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君)과 신(臣) (1)
"이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표기장군에 임명한다는 황제의 칙서를 받고 개인 막사로 돌아오는 길, 그레이스가 따라붙었다.
"말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방금 도원수의 직책을 잃었기에 각하의 상관이 아닙니다."
내 말에도 그레이스의 말투는 여전히 존대였다.
분통을 내도 내가 낼 상황이건만, 그녀가 오히려 더 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됩니다! 아직 내전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제국의 경계 바깥으로 원정을 보내신단 말입니까!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착오는 없습니다. 칙서에 찍힌 폐하의 직인을 직접 눈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왜 이리 담담하십니까! 이것은 마치……!"
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이스도 걸음을 멈추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개로 변해 내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투브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말했다.
"마치 제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다. 맞습니까?"
그레이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는 많은 이들이 우리를 향해 경례를 하고 각자 자기 일을 하러 뛰어가고 있을 뿐, 누구도 내 말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나로 막을 만들었습니다. 들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안!"
그런 그레이스를 뒤에 남겨 두고 말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산탄다르군 주둔지로 돌아가시지요. 곧 북부 전선으로 합류하려면 준비하실 것이 많을 겁니다."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녀가 입술을 꾹 씹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홱 하니 몸을 돌려 멀어져 버렸다.
'가라고 한 건 나지만 인사도 안 하고 가 버리는 건 좀 서운한데.'
-저거 관리 잘해라. 표정 보니까 사고 쳐도 단단히 칠 표정이야.
'뭐 읽었어?'
-나는 미래를 읽는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특성이나 성격 정도야. 같이 지내 보면 웬만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지. 쟤 성격 몰라?
하긴, 여걸 중의 여걸이니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요새는 이상하게 친근하게 굴긴 했지만…….
막사로 돌아와 갑옷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책상에는 황제, 넓게 보아 황족의 색인 흰색 무늬가 아름답게 그려진 황제의 칙서가 놓여 있었다.
물론 나를 표기장군으로 임명해 나시와르와 툴리앗 정벌을 명하는 칙서였다.
보고 있자니 작게 욕이 튀어나왔다.
"……개새끼."
이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서비어 개새끼! 황제 개새끼!"
한참 그렇게 욕을 쏟아 내자 투브가 나를 보고 말했다.
-드디어 전쟁의 광기에 잠식되어 버린 게야……? 어찌하면 좋누…….
'농담할 때가 아니야!'
-나도 대충 들어서 알아. 네 아래 있던 군세를 조각조각 내고 말도 안 되는 병력만 가지고 적국을 정벌하라는 거 아니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예상은 했는데……. 이건 너무 일러! 너무 거나하게 일을 저지른 건가? 아니면 수도에 나를 견제하는 다른 귀족이 있는 건가?'
당장은 도원수에서 내려왔지만 나는 제국 동부와 남부를 평정한 상태였다.
남부군을 대파한 이후 아직도 저항하는 소수의 영주가 있었지만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곧 힘의 논리에 의해 잔혹한 철퇴를 맞을 자들이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가 아주 미약했다는 데 있었다.
힘과 힘이 충돌하면 승자와 패자 모두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진리에 가까운 사실이다.
그러나 저비스가 감자에서 추출한 오러 운용 방해 물질로 인해 아군은 손쉽게 승리를 얻어 내고 있었다.
대규모 회전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위용은 남부 전역에 안 퍼진 곳이 없어서 아군의 깃발만 보여도 쉽게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충성도와는 별개로 남부군 대부분을 내 아래 복속시켰고, 현재 내 아래 있는 공작만 산탄다르와 에베, 둘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대규모 군단만 셋이 있었고, 함대 역시 누이론트 공작의 활약으로 남부에 주둔 중이던 3함대와 6함대 일부를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다 해서 40만, 빡빡하게 병력을 징발하면 50만까지도 내다볼 수 있는 수였다.
이전 삶에서 분리 운동이 정리된 뒤, 왕국 정벌을 위해 내게 주어진 병력의 수가 25만 남짓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엄청난 규모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역시 문제는.
'오러 운용 방해 물질이겠지.'
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본 서비어 핏줄뿐만 아니라 에베 공작과 리히트 공작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오러를 지니고 있었어. 그런데 자신들의 무력(武力)이 한순간에 무력화(無力化)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어. 당연히 반갑지 않겠지.
에베 공작이 나를 비난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내 곁에 있는 것도 불편한지 병력 일부만을 남겨 두고 에이젤과 함께 에베로 돌아간 상태였다.
'차라리 내가 패배했다면 황제가 내게 칙서를 보내는 일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패배했다면 이 내전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되었다면 스와라 위샤인을 포로로 붙잡는 일은 요원해졌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훨씬 많은 수의 적이었다.
내 생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 무리한 행보를 한 걸까, 이 칙서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 것인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시종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각하께 공작 각하께서 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시끄러워! 비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각하?"
그레이스였다.
그리고 그녀 뒤에는 줄줄이 카몰의 백작들이 따라 들어왔다.
내가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누이론트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각하, 황제 폐하의 처사는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는 처사입니다. 각하께서 폐하께 보인 충성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도 남는데 어찌 이리도 박대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잘한 일에 대해서는 상을 주고, 못한 일에는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각하께서 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토나 백작이 나섰다.
"안즈 침공, 리벤트 침공, 일야관 전투 그리고 남부군과의 전투까지. 저는 모든 전투에서 각하와 함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각하 혼자서 이루어 낼 수 있었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단박에 아니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전투 중 단 한 번이라도 각하가 계시지 않았다면 어느 하나 쉽게 볼 일이 아니었습니다. 각하께서 이루신 업적은 각하 이외에는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황제 폐하가 각하 대신 계셨어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처음에 주위 백작들을 선동해서 내게 반기를 들고, 발시안 앞에서 병력을 아낀다고 적극적인 전투를 거부했던 스토나 백작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말.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정말 충심을 다해서 나를 섬겼다.
스토나 백작의 말은 어느새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이 있었고, 제법 많은 것이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레이스가 나를 불렀다.
"시안."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레이스는 결연하게 말했다.
"지금 황제는 황제가 아니야."
짧은 말이지만 많은 것이 함축된 말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황제였다.
제국 직할령뿐만 아니라 황제 개인이 소유한 땅에서 나오는 풍부한 재물과 각 영주들이 올려 보내는 세수(稅收)와 봉납으로 인해 황제는 귀족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엄격한 사병 통제와 병권 확보로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원칙적으로 황제는 귀족원을 비롯한 기타 귀족들의 결정에 의사를 내비치지 못했지만, 혈연관계인 귀족들을 통해 암암리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두가 눈감고 쉬쉬하는 사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정청이나 견정관 같은 견제 기구들을 이용해 끊임없이 귀족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평시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일일뿐, 내전 발발 이후 많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영지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들을 사병화하는 데 성공했다.
초기에는 현재의 황제를 지지하는 사령관들이 꽤 있었으나 그것도 제국에서 봉급이 내려와야 가능한 일, 전 국토가 전쟁에 휘말려 안정적인 세수 확보가 힘든 지금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군부대에 봉급과 군량을 보내는 일도, 무사히 도달하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결국 사령관들은 부대를 이끌고 근처의 영주에게 의탁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주들은 군부대의 부양을 핑계로 세금과 봉물을 올려 보내지 않으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현재에 와서는 사실상 황제의 통제 아래 있는 부대는 수도방위병단과 수도 주위의 몇몇 소규모 독립 부대들 외에는 없다고 봐도 좋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많던 직할령들도 전란에 휘말려 주위 영주들이 은근슬쩍 병합하거나, 병합당하지 않았어도 자력 보호를 위해 곡물이나 세금을 올려 보내지 않고 축적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냉정히 이야기해 황제는 제국의 혈통이라는 상징성만 가지고 있을 뿐, 실제 무력은 백작령 수준, 잘 쳐 줘야지 작은 후작령 수준이었다.
"황제와 귀족들의 관계는 봉토를 매개로 하는 계약 관계야. 특히나 몬트라우 가문과 바크하임 가문은 제국에 병합되기 이전에는 각자 왕국이었던 곳. 공작 가문과 황실과의 혼인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니 직접적인 혈연이 닿아 있지도 않지."
유력 가문과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를 맺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 것은 귀족들 간에서는 아주 흔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나, 황실은 서비어의 피가 흐려지거나 공작 가문에서 강하게 발현되는 것을 두려워한 탓인지 아예 공작 가문과의 혼인을 금지한다고 국법으로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작 가문에서 분가해 나온 백작 이하 가문들과의 혼인이 여러 번 이루어져 엄연히 따지면 몇 다리 건너서 다들 황실과 친척 관계이긴 했지만, 나나 그레이스처럼 가문의 적통인 경우에는 그레이스 말과 같이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너와 카몰의 영주들 간의 관계처럼, 우리는 황제에게 있어 가신과 같은 존재야. 가신을 대함에 있어 다소간의 편애는 있을지언정, 지금과 같은 전시에 신상필벌을 논함에 있어서는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공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폐하께서 네게 내리신 이 칙명은 말도 안 돼. 3만 남짓한 병사로 적국을 치라니! 차라리 등짐을 지고 불로 들어가라고 하지!"
나는 팔짱을 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그레이스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경우가 너 한 번으로 끝날까? 아직 내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제는 네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내전이 끝나면? 네게 한 것처럼 다른 귀족들에게도 불가능하거나 죽음에 가까운 과업을 주지 않겠어?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혹독하게 목줄을 조이겠지. 자신의 권위를 위협했던 너라는 전례가 있었으니까."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병력을 수도로 돌려. 산탄다르 공작 그레이스 바크하임은 카몰 후작을 지지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