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별 (1)
"교착 상태에 이르렀군."
사힘 왕국의 1왕자이자 야전 사령관, 리오스 드와이트가 지도에 대략적으로 표시된 각 영주의 세력 범위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카몰 후작 시안 몬트라우가 표기장군을 제수받고 제국의 남부 경계 바깥으로 나간 것이 약 한 달쯤 전이었다.
전쟁의 판도를 손에 쥐고 흔들었던 시안이기에 그의 이탈은 제국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일단 시안의 아버지인 제뉴인 공작, 제로 몬트라우가 격분했다.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며 수도에 몇 번이고 사절을 보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결국 그동안 자신의 영지인 것처럼 헌신적으로 그랑베르트 공작령 방어에 힘을 쏟았던 제뉴인 공작은 병력을 모두 물려 버렸다.
대놓고 황제의 뜻에 어깃장을 놓는 행위였다.
북부의 히베아군이 황제파에 합류한 이후로 조금씩 그랑베르트에서 1황자군을 밀어내고 있었으나, 제뉴인 공작이 전장에서 빠지자 전선은 한참 후퇴하게 되었다.
산탄다르 공작이 북부 전선에 합류한 후에야 조금씩 전선이 안정화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랑베르트 공작, 산탄다르 공작, 히베아 변경백의 대리로 내려와 북부군을 지휘하고 있는 즈보크 자작까지 제뉴인 공작을 설득하고 있으나 꿈쩍도 않는다는 후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 사이, 1황자는 노체 공작의 본성이 있는 도시인 타우를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며 즉위식을 올렸다.
제국에 서로 적대하는 두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황자와 2황자가 각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도시가 타우와 수도였기에 세간에서는 둘을 타우 황제와 수도 황제로 구분했으나, 정작 둘은 각자가 그냥 '황제'라 주장하며 각자 자신의 형과 동생을 비난하기 바빴다.
제국 남부의 상황도 좋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리히트 공작의 사망과 함께 리히트 공작령이 분해되고, 에베 공작이 시안이 떠난 남부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지만 남부는 애초에 1황자, 현재 타우 황제를 지지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산발적으로 봉기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던 카몰군이 떠난 이후, 남부에서는 영주들의 봉기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고, 에베 공작은 연일 수도로 원군을 요청했지만 제뉴인 공작의 불참으로 인해 위태해진 북부 전선에 신경을 쏟느라 남부는 거의 방치 상태에 가까워 있었다.
"재밌어, 아주 재밌어."
리오스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서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왕이 된 자신의 아버지, 하마렐리온 드와이트가 보내온 것이었다.
시안의 왕국행으로 정세가 혼란한 사이, 수도 황제와 타우 황제 양측 모두에게 사힘 왕국은 큰 변수로 부상했다.
각 진영에서는 매일 달콤한 조건들을 내밀며 하마렐리온이 자신의 편을 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리오스 앞에 놓인 이 서신에 하마렐리온의 결정이 담겨 있었다.
서신을 봉인한 밀랍을 다시 봉인하려는 순간, 누군가 리오스의 천막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누가 감히 사령관의 막사에……!"
거세게 호통을 치려던 리오스는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인물은 거침없이 걸어와 리오스 앞에 놓여 있던 편지를 집더니 막사 한쪽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책상에 올리고 의자를 기울여 삐딱한 자세를 취한 남자가 거침없이 편지를 뜯기 시작했다.
부욱!
밀랍이 종이와 함께 뜯어져 나가는 소리에 리오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내게 온 것이오! 사령관인 내게……."
그 소리에 짧은 머리의 남자가 편지를 뜯는 것을 멈추고 리오스를 쳐다봤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남자의 눈이었지만 리오스는 그 눈을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낙오되어서 아군 시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밤을 틈타 간신히 합류한 놈도 핏줄을 잘 타고나서 사령관으로 불리니 다행인 줄 아시오. 당신이 우리 부족이었으면 명예를 지키지 못한 죄로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잘렸을 테니."
제법 제국어가 능숙해진 나라드마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단어 하나 틀린 것이 없었지만 엄연히 부대를 통솔하는 것은 자신이기에 리오스가 다시 한번 지지 않고 말했다.
"당신도 패배한 것은 마찬가지요! 게다가 대족장이라는 자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단독으로 뛰어나가는 바람에 패배의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소!"
"전쟁에 어찌 승리만 있겠소. 나는 그나마 흩어진 병력을 다시 규합했소. 그쪽은 무얼 하셨소, 사. 령. 관?"
비꼬는 나라드마의 말에 리오스는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시안 놈에게 패배하고 병력을 다시 모으라고 하우칼이 죽은 건 아닐 텐데 말이외다."
꾸깃.
나라드마의 손에 잡혀 있던 편지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의 짧은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에 핏발이 섰다.
그리고 세르페라 불리던 영수가 늑대에게 찢겨 죽은 이후, 점차 파랗게 녹이 슬어 가던 그의 왼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야관에서의 충격적인 패배 이후, 나라드마는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맸고, 그 틈을 타 나라드마의 독단적인 결정에 불만이 있던 부족들이 이민족 집단에서 분리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10일, 나라드마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10일이 걸렸다.
그리고 짧아진 머리, 외눈, 사라진 세르페, 녹슬어 가는 왼손 다음으로 나라드마가 자각한 것은 8만에 달했던 자신의 군세가 채 1만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전투의 참혹한 패배와 잇따른 부족들의 이탈 결과였다.
하우칼의 죽음으로 꺾여 버린 나라드마를 일으켜 세운 것은 그 1만의 이민족들이었다.
자신이 사경을 헤매고, 다른 부족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오로지 자신 하나만을 믿고 남아 있던 그 아랫것들 때문에 나라드마는 더더욱 쓰러질 수 없었다.
자신 따위를 살리기 위해 얼굴이 불탄 채로 가슴에 검이 쑤셔 박힌 하우칼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린 나라드마는 사힘 왕, 하마렐리온 드와이트가 추가로 보내온 이민족과 사힘군을 이끌고 자신을 떠난 부족들을 향했다.
많은 것을 잃은 나라드마를 마주한 각 부족장들은 그를 비웃었으나 곧 나라드마의 곡도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뿔뿔이 흩어진 이민족을 어느 정도 그러모으는 데 성공했으나 사힘 야전군의 수는 다 해도 7만을 넘지 못했다.
계속해서 충원될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한 번만 더 하우칼을 입에 담는다면 좋은 꼴은 보기 힘들 거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나라드마가 리오스를 향해 서신을 던졌다.
'설마 외눈박이를 못 이길까?'라는 생각과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하고 있던 리오스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서신을 집었다.
"당신 아버지가 뭘 받았는지 궁금하군그래."
서신에는 루지온 공작과의 적대를 그만하고 제국 1황제에게 협력하라는 내용과 함께 맨 아래에는 이제는 사힘 왕의 직인이 된 드와이트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2황자 편에 설 것 같더니, 시안이라는 아이가 사라지자마자 냉큼 1황자에 붙는 걸 보니 주군을 배신하고 칭왕을 한 기개가 어디 가지는 않는가 보오?"
"나라드마! 입조심하시오!"
아무리 안하무인인 나라드마라지만 리오스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마저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리오스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나라드마는 제 할 말만 했다.
"당신 아버지에게 전하시오. 하나, 사힘군의 지휘권은 내가 가질 것. 사령관이니 하는 이름은 그쪽이 들고 있어도 좋소. 둘, 제국의 가장 비옥한 땅을 내 동포들에게 제공할 것. 셋, 수도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것은 나여야 할 것. 어느 것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돌아가겠소."
나라드마의 귀에서 귀걸이가 반짝였다.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수도로 향해야 하는 나라드마였지만 리오스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약속의 증표로 비렛타 드와이트를 내 네 번째 부인으로 삼을 것."
"이 무슨 미친 소리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여동생을 이민족의 부인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리오스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나라드마는 마치 더러운 것을 뱉었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오. 제국인과의 혼인은 동포들 사이에서 내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소이다. 다만 아무것도 오가지 않는 약속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우리는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소, 반면에 그대의 아비는 사힘에 틀어박혀서 팔자 좋게 왕 노릇만 하고 있지 않소! 다시 말하지만 내가 요구한 조건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칼끝은 사힘을 향할 수도 있소."
리오스가 머리를 굴렸다.
'실권자는 나라드마다. 놈의 성질을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어. 일단 잘 달래 보자.'
속으로 셈을 마친 리오스가 말을 꺼냈다.
"아버지, 아니 전하께서도 그대의 노고를 모르는 바가 아니오. 나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으니 그대가 말한 것들을 잘 정리해서 전하께 올려 보내겠소."
"정리할 필요 없소, 그대로 전하시오. 분명히 말했소이다. 내가 말한 조건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일은 없던 일이 될 게요."
나라드마가 나가기 위해 탁상을 짚고 일어섰다.
그의 왼손이 닿은 자리에는 파랗게 녹 자국이 묻어났으나 그것은 이전처럼 손이 닿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드마의 손에 있던 것이 묻어 생긴 것일 뿐이었다.
리오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너무 낙관적으로 보지는 마시오. 아버지는 그대들에게 문을 열어 준 것만으로도 큰 자비를 베푸신 것이오."
"그래서? 내 동포들이 이렇게 많이 희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힘에 앉아서 이득만 챙기겠다는 소리요?"
"누가 들으면 우리는 싸우지 않은 걸로 알겠소이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굳이 일야관을 돌파해야 했소? 그쪽이 수도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인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아오?"
노기등등했던 나라드마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리오스가 나라드마를 몰아붙였다.
"듣기로는 다른 부족장들도 무던히 반대했다고 들었는데, 오로지 대족장인 그대의 의사를 존중해 수도로 향했다고 들었소. 그에 따라 발생한 피해인데, 어찌 우리 책임으로만 몬단 말이오!"
그러고는 다시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라드마, 어찌 되었건 우리 둘은 패장이오. 그동안 우리가 고생해 온 걸 사힘에 남아 있는 아버지나 가신들, 내 동생들이 알아 줄 것 같소? 우리끼리만이라도 속을 터놓고 힘을 합쳐야 하오, 반목할 때가 아니란 말이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털어놓아 보시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지 않소. 같은 어려움을 겪은 자들끼리 힘을 합쳐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법이오."
리오스 아래로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여동생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지만 남동생들은 이미 장성해서 제 몫을 한 지 오래, 리오스는 빨리 이 전장을 벗어나 사힘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싶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다른 형제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이 두려웠다.
나라드마 같은 이민족도 무시하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왕이 되었기에 자신은 1왕자 신분이다.
어느 왕자가 부하들을 놔두고 이 먼 곳까지 야전 사령관으로 나온단 말인가.
리오스는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리오스의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의 협력을 얻을까 하고 나라드마가 고민하던 찰나,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 저하, 루지온 공작이 전령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나라드마는 정신을 차렸다.
"추후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소. 내 의사를 잘 전하도록 하시오."
나라드마가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던 리오스는 아쉬움을 삼키면서 답했다.
"그대가 공을 세운다면 아버지께서는 더한 것도 내주실 것이오. 시안 놈도 없는 마당에 우리를 막을 수는 곳은 없소이다. 다른 공작들의 병력은 수만 많을 뿐, 질적으로 사힘군에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나라드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일야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난 다른 병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나가려던 나라드마가 몸을 돌려 물었다.
"조건을 하나 더 걸지. 시안이라는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죽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