다른 이들의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갑옷에 묻은 것처럼 붉지는 않았지만 그레이스의 얼굴도 조금 붉어져 있는 듯했다.
"제가 무사히 복귀했으니 대리 권한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어? 아! 예! 그리하시지요."
"상황 보고를 듣겠습니다. 모두 안으로."
"몸은……."
"괜찮습니다."
리히트 공작과의 전투가 끝난 직후에는 정말 그냥 누워서 쉬고 싶을 정도로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된 상태였다.
얕은 찰과상은 이미 아물기 시작했을 정도이니 변환 인자의 성능이 미쳤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순간 머리에 강궁병이 죽어 가며 내뱉은 목소리가 기억났다.
-으, 으…… 괴물…….
피식 웃어 버렸다.
이미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괴물이 되어 가는지도 몰랐다.
기왕 괴물이라면 끝없이 복수를 탐하는 복수귀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지휘 막사로 올라가며 투브에게도 말했다.
'뭐 해? 안 와?'
투브가 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 못 읽는 건 알아 줘야 해.
'뭔 소리야.'
-주위 좀 봐라.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얼굴이 붉어진 그레이스와 뭔가 충족되지 못한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참모들이 보였다.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누군지 모르겠지만 '하!' 하는 긴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 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서 올라가시죠."
그레이스가 뛰듯이 먼저 지휘 막사로 향했고 다른 참모들도 그 뒤를 따랐다.
왠지 나를 흘끔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사 수준 하고는…….. 너는 등신 호구다, 등신 호구. 알았냐?
왜?
***
일련의 소동 아닌 소동이 정리된 후, 지휘 막사 안에서는 계속해서 보고가 이어졌다.
"사망 추정 인원 아군 2,000 미만, 적군 30,000 이상. 부상 추정 인원 아군 5,000 미만, 적군 추산 불가입니다."
"사망이 확인된 적 지휘관은 리히트 공작, 란겔 백작, 카미나리 후작 등 백작 이상의 귀족만 약 50명이며, 군인과 백작 이하 귀족들로 추산 범위를 늘리면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지만 4배 혹은 5배 이상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16군단, 362 독립 대대, 6902 특수 여단에 소속되어 있던 마법사 중 생존자는 없습니다. 직접 명부와 대조해서 확인한 결과입니다. 기록 날짜가 6개월 전이므로 추후 증원되어 제국군 인명부에 없는 인원들도 있을 수 있으나 마나 감지에 특화된 마법사들이 일선에서 확인 중입니다."
"남부군에 있던 약 120여 개의 주요 가문의 기사단 중 전력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가문은 10개가 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도 대부분 영세한 자작이나 남작 들의 기사단입니다."
"나시와르 왕국의 전투 마법사 부대 전원 생포에 성공했습니다."
"툴리앗 왕국의 산양 기병 부대는 절반 이상 사살했고, 현재도 추격 중이라는 통신입니다."
각자가 준비된 자료를 들이밀며 내게 과시하듯 전공을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고하고 있는 중에도 전장에서 새로운 보고가 들어와 내용을 수정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자명했다.
적의 절반도 안 되는 인원으로 대승을 거뒀다는 사실이었다.
"패주하는 적을 쫓는다. 항복하는 자는 포로로 삼고 저항하는 자는 죽인다. 이상."
간단한 명령이었지만 더 이상의 명령도 필요 없었다.
승기를 잡았으니 몰아칠 뿐.
더 이상의 지시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개인 막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에 서 있던 종자 하나가 에베 공작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오셨소이까."
"전장에 뿌린 그것은 대체 뭐요."
"그렇게 물어보면 냉큼 답할 것 같았소?"
"카몰 후작! 당신이 지금 한 것이 무슨 짓인지 아시오?"
"잘 알고 있소. 나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외다."
눈을 똑바로 뜨고 에베 공작을 바라봤다.
"누구든 오러를 사용하는 자가 내 앞에 서면 그동안 오러를 익혀 왔던 시간에 관계없이 오러가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소?"
"미쳤군. 당신은 완전히 미쳤어!"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훨씬 많을 것이오."
"농담하는 것 같소?"
"전혀."
에베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신무기가 지닌 위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이런 논의는 무의미했다.
"짐작하고 있을 것 같소만, 나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싫어하오. 안 그래도 피곤하니 본론만 얘기하시오."
"……카몰 후작, 후회하게 될 거요."
"용건은 그게 다요?"
"에이젤과 얀타라나를 돌려주시오."
"성공하셨나 보오?"
에베 공작이 밖으로 나가 뭔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애원하는 소리, 질질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막의 입구가 열리고 포박된 2명의 사람이 에베 공작의 손에 들려 들어왔다.
"약속은 지켰소."
밖에 있는 시종을 불러 에이젤을 데려오게 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는 좀 나아진 상태였지만, 여전히 몸 이곳저곳이 부어오르고 푸르게 변해 있는 에이젤이 포박된 채로 끌려 들어왔다.
그는 나와 에베 공작, 그리고 한쪽에 쭈그러져 있는 2명을 보고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버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에이젤을 살려 달라고 에베 공작이 내게 부탁할 때, 에이젤은 기절해 있었기 때문에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에이젤이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에베 공작이 차갑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에이젤. 네 처우는 제국 도원수께서 결정하실 문제다."
에이젤의 다급한 시선이 내게 와서 닿았다.
"각하! 아니 장군! 제발 자비를!"
"에이젤."
"예!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를!"
"그대의 아비가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았나. 더 이상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냉엄한 내 명령에 에이젤이 한순간 굳어 버렸다.
그런 에이젤을 내버려 두고 에베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신다더니 헛된 자신감은 아니었나 보오?"
에베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그는 품에서 내가 주었던 가면을 꺼내어 내 앞으로 던졌다.
"상대 기사들, 아니 오러를 운용하지 못했으니 기사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소이다. 여하튼 그렇게 기사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놨는데 저 부녀를 생포해 오는 것은 바보라도 할 수 있었을 거요! 카몰 후작! 그대는 말도 안 되는 짓으로 기사의 긍지를 꺾어 버렸소. 이 전장에서 있었던 일이 머지않아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이오. 그리고 오러에 대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뒹굴겠지! 당신이 전장에 뿌려 댄 그 가루 때문에! 그대 탓에 기사의 수는 줄어들 것이고 제국의 안위가 위협받게 될 것이오! 제국이 다른 왕국들보다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이유는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정립된 오러의 기본 운용 방식과, 그것을 기반으로 다양한 방식과 특성을 접목해 발전시켜 나가는 각 기사단의 뼈를 깎는 노력에 있소. 설마 그것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대가 오늘 가지고 온 그 정체 모를 것 때문에 이제 오러를 통해 기사의 길에 오르려는 자가 훨씬 줄어들 것이오!"
비록 서비어 핏줄의 특혜를 입었지만 에베 공작 본인은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무인이자 기사였다.
자신이 평생 가져왔던 신념과 믿음이 오늘 뿌리부터 뽑혀 나간 탓인지, 귀족 중 가장 미쳤다는 그의 평소 명성과는 달리 아주 또박또박하고 날이 선 말투로 내게 긴 연설을 털어 놓았다.
"다 마치셨소?"
에베 공작이 내 발치에 던져 놓은 가면을 툭툭 털어 탁상에 올려놓았다.
"'앞으로 다시는 이 무기를 쓰지 않겠소.' 이런 가냘픈 허언이라도 듣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소이다. 무엇보다 서비어의 핏줄을 타고 세상에 나와 다른 기사들의 반절도 안 되는 노력으로 경지에 오른 자가 마치 평생 무를 추구한 것처럼 기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웃기는 일이오. 위선은 집어치우기를 충고드리겠소. 제국의 안위? 그리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분이라서 이민족들이 침공할 때는 입을 싹 닫고 있다가 본인의 영지가 침탈당하고 나서야 움직이셨소?"
에베 공작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솔직히 말하시오! 에베 공작, 사누스 서비어는 카몰 후작이 가지고 있는 오러를 운용하지 못하게 하는 물질이 두렵다고!"
덜컥.
내 마나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는 보관함에 마나를 흘려 넣자 봉인이 풀리면서 가운데가 불룩한 천이 나왔다.
그것을 그대로 집어 에베 공작에게 집어 던졌다.
"그 인간 말종과 함께 가져가시오!"
내 폭언에 던진 천을 받을 정신도 없었는지 에베 공작의 갑옷에 맞은 천이 데구르르 풀리며 안에 있던 얀타라나가 드러났다.
"화를 내고 싶거든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싶거든 욕을 하시오. 그러나 나는 내 행동에 당당하오. 이 끔찍한 내전을 끝내기 위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오! 당신이 주위 세력과 야합해서 어떻게 하면 대공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간에 나는 승리를 열망했고, 그 결과가 오늘의 전장이오. 세상 만인이 나를 욕해도 나는 내게 당당하단 말이오! 그대는 입에 올렸던 기사의 긍지를 걸고 그대에게 당당하시오? 에베 공작!"
한참을 내가 씩씩대고 있자 에베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선을 넘었소, 미안하외다."
그리고 몸을 숙여 얀타라나를 소중하게 다시 천에 감싸 품에 챙겼다.
그가 손으로 에이젤의 뒷덜미를 잡고 나가려는 순간, 나는 그를 제지했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