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16화 (116/180)

외눈별 (4)

암루흐 서비어는 분전했다.

허겁지겁 바닥을 구르고, 바닥의 모래를 집어 상대의 눈에 뿌렸다.

고귀한 핏줄인 그가 일평생 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같이 싸우면서도 암루흐는 느끼고 있었다.

'상대방의 미묘한 거리 조절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을.

물론 이것은 나라드마가 상대를 조롱하거나, 농락하기 위해 일부러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한쪽 눈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 감각을 잘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투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과 그동안 몸에 층층이 쌓인 기억들이 나라드마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암루흐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하고 밀려 나왔다.

"커헉!"

고개를 내려 가슴을 본 암루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곡도였다.

암루흐는 아버지인 사누스 서비어를 동경해 무예를 갈고닦았으나 아들의 재능은 아버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서비어의 성을 가지고 있으나 암루흐의 성취는 또래의 기사들보다 나을 뿐, 특출 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암루흐의 눈이 흰색에서 원래의 검은색으로 변했다.

힘을 잃고 자신 쪽으로 쓰러지는 암루흐의 몸을 나라드마가 밀어냈다.

곡도가 뽑혀 나오면서 다시 한번 암루흐의 가슴에 있는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라드마의 왼손이 닿은 암루흐의 어깨에 파란 녹이 묻어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대족장이 적장을 죽였다!"

각기 다른 부족의 말이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지휘관을 잃은 에베군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몇몇 귀족들과 지휘관들이 질서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모두 공허한 외침이 되어 흩어졌다.

오히려 소리를 지르는 그들을 향해 이민족의 공격이 집중될 뿐이었다.

"제국 놈들을 죽여라! 형제들의 원수를 갚아라!"

폭주하던 이민족들이 마침내 성문으로 접근해 굳게 닫힌 빗장을 밀어 내는 데 성공했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자 안에 있는 이민족의 몇 배나 되는 이민족들이 성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왔다.

안으로,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는 이민족의 물결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병사들이 가슴 속에 울분을 품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에베 공작령의 초입, 르호른 성은 암루흐 서비어의 죽음과 함께 함락되었다.

***

"어쩌려고 그러시오, 대족장."

르호른 성의 성벽 위에 서 있는 나라드마를 누군가 불렀다.

뼈 무덤 부족의 샤먼인 투클랍이었다.

나라드마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무엇이 말인가."

수많은 이민족들이 각자 무리를 이루어 여러 갈래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 점령한 적이 있던 근처의 다른 성들을 다시 탈환하러 나서는 출정 길이었다.

그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짓밟고 약탈할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것이 사막과 초원에서 난 자들의 삶이었으니까.

"드와이트의 아들놈과 그 아래 놈들 말이오. 언제까지 감옥에 처박아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곧 사힘 왕이 그대의 행동을 알아챌 거요. 대체 어떻게 하려고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 거요!"

"사힘 왕이라……. 투클랍 당신이 놈을 그렇게 부르니 이상하군."

몸을 돌려 투클랍과 시선을 맞춘 나라드마 뒤로 석양이 가득 찼다.

투클랍은 석양에서 밀려 나오는 빛 때문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려야만 했다.

석양빛 때문에 투클랍은 나라드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글이글 불타는 나라드마의 외눈만큼은 무엇보다 선명하게 투클랍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누구보다 드와이트를 증오하고, 제국 안쪽을 갈망하던 것이 당신 아니었나? 어렸을 때 당신이 들려 줬던 제국에 대한 노래가 내 귀에 어른거리는 것 같은데?"

"그것은……."

"막상 그렇게 되니 두려운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짖어 대던 개들이 막상 울타리가 없어지면 서로 꼬리를 말고 피하는 것처럼? 꿈이 현실이 되니 두려우냔 말이다."

"어찌 그리 쉽게 말하시오! 대족장인 당신이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오!"

나라드마가 거세게 반발했다.

"나는 대족장이기 이전에 전사고! 전사이기 이전에 나라드마 자신일 뿐이다! 모래에서 나고 풀을 헤치며 자란 나라드마! 그대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왜 그대가 리오스와 다른 사힘 놈들을 걱정하지? 그대의 고향에서 그들을 만났더라도 그리 걱정하고 동정할 텐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우리가 있던 곳에서의 삶을 기억하라! 앞을 막는 놈들에게 행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놈의 머리를 목에서 분리해 버리는 것!"

석양을 배경으로 천둥처럼 쏟아지는 나라드마의 말에 투클랍은 지팡이를 쥔 자신의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진정되기는커녕 더더욱 커져서 이내 지팡이까지 달달 떨리고 있었다.

분명 대족장은 투클랍에게 질타와 폭언을 쏟아 내고 있으나, 투클랍은 오히려 점을 칠 때와 같은 무아(無我)의 상태와 비슷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나라드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탁처럼 투클랍의 전신에 영험하고 강대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번 일이 리오스의 독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마렐리온 놈이 어느 정도, 아니 깊게 관계되어 있다고 봐야지."

"그, 그렇다면 어떻게 하려는……."

나라드마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성에서 멀어진 출정 병력은 마치 석양을 향해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털썩.

투클랍이 떨림을 견디다 못해 주저앉았다.

그를 지탱해 주고 있던 지팡이도 쓰러져 바닥을 굴렀다.

"제국 놈들과 손을 잡은 후로 우리는 가치를 잊었다."

"가치라 함은……."

"앞에 적이 있으면 달려들어 죽이고, 가진 것을 빼앗아 삶을 이어 가는 것이 우리였다. 거추장스러운 정치와 모략은 애초에 우리가 입을 옷이 아니었던 것이지. 하마렐리온과의 동맹은 파기한다. 적과 내통하는 아군은 그 순간부터 적이다. 성을 탈환하러 간 부족장들이 돌아오면 모두의 앞에서 천명하겠다. 우리의 피에 흐르는 단 하나의 가치! 강자 생존을!"

투클랍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머릿속에 장렬한 섬광 몇 줄기가 지나갔다.

척박한 고향에서의 삶은 항상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1년 중 우기인 한두 달만 그나마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이동하고 조우하고 죽이고 죽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는 살아남았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자신을 상처 입히려는 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는 자를 죽이고, 형제와 가족을 해하려는 자를 먼저 없애는 것이 우리 고향에서의 강자다."

나라드마의 말에 투클랍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에게 다가오는 나라드마의 말은 한 단어, 한 음절이 경이와 경탄에 가까웠다.

"나를 상처 입히고 내 형제를 죽인 제국에게 누가 강자인지 보여 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하마렐리온을 친다. 놈을 죽이고 아직도 고향에 남아 있는 부족들을 이 풍족한 땅으로 끌어들이겠다. 놈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끝이다."

투클랍이 입을 열어 간신히 답했다.

"대족장이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나라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출정한 병력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몸을 돌려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바닥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투클랍의 곁을 지나갈 때, 나라드마가 입을 열었다.

"제국 놈들은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서로 죽이느라 바쁘다. 누구도 우리만큼의 단합과 파괴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

"대족장, 당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소."

"이제부터는 우리의 시간이다."

나라드마가 그대로 성벽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어느새 어둠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

에베 공작의 본성(本城), 바하수비안성 내부에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다시…… 다시 말하라……!"

에베 공작, 사누스 서비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전령에게 말했다.

온몸이 흙투성이인 전령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공작의 요구에 답했다.

"크흑, 하마렐리온 드와이트의 병력에 의해 르호른 성이 함락되었으며, 암루흐 백작께서는 이민족에게 당해 죽음을……. 죄송합니다, 각하!"

일어서서 전령의 말을 듣고 있던 에베 공작의 몸이 휘청했다.

재빨리 주위의 다른 귀족들이 공작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에베 공작은 힘없이 무언가를 되뇌기만 하였다.

"암루흐가…… 암루흐가 죽다니……."

"난전이었던지라 시체도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크흐흐흑……."

전령의 말에 에베 공작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장자라는 이유로 유독 더 엄하게 대했던 암루흐였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동생들과 가신들을 더 챙겨서 앞으로 에베 공작령은 걱정이 없겠구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죽어 버렸단다.

에베 공작은 무언가를 묻고 싶었지만 정신이 혼미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에베 공작의 둘째 아들, 오그마 서비어가 전령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말하느냐! 형님이 돌아가시다니!"

"저 말고도 목격한 사람이…… 크흡, 많습니다! 이민족의 칼에 맞아……!"

"거짓말! 거짓말이다!"

오그마의 일갈에 전령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냉엄한 교육 속에서도 오그마를 먼저 챙겼던 암루흐였다.

그런 형이 죽었다는 것을 오그마는 믿을 수가 없었다.

형수와 이제 갓 4세가 된 조카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하수비안 성에 모인 귀족들은 아들이자 형, 남편이자 아버지의 죽음에 모두 침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그마가 전령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전령은 무너지듯 팽개쳐졌지만 그저 끄윽거리며 눈물을 삼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에베 공작 앞으로 다가간 오그마가 악에 받쳐 외쳤다.

"아버지! 이놈은 적의 첩자입니다! 우리의 사기를 꺾으려고 보낸 첩자임이 분명합니다! 형님께서 이민족 따위에게 죽었을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

그렇지만 모두가, 심지어 오그마도 알고 있었다.

전령의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새하얗던 얼굴에 핏기가 조금 돌아온 에베 공작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남부 전체에서 병력을 징발한다. 감히 내 영지를 탐한 걸로 모자라서 암루흐를 죽인 이민족 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

"각하! 안 될 말입니다!"

시안의 외할아버지, 누이론트 백작의 외침이었다.

그는 여전히 남부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봉기와 해상 약탈을 막고 제국 동부와 남부의 교류를 위해 왕국 정벌에 따라가지 않았다.

에베 공작의 곁에 남아 시안의 대리권자 역할을 하고 있는 누이론트 백작이었기에 충분히 발언권을 가질 만했다.

"이제 간신히 남부가 안정화되고 있는데 여기서 또 병력을 징발하면 영주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게다가 카몰 후작 각하께서도 떠나실 적에 민심을 잡는 데 주력하라는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습니까! 암루흐 백작이 명을 달리한 것은 비통한 일이나 감정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추가적인 병력 지원은 없는 것 같으니, 일단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금 더 기다린 후에……."

"조용하시오!"

에베 공작의 가신 중 하나인 키타리안 후작이 누이론트 백작을 향해 날을 세웠다.

"백작께서 이렇게 되신 것에는 그대들의 책임이 적지 않소!"

"어찌하여 그렇게 된단 말입니까!"

"테르다마스에서 손실된 우리 해군 전력이 아직도 복구되지 않고 있소! 그 병력만 있었다면 사힘 놈들과 이민족 놈들을 손쉽게 막아 내고, 증원도 더 빨리 할 수 있었을 것이오!"

원인 다음에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다른 결과를 가져다 붙이는 궤변이었지만, 이미 암루흐를 잃은 에베 공작령의 귀족들은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에베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이젤을 살려 돌아왔더니 암루흐가 죽었다.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에베 공작이 다시 명을 내렸다.

"아들의 복수조차 못 하는 아버지를 어찌 아버지라 하겠는가. 병력을 모아 이민족을 죽이겠다. 죽이고 또 죽여서 놈들이 내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게 만들겠다. 암루흐도 그것을 원할 것이다."

이미 분노에 가득 차서 눈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 오그마가 가장 먼저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이론트 백작이 최대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거센 들불에 물 몇 방울을 던진다고 불이 꺼질 수는 없는 법, 그는 그저 조용히 물러나 지금 이 상황을 서신에 적어 시안에게 알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믿음직스러운 기사 하나에게 서신을 맡긴 뒤, 누이론트 백작은 고개를 들어 남쪽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외손자가 향한 방향이었다.

"그곳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각하?"

어느새 입에 붙어 버린 각하라는 말에 놀라며 백작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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