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희생양 (1)
"즈어(죽여)! 츠르르 즈그르그(차라리 죽이라고)!"
입에 재갈이 물리고 온몸이 결박된 스와라 위샤인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처절한 목소리 속 한편에는 깊은 절망과 형언할 수 없는 허무가 깊게 묻어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총기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피폐함만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었다.
"몇 번째지? 네 번째였던가?"
내 질문에 로하나스가 짧게 답했다.
"다섯 번째 생포입니다."
"벌써?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위샤인 백작은?"
"추격대의 말에 따르면 이미 죽어 있었답니다. 자결한 것 같습니다."
"저 친구는 자결할 용기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네."
자문에 가까운 내 말에 로하나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스와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불명확한 발음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벌어진 재갈 사이로 질질 흐르는 침과 흐려진 발음, 피와 먼지가 잔뜩 들러붙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느 짐승 같기도 했다.
두 달 전 나는 표기장군직을 제수받았다.
나를 사지에 몰아넣기 위한 황제의 뻔히 보이는 수였지만, 나는 내 복수의 큰 그림을 위해 기꺼이 그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 주기로 했다.
기존의 카몰군과 남부에서 징발한 병력을 합쳐 간신히 5만이 조금 넘는 병력을 만들고 제국의 경계를 넘어 툴리앗으로 남하했다.
타국을 정벌하러 가는 병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제국의 남부 경계는 나시와르와 툴리앗, 두 왕국과 모두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에 어느 곳을 먼저 공격하느냐라는 문제도 있었지만, 의외로 쉽게 정해졌다.
풀어 준 위샤인 부녀가 툴리앗행을 택한 것이다.
그 뒤는 어렵지 않았다.
저비스가 '반오러 물질'이라 이름 붙인 반짝이는 가루도 충분히 있었고, 툴리앗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산양 기병 부대도 이전의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내가 활개치고 다닌 탓인지 많은 것이 달라진 제국의 상황과는 달리 툴리앗 왕국의 상황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대개 비슷했다.
지형은 물론이고 적군의 지휘관들도 내 기억에 있는 그대로라 가서 반갑다고 인사라도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는 것은 원숭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거침없이 툴리앗의 내부로 진격해 들어갔다.
툴리앗의 사정을 내 손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 지시에 의아함을 품던 참모들도 이어지는 압도적인 승리에 이제 내 지시라면 아무 말 없이 이행했다.
이 무렵의 툴리앗 왕인 네펠타 3세는 암군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내가 점령한 지역들의 왕국민들은 오히려 나를 반겼다.
압제의 해방자라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연속된 승리의 행진 가운데서 나는 위샤인 부녀를 몇 번이고 생포하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역도의 수괴를 당장 처리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진언에도 그저 풀어 주라는 말과 함께 첩자를 붙여 그들의 뒤를 악착같이 밟게 했다.
나는 그녀가 쉽게 죽음을 맞이하게 할 마음이 없었다.
스테판 때는 나도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양되어 그를 바로 죽였었다.
비록 예기치 못한 일 덕에 한 번을 더 죽이긴 했지만.
여하튼 스와라를 더 압박하고 압박해서 그녀가 깊은 절망의 수렁에서 헤엄칠 때, 그때 구원자인 척 손을 내밀고 머리를 눌러 나락의 심연으로 가라앉힐 셈이었다.
그것이 내가 당한 죽음에 대한 진한 복수였다.
내게 침을 뱉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들던 그녀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올 그 순간.
희망의 빛이 사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란 걸 알았을 때 무너져 내릴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죄책감 따위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단상에서 스와라를 내려다보고 있던 내가 몸을 일으켰다.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손에 무언가 모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창의 형태를 한 마나 소드를 단단히 붙잡고 스와라를 향해 던졌다.
부웅!
공기를 찢고 날아간 창은 스와라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흐아아!"
스와라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재빠르게 몸을 낮춰 피했다.
내가 손을 뻗자 벽에 박힌 마나 소드는 형체를 잃고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죽여 달라더니? 아직 몸을 움직일 힘 정도는 남았나 보네?"
단상에서 내려와 스와라에게 다가갔다.
이미 눈이 풀려 버린 스와라는 내 접근에도 몸 하나 움찔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죽여 달라고 말만 할 뿐, 너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렇지? 더 절규하고 더 고통스러워하도록 해. 아직 부족해. 그것도 아주 많이."
"애(왜)……. 애 이르는(왜 이러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스와라가 간신히 내뱉은 말이었다.
"스테판 유제프를 만난 적이 있나?"
스와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 나는 두 번이나 만났는데. 살아 있는 스테판과 죽어 있는 스테판. 사고에 휘말리는 바람에 내가 그를 수습해야 했지. 그 녀석도 내게 너와 같은 것을 묻더라? 왜 이러는지 모르겠대. 내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스와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네가 알 필요 없다."
잊히지 않는 개인적인 원한일 뿐, 그걸 미주알고주알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스와라가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그래, 더 격렬하게 저항해라. 몸부림친 후에 다가오는 것은 끔찍한 허무일 테니.
"으흐!"
재갈이 물린 입으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는 스와라를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나는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로하나스에게 말했다.
"저걸 데리고 가서 풀어 줘라."
"사람을…… 붙일까요?"
"그래야지. 자결하려고 들거든 그건 막으라고 해."
내게 반기를 든 가문 중 안 그런 가문이 더 없지만, 그중에서도 위샤인 가문은 몰락할 대로 몰락했다.
자신들의 영지도 아닌 툴리앗 왕국의 내부인 데다가 패배만 지속하고 있었다.
게다가 잡히면 잡히는 대로 풀려 나오니 이곳까지 같이 망명했던 다른 귀족들과 그들 부녀에게 우호적이었던 툴리앗 왕실조차 고개를 돌렸다는 첩보가 내게 들어오는 중이었다.
결국 귀족의 힘은 자신이 가진 영지와 영민 들에게서 나온다.
타국에서조차 환영하지 않는 스와라는 내부부터 망가질 것이 틀림없었다.
"저렇게 잔인하게 대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막사로 찾아온 저비스의 말이었다.
"요새 몇몇 장교들이 스와라에 대해 '인도주의적 처분'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던데, 감화된 거야?"
"장교들이 뭐라 하는지는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비스 이 녀석은 천성적으로 악한 인물은 못 된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인 카몰에만 있다가 전장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전쟁이라는 광기를…….
아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비스가 느끼는 감정이 나를 보는 대다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붙이는 것은 그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태를 내 나름대로 합리화하고 싶을 뿐일지도 몰랐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저비스가 의견을 덧붙였다.
"스와라를 용서하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녀가 반란의 주동자이며 외세를 제국으로 끌어들인 파렴치한 인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행하고 계신 일은 배가 부른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상처 내며 가지고 노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빠르게 완수하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네."
"예?"
포식자인 나는 피식자인 스와라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녀의 몰골은 피폐해져 갔지만, 나의 내면의 복수심은 줄어들기는커녕 몰락하는 스와라와 반비례해 알맞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저비스에게 다른 걸 물어 화제를 돌렸다.
"반오러 물질은 얼마나 남았지?"
"절반 이상 사용했습니다."
"그것보다는 가면이 중요하다며?"
"예, 반오러 물질은 몇 달 안쪽으로 양산이 가능해질 것 같지만, 이 가면의 공정이 까다로워 많이 생산할 수 없습니다."
"용케도 그런 걸 1만 개나 만들어서 가져왔네."
"각하께서 데리고 온 그 대장장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대장장이? 긴 후사인?"
노예 신세에서 해방시켜 준 벙어리 대장장이, 긴 후사인 얘기였다.
"예, 가면 안에 들어가는 특수 광물인 페다를 얇게 제련하는데 그자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긴이 작업하는 장면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장장이가 거칠다는 편견이 싹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손놀림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
원래는 질 좋은 무구를 더 빨리 만들어 내기 위해 데려온 긴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활약을 한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도 밤낮없이 가면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현 상황으로는 월에 300개 이상은 제조하기가 힘들 겁니다."
"어째서?"
"그랑베르트 공작령에서 페다를 공급받고 있었는데, 현재 페다 광산이 노체 공작의 점령하에 놓였습니다. 게다가 페다는 아카데미에서나 연구용으로 쓰이는 광물이라 우리가 대량으로 매입한 것이 발각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른 쪽에서 공급을 알아보고 있지만 전시인지라 실용성이 떨어지는 페다 광산을 운영하는 영지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알아봐. 페다인지 뭔지가 반오러 물질을 막는다는 사실이 퍼지면 난리가 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분명 네게 들어가는 연구 재료와 비용은 추적이 되지 않게 손을 썼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레인과도 얘기를 나누어 봤는데 분명 빈틈없이 처리했다 합니다."
전시인데도 불구하고 카몰을 비롯해서 내가 점령한 지역들의 경제를 흔들림 없이 관리할 정도로 능력이 좋은 그레인이 비자금 관리에서 흠을 보였을 리가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럼 네 연구실은?"
카몰 본성의 지하에 만들어 둔 연무장은 대외적으로는 내 개인 연무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스테판의 연구실이었다.
그곳에서 반오러 물질의 모든 것이 탄생하기에 핵심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별 이상 없었습니다. 침입하려는 시도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카몰에도 황제의 끄나풀이 숨어 있을 거야. 조심해야 해."
"이번 일만 잘 마치고 돌아가면 폐하께서도 의심을 거둘……."
나는 저비스의 말을 딱 잘라 막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너는 나보다 황제를 몰라."
***
툴리앗 왕성 앞,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병력이 펼쳐져 있었다.
정확한 적의 규모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에 투브마저 감탄사를 내뱉었다.
-많기도 해라.
'무섭냐?'
-무섭냐고? 나는 그런 감정을 모르고 살아왔어. 너나 오줌 안 지리게 조심해라.
'오줌 지려도 네 위에서 지릴 거야. 털 다 젖을 준비나 해.'
-더러워 죽겠네. 그건 그렇고, 어제 온 서신은 뭐야?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읽던데.
'내가 뭘 하든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다 보고 있었나 봐? 뭐야, 그런다고 내가 감동할 것 같아?'
-우연히 봤을 뿐이야. 토악질 나는 소리 그만해.
'외할아버지에게 온 서신이야.'
-누이론트 백작?
'바로 아네? 처음에는 사람들 얼굴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생겼다고 구분을 힘들어 했잖아.'
-그 양반만큼 순한 상은 드물거든. 딱 여자한테 잡혀 살 상이던데.
외할머니인 예카테리나 백작 부인과 외할아버지의 관계를 살펴보면 투브의 눈이 여지없이 들어맞는다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셈이었다.
'여하튼 위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나 봐. 나라드마가 내려와서 다시 에베 공작령 일부를 점령했다고 그러네. 에베 공작은 격분해서 군사를 모으고 있고.'
-그 뱀은 죽였는데?
'영수가 없어도 대족장에 오른 놈이야. 원래부터 괴물인 거지.'
-그런 놈을 잘도 이겼네.
내가 생각해 봐도 그랬다.
회귀하기 이전의 삶에서나, 회귀한 이후의 삶에서나 나라드마를 꺾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패주하던 나라드마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다시 투브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어 가고 있대?
'나야 모르지, 서신이 전해지기까지 두 달이나 걸렸는데. 그래도 에베 공작이 군사를 다시 일으켰다니까 민심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고…….'
분명 강력한 에베 공작이었지만 그가 나라드마를 이기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나라드마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든 생각인데, 인간들이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이타르가 왜 진절머리를 냈는지 알 거 같아.
'계속 치고 박고 싸워서?'
-응, 이타르는 이 꼴을 수천 년 넘게 봤을 거 아니야. 안 미친 게 용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전장의 긴장감과는 동떨어진 여유 넘치는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로하나스가 내게 다가왔다.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스와라는 저기 있다고?"
"그렇습니다. 소문으로는 네펠타 3세의 후궁이 되기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에게 대적하기 위해 네펠타 3세에게 스스로를 거래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집념과 수완 하나는 징그러울 정도로 엄청난 여자였다.
스와라는 당차긴 했지만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니,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제국의 정보를 다 팔아넘겼을 것이다.
"그것 봐……. 죽여 주기는 무슨……."
"예?"
작은 내 혼잣말에 로하나스가 되물었지만 손을 저어 아니라는 의사를 표했다.
"로하나스."
"예, 각하."
"전투를 개시한다. 오늘은 툴리앗이 영원토록 제국의 속국이 되는 첫날이다."
내 지시에 신호기가 오르고 여러 가문의 기사단들이 가면을 착용했다.
마법으로 허공에 쏘아 올린 반오러 물질이 담긴 병이 깨지면서 전장에 반짝이는 작은 가루가 휘날렸다.
이미 반오러 물질로 뼈아픈 패배를 겪은 툴리앗의 병사들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돌격하라. 전설을 넘어 신화를 이룩하라!"
기사단을 필두로 한 아군 병력이 진군을 시작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스와라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고 복수의 두 번째 희생양으로 만들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또한 사지에서 기어 나와 신화와 같은 위업을 이룩한 나를 앞에 둔 황제의 표정도 궁금해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