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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12화 (112/180)

군(君)과 신(臣) (2)

"병력을 수도로 돌려, 산탄다르 공작 그레이스 바크하임은 카몰 후작을 지지하겠어."

그레이스의 말에 침묵이 찾아왔다.

여전히 그레이스의 뒤에 있는 백작들을 향해 내가 물었다.

"그대들은 공작 각하의 말에 동의했으니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고맙게 생각하겠어. 각하와 나누고 싶은 말이 있으니 다들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모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되어야 함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내 말에 백작들이 차례로 막사 밖을 빠져나갔다.

누이론트 백작이 마지막에 나가며 잠깐 걸음을 멈추었지만, 이내 다른 백작들의 뒤를 따라 빠져나갔다.

"앉으시지요."

여전히 서 있던 그레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내 호의를 거절한 채, 여전히 서서 말했다.

"왜 이렇게 느긋해! 행동하려면 빠르게 결정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이래?"

그런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내전이 시작된 이후, 산탄다르 공작령은 주위 군소 영주들의 땅을 흡수해서 지금은 내전 이전의 산탄다르 공작령과 비교해 1.5배에 가까운 영지를 가지고 계시다지요?"

"그 얘기가 왜……."

"현 상황에서 7개의 공작 가문 중 제뉴인과 더불어 영지에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요. 제뉴인은 그랑베르트 공작령을 지원하느라 바쁜 반면, 각하께서는 남부의 승전으로 얻어지는 전리품들을 산탄다르로 보내기까지 하고 계시니 이 내전으로 가장 많은 득을 얻어 가는 것은 각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레이스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시안?"

그런 그레이스를 향해 다시 물었다.

"병력을 수도로 향한다고 할 때, 어떤 결과를 바라십니까? 제가 왕이 되는 것? 아니면 새로운 황제가 되는 것? 황제 폐하를 압박해 유명무실한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 귀족원의 힘을 키우는 것? 이것은 제가 아니라도 가능합니다. 제 아래 50만에 가까운 전투 병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가 수도로 향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갈가리 찢겨 제 뒤를 노릴 병력이기도 합니다. 역도 소탕을 목표로 삼고 끌어들인 자들이지 역성혁명이나 반정을 노리고 모은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

"정말로 저처럼 말로 쓰이다 버려질 것이 두려우시다면 저를 충동질할 필요 없이 각하 단독으로 움직여도 가능하십니다. 이미 차고 넘치지요."

"나는 공작이야! 명분이……"

재빠르게 그녀의 말을 막았다.

"어느 변경백이 왕을 칭하고, 제국의 1황자라는 작자가 내전의 승리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을 때부터 명분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명분과 대의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저 아귀다툼의 장이 된 것이 지금의 제국입니다."

품에서 신분 패를 꺼냈다.

비록 이전 삶에서의 그레이스 바크하임은 칭왕을 하여 내 손에 의해 죽게 되었지만, 지금의 그레이스는 충실한 내 조력자였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야심을 경계해야 했다.

"가장 온전히 세력을 보존하고 계신 각하께서 제 편을 들어주신 것에 대해 무한한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이고 상황이 상황이기에 각하께서 저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아 두고 싶습니다."

후작의 색인 금색 신분 패를 그레이스의 앞으로 밀어 두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물었다.

"생각해 둔 게 있나 봐?"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확약 전까지는 말하지 않겠지?"

그레이스 역시 품속에서 신분 패를 꺼냈다.

공작의 색인 붉은 신분 패였다.

내 신분 패 옆에 자신의 신분 패를 나란히 놓은 뒤, 그레이스가 검을 뽑아 두 개의 신분 패를 가로로 잘랐다.

그리고 잘려 나간 두 신분 패의 아래 조각을 서로 바꿔 놓았다.

윗부분이 금색, 아래가 붉은색인 신분 패 하나와 윗부분이 붉고 아래가 금색인 신분 패 하나가 만들어졌다.

윗부분이 붉고 아래가 금색인 신분 패를 집어 들어 품에 넣은 그레이스가 남은 두 조각을 다시 내 쪽으로 밀어 두고 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참나, 내 신분 패를 자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난 내 앞에 있는 위쪽이 금색이고 아래가 붉은 신분 패를 챙기며 말했다.

"말만 하는 것보다야 이렇게 물증이 있는 편이 서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됐어, 생각한 거나 말해."

"각하께서는 제국에 충성하십니까?"

그레이스가 그런 것은 왜 묻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제국과 황제, 황실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다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언반구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황제 앞에서는 입에 발린 충성을 외치지만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황제는 나를 이용하고 버리는 말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야말로 황제를 철저히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짠 판에서 움직이는 말에게 충성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황제의 권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황에서는 공작인 그레이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니지."

"무신의 후예, 건국자의 후손이지만 그들 역시 사람입니다. 감정을 가지고 실수를 하지요. 그리고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만 결국 평생을 황궁에서 나오지 못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황제입니다. 그 무지를 무력과 위엄으로 덮을 뿐입니다."

"……."

"황제는 저를 두려워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네 아래 있는 병력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일부입니다. 아니, 일부라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미약하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황제에게로 향한다면 당장이라도 반발할 것입니다. 아무리 명분이 사라진 시대라지만 제국군이라는 이름은 제국과 황제의 존재하에 지속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그레이스의 눈이 반짝이고 몸이 앞으로 기우는 것이 보였다.

제법 흥미 있어 하는 눈치였다.

"하나, 충성입니다. 지금의 황제가 황자였던 시절, 그는 무던히도 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전이 시작되고 난 이후에도 신하의 예 이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동부와 남부를 거의 평정한 지금, 황제는 의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제가 여전히 충성할지 말입니다. 어쩌면 황제 주변의 누군가가 그렇게 획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으로?"

"이것만이 아니지요. 평시였다면 저의 행동이나 태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아니라도 충성을 다하는 영주들이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는 어느 정도의 상징성만 가진 채로 실권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황제도, 1황자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서 내전이 끝나고 자신들에게 다시 권력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이전 삶에서 역시 분리 운동이 끝난 후 영주들의 세력이 커졌으나, 황제가 왕국 정벌을 천명함으로써 영주들에게 넘어갔던 병권을 성공적으로 회수할 수 있었다.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황제의 선봉 역을 했으니 귀족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 만도 했다.

그러나 나를 배척한 것은 결국 귀족들이 아니었던가.

후회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통쾌했다.

"결국 네 충성을 의심한다는 거네. 그건 내가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아. 네가 다른 왕국으로 가게 되면, 황제는 언제라도 다른 귀족들에게 똑같이 할 거야. 네 예를 들면서 말이지. 난 그걸 방지하고자 하는 거고."

"더 큰 이유는 두 번째 이유에 있습니다."

"뭔데?"

"저를 견제할 세력이나 인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

"병력을 수도로 돌리면 제 아래 병력이 갈가리 찢어질 것이라는 말은 곧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도원수직은 잃었지만 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제국의 적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계속 병력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제가 쌓아 온 업적이 제 말을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고 확실한 이유이기에 반박을 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노체 공작과 루지온 공작이 1황자를 보호하고 있으며, 이민족들이 제국 서부와 북부 곳곳을 쑤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드와이트는 주위로 영역을 넓히려 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중 누구도 저만큼의 세력과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레이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황제 입장에서는 전후를 생각했을 때 고만고만하게 피해 입은 귀족들과 영주들이 있는 편이 좋을 것인데, 너는 지금 너무 커져 버렸다는 말이군. 게다가 그 알 수 없는 반짝이까지."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알려고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비밀이 많은 남자는 가까이하지 말랬는데."

"판단과 행동은 각하의 몫입니다."

"한마디를 안 지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신분 패도 나눠 가졌겠다, 버릴 놈들은 버리고 수도로 향할 거야?"

"저는 병력을 유지한 채로 제국 밖을 넘어서 왕국들을 칠 겁니다."

"어떻게?"

"황제가 걱정하는 두 가지를 해결하면 됩니다. 먼저, 각하와 산탄다르군을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제 휘하에서 벗어나서 북부 전선으로 가시는 겁니다. 도중에 수도에 들러서 제가 겸허하게 황제의 의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말, 한마디만 해 주시면 됩니다. 제 충성에 대한 빈자리를 각하께서 채워 주는 것이지요."

"우리가 빠지면 전력 공백이 클 텐데?"

"남부에서 징발하면 큰 문제는 아닐 겁니다. 써먹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겠지만요."

"아예 내가 너를 헐뜯으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충성을 보여 줌과 동시에 너를 견제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세력이 줄었어도 황제는 황제입니다. 이곳 진영뿐만 아니라 저와 각하의 영지 곳곳에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숨겨 놓았을 겁니다. 갑자기 저를 비방하면 오히려 의심할 겁니다."

"그럼 너를 견제하는 인물은 어떻게 할 건데? 그게 더 큰 문제잖아."

내 입꼬리가 음흉하게 귀에 걸렸다.

"적은 만들어 낼 수도 있는 법입니다."

***

며칠 뒤, 많은 이들이 그레이스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정말 아쉽습니다."

"왕국들을 부수고 돌아올 테니, 그동안 역도의 무리를 소탕하셔야 합니다!"

"내전이 끝나면 은퇴하고 산탄다르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북부의 전장으로 합류하기 위해 떠나는 그레이스를 향해 남겨진 이들이 하나씩 농담이나 덕담을 건넸다.

그레이스가 여자에 공작이라 처음에는 상당히 껄끄러워하던 장교들이나 다른 귀족들도 같이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있어 그런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밝은 얼굴로 모두와 인사를 나눈 그레이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잠깐 걷지?"

그레이스와 함께 걷는 사이, 그녀가 내게 슬쩍 물었다.

"홈 위샤인 백작과 스와라 위샤인이 탈출했다던데?"

"말씀 그대로입니다. 철통 경비를 어떻게 뚫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다시 물었다.

"놀고 있네, 일부러 모른 척한 거지? 그 둘이 네가 생각한 너를 견제할 인물이야?"

"견제라고 하면 둘에게 과분하고, 황제에게 일말의 안정감을 줄 정도는 되지요."

"그럴까? 나는 잘 모르겠던데."

"제가 기대한 만큼은 할 겁니다."

피를 토하는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던 나이든 스와라, 포로인데도 불구하고 내 얼굴에 침을 뱉던 젊은 스와라.

어느 쪽이든 독기와 수완만큼은 대단했다.

"둘이 남은 남부군을 규합해서 나시와르 왕국으로 갔다던데, 그걸 핑계로 병권을 쥐고 있을 셈이지?"

"아무래도 카몰군만으로 왕국을 침공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이기고 돌아와."

"그럴 생각입니다. 황제가 찍소리도 못 할 만큼 거대해져서 돌아와야지요."

어느덧 우리는 산탄다르 군영 앞에 도착했다.

이제 그레이스는 북으로 떠나야 하고, 나는 내가 풀어 준 놈들을 따라 남으로 가야 한다.

말에 오른 그레이스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거 알고 있었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분 패 나눠 가지는 거, 전쟁터로 정인(情人)을 보낼 때 그렇게 하는 거래."

"그런 소리는 들어 본 적이……."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레이스가 우렁차게 외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럇! 나중에 봐!"

그걸 보고 있던 투브가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하하하하하! 저거 일 크게 치른다고 했지? 정인이란다 정인! 아이고, 웃겨라!

'그걸 왜 나한테…….'

떠나가는 산탄다르군을 보며 고민하고 있자니 로하나스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각하, 명하신 대로 위샤인 부녀를 몰래 풀어 주긴 했습니다만 꼭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까? 둘의 무력은 별것 아니지만 리히트 공작이 죽은 지금 둘은 남부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로하나스의 어깨에 팔을 걸고 조용히 말했다.

"로하나스."

"예."

"너는 아직 안 익은 과일을 먹냐?"

"굳이 그럴 필요가……."

"그렇지, 같은 거야."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하나스를 뒤로하고 내 막사로 올라왔다.

스와라는 아직 영글지 않은 열매였다.

더 윤기가 나고, 더 달콤해질 때 복수의 과실을 수확해서 온통 만신창이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야 최고의 위치를 목전에 두고 나락으로 떨어진 내 기분을 아주 조금이나마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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