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별 (2)
"워워……."
나라드마가 말고삐를 강하게 잡아채 말을 멈춰 세웠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맘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한 몸과 같이 움직였는데…….'
어린 시절, 나라드마는 초원을 몇 달이나 뒤진 끝에 손에 넣은 명마에게 이맘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며칠에 한 번씩만 물을 먹어도 다른 말보다 족히 2배는 빠르고 강인한 이맘을 보면서 부족 사람들은 오래전 사막과 초원에 살았다는 신화적인 말의 후손일 거라 짐작했다.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천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던 이맘은 일야관의 패배 이후 며칠간이나 계속된 카몰군의 추격 속에서 활에 맞아 죽었다.
결국 또 시안이었다.
시안은 나라드마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시안의 마나 소드에 베인 눈이 시큰거렸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이후,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이었다.
죽을 만큼 아프지도, 무시할 정도로 가볍지도 않은 딱 신경이 쓰일 만한 그 정도의 고통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것도 시안을 떠올릴 때마다.
"큭……."
군데군데 퍼렇게 녹이 오른 왼손으로 여전히 말고삐를 잡으면서 오른손으로 눈을 문지르고 나라드마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하우칼의 뒤를 이어 모래 전갈 부족의 족장에 오른 브릿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라드마에게 물었다.
잠시 후 고통이 조금 진정된 나라드마가 오른손을 내렸다.
남은 한쪽 눈에 핏발이 선 것은 물론이고 이마와 관자놀이 주변의 핏줄까지 꿈틀거렸다.
"괜찮다."
"목표한 곳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발대에게 자리를 준비하라 전하겠습니다."
하우칼의 동생이었던지라 나라드마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던 브릿식이지만 나이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항상 깍듯한 존대를 했다.
나라드마가 족장이건, 대족장이건 관계없이 반말을 툭툭 해 댔던 하우칼과는 전혀 달랐다.
하우칼을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최후 또한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머리가 기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라드마는 본인과 브릿식에게 동시에 말했다.
"신경 쓸 것 없다."
나라드마의 얼굴 곳곳에 불거져 있던 핏줄이 차차 사라졌다.
안정을 찾은 나라드마가 브릿식에게 물었다.
"리오스 놈은 어떻게 한다더냐?"
"이 숲을 빠져나가는 대로 합류하게 될 것인데, 아마 경로로 보아 우리가 하루 정도 먼저 도착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 아비를 닮아 그런지 뒤에 빠져 있는 걸 퍽이나 좋아하는 놈이로군."
"드와이트 놈들이 겁쟁이인 건 유명하지요. 그런 놈들이 왕이라니, 지나가던 말이 웃겠습니다."
실컷 하마렐리온과 리오스 욕을 하며 나아가는데, 전열의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적습이다! 적의 매복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놀라서 날뛰려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나라드마가 크게 외쳤다.
"침착해라! 침착해!"
***
다음 날 리오스가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나라드마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꼬박 하루 동안 이어진 전투로 인해 나라드마의 몸 곳곳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어찌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그의 곡도는 이가 나간 부분이 여럿 보였다.
그런 나라드마가 곡도를 들고 씩씩대며 리오스에게 향하는 동안, 리오스의 참모들은 나라드마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 살기등등한 모습에 차마 발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적의 매복이 있었소! 우리가 도달하는 시각과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단 말이오!"
나라드마의 일갈에 리오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도 살아 왔으니 역시 대족장이오."
"그걸 말이라고!"
피가 곳곳에 말라붙은 곡도가 나라드마의 어깨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보는 눈이 많소이다."
나지막한 리오스의 말에 나라드마는 그 자리에서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쟁에 있어 적의 움직임을 모두 알면 더 바랄 바가 없으나, 그것이 항상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대도 잘 알지 않소? 예전 같으면 별일 아니라고 넘겼을 일에 어찌 이리 과민하게 반응하시오? 부쩍 조급해 보이외다."
리오스의 말에 나라드마의 팔이 툭 떨어졌다.
그러나 나라드마의 외눈은 여전히 리오스를 죽일 듯 바라보고 있었다.
리오스는 그 외눈을 회피하면서도 끝까지 할 말을 다했다.
"이미 주변으로 척후와 정탐 부대 들을 보내 놓았소. 적습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이다. 공성은 3일 뒤니 그때까지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잘 준비하시오. 특히나 그 무슨 벼락 부족 생존자들을 잘 이용해야 할 거요."
리오스의 시선은 나라드마의 너머, 저 끝에 조그마하게 보이는 성에 닿아 있었다.
에베 공작령의 초입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민족의 한 분파인 마른 벼락 부족이 점령하고 있던 성인 르호른성이었다.
사힘 왕, 하마렐리온 드와이트가 타우 황제의 편에 섬으로써 얼추 양 세력의 균형추가 맞게 되었다.
비록 북부 일부와 동부, 남부를 거의 규합하는 데 성공한 수도 황제의 병력의 수가 더 많았으나, 이민족 방비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제국 내부로 들어오는 사힘군과 이민족의 파괴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 타우 황제는 당장 사힘 왕에게 북부 전선에 가세해 그랑베르트 공작령, 제뉴인 공작령을 점령한 뒤 수도로 향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사힘 왕은 '나는 동맹이지 신하가 아니다. 타우로 향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라.'라며 군세를 남부로 돌렸고, 이미 이민족들의 발길에 짓밟힌 곳들을 다시 지나 마침내 에베 공작령의 초입에까지 이른 상황이었다.
사힘 왕의 판단은 지금 그에게 있어서 최상의 판단이었다.
북부 전선으로 가서 수도 황제의 세력권을 밀어내 봐야, 사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질 땅도 아니었고, 나라드마의 재기로 간신히 다시 끌어모은 이민족 군대가 그런 곳에 소모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는 그저 어떻게 하면 탐스럽고 풍족한 남부의 땅을 사힘 왕국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을지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관심사였다.
이미 에베 공작령의 경계에 있는 영지와 성 들은 이민족 패잔병들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으니, 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이미 말했지만 사령관이라는 이름은 그쪽이 달고 있으나, 병력의 통솔과 지휘는 내가 하겠소."
"그리하시구려."
분명 평소 같았으면 자신이 사령관이니 어쩌구 하면서 자존심 싸움을 했을 리오스가 별 반응 없이 물러섰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런 리오스의 뒷모습과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면서 나라드마는 생각했다.
'속을 털어놓고 힘을 합쳐? 역겨운 자식. 일야관에서도 저놈은 일야관 내부에 있는 자와 내통하려다 실패했었다. 이번에는 에베 공작과 내통해서 나나 우리를 죽이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있었던 에베군의 습격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시각과 장소, 무엇보다 적들은 이민족 부족들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이미 이민족들에게 점령당한 경험이 있다지만 지금 나라드마 아래에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부족들이 모여 있었다.
'설마 아군의 배반인가? 그럴 리는 없다. 배신의 죄를 물어 내게 반감을 가진 놈들은 다 끌어 내렸으니까.'
형제와 같은 하우칼을 잃은 나라드마의 감정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었다.
다시 한번 부족장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그 증거로 부족장들은 전쟁에 따라 나온 자신의 혈족을 사막과 초원으로 다시 돌려보내 남아 있는 자들에게 충성을 공표하였다.
다시 나라드마 아래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자들은?
그 판단에 불만이 있는 자들에 의해 끌어 내려지거나 나라드마에게 목이 떨어졌다.
불만이 새어 나올 법도 했으나,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잘려 나가고, 왼손 군데군데 푸른 녹이 슨 채로 내려다보는 나라드마 앞에 감히 불만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의 눈은 하나였으나, 다른 이들의 눈 수백, 수천을 합한 것보다 더 맹렬하고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본인의 천막으로 돌아온 나라드마에게 부족장들과 샤먼들이 찾아왔다.
나라드마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리오스 주위에서 이상한 낌새는 없나?"
"밤낮으로 감시하고 있습니다만 이상한 징후는 없었습니다."
키가 작고 맨발인 남자가 답했다.
남자의 발에는 일곱 개씩, 양발 합쳐 열네 개의 발가락이 달려 있었다.
덩치가 작은 데다가 전력으로 뛰어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올빼미라 불리는 남자였다.
그는 부족들에서 첩보나 암살에 소질이 있는 자들을 모아 놓은 집단, '둥지'를 이끌고 있었다.
"나는 어제의 습격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드마의 말에 허리가 구부러진 샤먼 하나가 물었다.
"그 말은 리오스를 의심한다는 것이오, 대족장?"
"그리 단순할 것 같은가?"
"그렇다면 누구를……. 설마, 하마렐리온?"
"다 죽어 갈 때가 되니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군, 늙은이."
천막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리오스는 그저 사힘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는 유약한 놈이다. 그러니 우리를 없애려고 하는 것은 놈의 아비의 뜻일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매복 한 번으로 그렇게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현재 사힘 왕국의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해가 되어서 사힘 왕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모래 전갈 부족의 부족장, 브릿식의 말에 나라드마가 답했다.
"정확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가 그들의 일부이기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너희는 내 손 안에 있다. 철저히 복종하지 않으면 적에게 팔아넘겨 주겠다.' 이런 것 아니겠나?"
나라드마의 말에 부족장들이 고개를 숙였다.
현재의 상황으로 거기까지 유추하는 것은 너무 나아간 생각이 아니냐는 말이 몇몇 부족장들의 혀끝에서 맴돌았으나, 지금의 나라드마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있는 자는 없었다.
그때 처음 나라드마에게 말을 건 나이 든 샤먼이 나섰다.
샤먼의 이름은 투클랍.
모래 전갈 부족과 예전부터 우호 관계인 뼈 무덤 부족의 샤먼이었다.
"대족장, 그대의 의심은 가능하지만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소. 조금 더 확실해진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나라드마가 그런 투클랍을 보며 비웃었다.
"투클랍,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강자 소리를 듣게 된 이유가 뭔지 아는가?"
모인 사람들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강건한 신체, 불과 같은 의지, 신묘한 검술, 지금은 사라졌지만 나라드마의 위엄을 빛냈던 이맘과 세르페 등 많은 것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나라드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직감 그리고 본능. 그리고 지금 그것들이 내게 경고를 보내오고 있다."
"원한다면 우리 사면들이 점을 치겠……."
"그딴 걸 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부상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이들의 혼을 위해 기도하라!"
나라드마는 점이나 신탁을 미신적 행위라며 싫어했다.
마법적 능력 때문에 샤먼들을 남겨 둔 것일 뿐이지, 그 마저도 못했더라면 아예 초원에서 샤먼이라는 이름을 뿌리 뽑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족장의 천막에서 나온 부족장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족장이 분노에 눈이 멀어 버린 것 아니냐며 수군거리면서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그런 부족장들의 뒷모습을 브릿식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나라드마가 있는 천막을 바라봤다.
"후……."
브릿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족장을 왕과 비교하기는 힘들겠지만 하우칼이 살아 있을 때의 나라드마가 현명한 군주였다면, 지금의 나라드마는 난폭하고 사나운 군주였다.
'형이 있었다면 괜찮았을까?'
브릿식이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본인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공성전 도중, 이민족들은 나라드마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