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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15화 (115/180)

외눈별 (3)

"암루흐가 모습을 드러냈군."

에베 공작령의 최북단 성인 르호른 성 앞, 리오스 드와이트가 말했다.

그의 눈이 닿아 있는 성벽 위에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 대는 남자가 있었다.

끊임없이 성벽 안쪽을 탐하는 이민족들을 베어 넘기는 남자의 기세가 가공할 만했다.

리오스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목재를 올려 세워 만든 이동식 망루가 보였다.

나라드마가 전장을 한눈에 관찰하기 위해서 그 위에 올라 있었다.

"나라드마!"

망루 아래까지 다가간 리오스가 나라드마를 불렀다.

나라드마는 리오스에게 잠깐 시선을 두고는 이내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젠장."

리오스가 똥 씹은 표정을 하고서 망루 위로 올라갔다.

망루 위에는 나라드마뿐만 아니라 각 부족장과 샤먼 들, 심지어 리오스가 데리고 온 사힘군의 참모들도 모여서 각기 의견을 나누기 바빴다.

이미 행동을 같이한 지가 오래되어 서로의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기에 통역들이 바삐 각자의 말을 바꿔 주고 있었다.

그들의 의견에 나라드마가 결정을 내리면 깃발이 오르고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들로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부대에는 말을 탄 전령이 전속력으로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나라드마는 항상 전투와 전쟁은 거대한 사람 간의 격돌이라 생각했다.

지금 저 앞에서 성벽을 넘어서기 위해 애쓰는 부대는 팔과 다리였고 신호체계와 전령은 몸 안을 흐르는 피이며 자신이 있는 이 망루는 심장이자 뇌였다.

나라드마는 그 자체로 강철과 같은 손이기에 전장의 앞에 서는 것을 선호했으나, 시안에게 패배한 이후로는 그런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선두에 섰기에 지금도 기회만 된다면 나가서 닥치는 대로 적을 베고 싶은 것이 나라드마의 생각이었다.

그는 대족장이자 사령관이기 이전에 투기가 응집된 순수한 전사였다.

"나라드마."

나라드마의 곁으로 다가선 리오스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중요한 정보가 있소이다."

"정말 중요한 정보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말하시오. 바빠 죽겠으니."

"내가 본 것이 맞는다면 르호른 성에 있는 것은 암루흐요."

"그게 뭐요."

"암루흐 서비어, 에베 공작의 첫째 아들!"

그제야 나라드마가 고개를 돌렸다.

나라드마의 외눈이 리오스를 응시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저 녀석을 생포할 수만 있다면 인질로 삼아 에베 공작령을 쉽게 뚫고 나아갈 수 있소! 이 남쪽 땅에서 시간을 버릴 이유가 사라진단 말이오! 놈을 생포하라는 명을 내리시오! 어서!"

분노한 얼굴로 나라드마가 답했다.

"성을 점령한 것도 아닌데 인질 타령부터 하고 있다니! 미쳤소? 승리할 방책을 가져와도 모자랄 판에 뜬구름 잡는 소리 좀 그만하시오!"

자기 딴에는 중요한 정보를 선의로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면전에서 무시당하고도 생글생글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리오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은 나라드마에게 무시나 받으면서 쭈그러져 있지만, 리오스도 원래는 사힘 변경백의 첫째 아들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사람이었다.

그러나 리오스는 재빠르게 자신을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화내서는 될 일도 안 된다.'

리오스는 어떻게 해서든 이민족 병력이 성 중앙에 집중하게 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암루흐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에베 공작이 암루흐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대가 몰라서 하는 소리요. 게다가 이 근처는 모두 암루흐의 영지이니 녀석만 생포하면 쉽게 나아갈 수 있단 말이오! 놈이 모습을 드러낸 지금이 기회요! 명을 내리시오!"

"그가 나타났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소?"

"나는 그를 본 적이 있소! 게다가 그 또한 서비어의 핏줄이니 오러 운용이 남다를 것 아니오!"

나라드마가 리오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려 한 참모를 바라봤다.

"암루흐 서비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하얗게 변한 채로 오러를 내뿜는 기사가 있다고……."

재밌다는 표정이 나라드마의 얼굴에 떠올랐다.

"호오, 거짓이 아니었던 건가."

리오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왜 거짓을 말하겠소!"

그러나 나라드마가 말한 거짓은 리오스의 거짓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드마 역시 서비어 핏줄의 특징을 들은 적이 있었으나 초원과 사막의 사람들은 서비어를 본 것이 너무 오래되었고, 따라서 다들 거짓이나 과장으로만 생각했다.

'무신의 후예라…….'

호승심이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억누른 나라드마가 말했다.

"안 되오."

"어째서!"

"작전 설명을 무엇으로 들은 거요!"

성의 정문에서 주력 부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마른 벼락 부족이 성을 점령했을 때 만들어 둔 비밀 통로로 특공대를 보내 내부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작전이었다.

따라서 지금 성에 붙어 있는 병력에게는 최대한 방어적으로 행동하라고 지시가 내려진 상태였다.

그런데 야전에서 싸우는 것도 아닌 지금의 상황에서, 공성의 공격 측인 아군이 방어 측 지휘관을 사로잡는다?

차라리 몇 개 부족의 머리통을 충차 대신 이용해 성문을 뚫는다는 작전이 더 현실성 있을 것이라고 나라드마는 생각했다.

현재 나라드마와 리오스는 같은 곳에 서 있었으나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리오스는 아버지인 사힘 왕으로부터 나라드마를 죽이거나, 하다못해 나라드마의 기반인 이민족들의 세력을 많이 줄여 놓으라는 밀명을 받은 상태였다.

제국 내부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나라드마와 타우 황제나 수도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한 무력이 필요했던 사힘 왕 하마렐리온 드와이트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손을 잡았지만, 지금의 판국에서 사힘 왕은 나라드마를 그리 반겨 하지 않았다.

사힘 왕에게 필요한 것은 나라드마 아래의 이민족이었지 나라드마 자체가 아니었다.

대족장이라는 상징과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항상 불안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빨리 전공을 세워 사힘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께 인정을 받고 싶은 리오스는 사힘 왕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했고, 르호른 성을 지키는 암루흐 서비어에게 밀사를 보냈다.

-이민족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성벽 위로 올라와라. 이민족들을 정리하고 성 몇 개만 떼어 주면 더 이상의 남부 진군은 없을 것이다. 또한 성안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

암루흐는 이 밀명을 에베 공작에게 전했고, 시안이 떠난 남부를 수습하느라 고생하고 있던 에베 공작은 흔쾌히 리오스의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같은 편을 팔아넘기면서도 리오스는 아무 죄책감이 없었다.

그가 그저 이 사나운 이민족 놈과 떨어질 날만 고대하고 있었던 탓이다.

나라드마 역시 현재 판도와 직감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 증거도 없이 이빨부터 들이밀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라드마는 미끼를 던졌다.

마른 벼락 부족 생존자들이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는 사실 여러 개가 있었으나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고 리오스를 비롯한 사힘군 참모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놓았다.

나라드마는 그쪽에서 전해져 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항상 자신의 삶을 주도해 온 나라드마다.

누군가의 장기 말로 이용당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각자 검은 속내를 감춘 두 사내의 시선이 얽혔다.

"내 말을 들으시오! 다소간의 희생은 있겠지만 결국 암루흐를 사로잡으면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것……."

리오스가 다시 한번 열변을 토했다.

그때 누군가 빠른 속도로 망루로 올라오더니 나라드마에게 붙어 귓속말을 속삭였다.

자신을 제치고 들어선 남자에게 불쾌감을 느낀 리오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나라드마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나라드마에게 귓속말을 하는 남자를 리오스가 쳐다보았다.

체구가 작고, 맨발인 데다가 발가락이 다섯 개보다 많은 남자였다.

'이 남자가 올라올 때, 내가 소리를 들었나?'

리오스가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주위가 시끄러워 듣지 못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래……. 알았다. 가 보도록."

나라드마의 말이 끝나자 올빼미가 뒤로 물러섰다.

"전 병력에 후퇴 명령을 전달하라."

"무슨 미친 소리요! 나라드마!"

나라드마의 명에 리오스가 거칠게 반응했다.

자리에 모여 있던 다른 사힘군 참모들도 모두 반대 의견을 내놓으려던 찰나, 리오스는 자신의 목 아래에서 빛나는 작은 단도를 보았다.

망루를 내려가는 척하던 올빼미가 어느새 리오스의 뒤로 돌아와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동시에 부족장들이 거칠게 사힘군 참모들을 제압해서 무릎 꿇리거나 탁상에 머리를 박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나라드마! 당신네들의 목숨은 우리에게 달려 있소!"

리오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나라드마는 차갑고 잔인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분명 비밀 통로인데 그쪽에 무장한 에베군이 있었다는구려? 재밌지 않소? 내통한 자가 있는 것 같으니 말이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당신이 지금 하는 짓은 전투에서 아군의 분열을 획책하고 사기를 꺾는 행위요! 당장 이딴 짓을 그만 두고……!"

나라드마가 품에서 서신을 하나 꺼냈다.

밀약을 맺는 것에 동의한다는 에베 공작의 문장이 찍혀 있는 서신이었다.

간밤에 리오스의 막사에 몰래 잠입했던 올빼미가 가지고 나온 작품이었다.

그걸 본 리오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 이건…… 모함이오! 누군가의 모함이야!"

리오스가 발버둥치려 했으나 올빼미가 한층 더 그를 억눌렀다.

그는 오러까지 운용해 현 상황을 벗어나려 했으나 올빼미가 재빠르게 그의 관절 몇 군데를 꺾어 버렸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관절과 힘줄이 끊어졌고, 리오스의 몸이 내팽개쳐진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졌다.

그사이 퇴각 명령은 사힘군과 이민족 전체에 전달되어 성 앞을 까맣게 메우고 있던 병력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나라드마가 리오스 앞에 쭈그려 앉았다.

리오스의 머리칼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린 나라드마의 입이 열렸다.

"하나가 되어 싸워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분열된 군대라니. 끔찍하지 않나? 단결의 시간이다."

거친 발성과 강한 성조를 특징으로 하는 모래 전갈 부족의 말을 들은 리오스는 의지가 꺾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

"놈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나?"

에베 공작의 장자, 암루흐 서비어가 부관에게 물었다.

"별 소식이 없습니다. 몰래 전령이라도 보내 볼까요?"

"됐다, 아쉬운 건 놈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대로 두어라."

전날 사힘군이 퇴각한 이후로 리오스의 연락이 없어 암루흐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가 의문을 가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약속한 것처럼 자신이 성벽 위에 나서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이민족들이 군세를 물려 퇴각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물러선 것이 아니라 멀리 진을 치고 있으므로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한 것이다.

"통로는 어찌 되었느냐?"

"지시하신 대로 정예 병력을 대기시켰으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른 특이 사항은?"

"뭐, 여러 마리의 쥐가 통로를 왔다 갔다 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싱겁군."

자신의 혼을 동물에게 집어넣어 감각을 공유하는 샤먼들의 술법을 알 턱이 없는 암루흐와 부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이 술법을 통해 나라드마는 비밀 통로 곳곳에 적군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통로는 없다더냐? 하나만 만들었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하나가 더 발견되기는 했습니다. 계속해서 수색을 이어 가고 있기는 한데, 병력의 수가 충분치 않아 진척이 늦습니다."

"곧 지원 병력이 올 테니 일단 수색을 지속하도록. 성을 점령한 몇 달 사이에 그런 통로를 만들어 둘 줄이야……. 간교한 이민족 놈들……."

이민족에게 성을 빼앗겼다는 사실도 치욕스러운데, 아직 성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암루흐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 쨍쨍쨍 하면서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가 위험을 알리는 소리였다.

"적이 다시 공격해 온다! 적의 공격이다!"

하루를 쉬어 원기를 회복한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방어할 준비를 했다.

암루흐도 뒤에서 큰 소리로 이민족과 사힘군을 욕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웠다.

그렇게 한참 공방이 진행되던 차에 다시 한번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쨍쨍쨍쨍!

성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경보 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암루흐가 거칠게 물었다.

때마침 뛰어 들어온 장교 하나가 엎어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어…… 허어……. 각하! 적이 성 안쪽에서 나타났습니다! 내성(內城)에서 이민족이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성에서 어떻게 이민족이 나온단 말이냐!"

암루흐가 성벽 위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에베군이 찾아내지 못한 비밀 통로를 통해 성 안쪽으로 진입한 이민족들이 날뛰며 건물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마구 죽여 대고 있었다.

"이, 이런……! 당황하지 마라! 안쪽의 놈들부터 처리해! 어서!"

이민족들에게 성을 탈환하면서 나름대로 전투 경험을 쌓아 온 암루흐였기에 이런 당황스러운 사태 속에서도 제법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아직 성벽과 성문은 건재했기에 다른 귀족들에게 지휘를 맡기고 암루흐는 아래로 내려갔다.

오러를 끌어올리자 암루흐의 눈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아버지인 에베 공작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서비어의 핏줄, 웬만한 기사보다는 나았다.

암루흐가 기사들을 이끌고 빠르게 성 내부의 이민족들을 죽여 나갔지만, 이민족들은 계속해서 밀려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불리한 소모전일 뿐이야. 후문을 열고 다른 성으로 대피해야 하는 건가?'

암루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언가가 암루흐를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재빨리 검을 들어서 막은 암루흐는 자신에게 붙은 남자를 떨쳐 내려 했으나 남자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암루흐의 공격을 피하더니 연속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정말 눈이 하얗게 되는군. 신기한데."

이민족의 차림새였으나 제국어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그걸 들은 암루흐가 역으로 물었다.

"누구냐?"

한쪽만 남은 눈으로 나라드마가 암루흐를 바라보며 말했다.

투박하고 거친 부족의 말이었다.

"네놈의 선조가 몰아낸 망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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