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19화 (119/180)

사라진 약속 (1)

"저, 저는 이용당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스와라 위샤인의 흉계였을 뿐입니다."

네펠타 3세의 말을 재빠르게 통역관이 옮겼다.

"아, 됐어, 이미 지나간 일은 집어치우자고. 언제까지 과거에 그렇게 매여 있을 거야?"

거추장스러운 하오체는 집어치우고 반말을 찍찍하고 있었지만, 통역관이 어련히 알아서 잘 높이고 낮춰서 말을 전하겠지 싶었다.

-과거에서 가장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놈이 말은…….

곁에 앉아 있던 투브의 일침이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분위기 깨는 데 도가 튼 녀석이었지만 나도 웬만큼 요령이 생겨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네펠타 3세가 비굴하면서도 교활한 표정을 하고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저의 지위에 대한 것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황상께서는 어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역시 이 남자는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타국의 장수인 내가 일국의 왕인 자신보다 상석에 앉아 있는 치욕스러운 상황임에도 저렇게 한결같이 본인만 생각하는 생존 본능에 경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폐하의 의중이야 나도 모르지, 워낙 높이 계신 분인지라. 뭐, 운이 좋아 이렇게 되었지만 그쪽도 대충 감이 오지 않아? 그쪽 같으면 연전연승의 장수에게 10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국을 치라고 명을 하겠어?"

통역이 말을 옮기자 네펠타 3세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모양새였다.

"뭐, 이대로 돌아가면 명분과 실리는 모두 내 쪽에 있으니, 내 의견에 무게추가 실릴 거라는 것 정도는 확실하겠네."

"그렇습니까……."

그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궁까지 털린 마당에 그가 의존할 사람은 내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황제의 눈 밖에 난 상태이니 네펠타 3세는 지금 어느 장단에 맞추어 움직일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렇게 머리 회전이 빠르고 결단력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치욕스러운 순간은 겪지 않았겠지.

"우리는 일주일 후에 떠날 거야. 다소간의 병력은 남겨 두고 가니 괜한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해."

네펠타 3세가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손을 가로저었다.

"어찌 감히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저희는 앞으로 영원한 제국의 동맹……."

"어허! 속국."

"예, 예, 제국의 속국입니다."

어느 지역을 점령하든 그곳의 민심을 잡기 위해선 적어도 5년, 길게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사민 정책, 세제 혜택 같은 당근과 봉기 진압 같은 채찍을 번갈아 써야 그나마 좀 상황이 나아졌다.

이전 삶의 분리 운동이나 현재의 내전은 그나마 제국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벌어졌기에 타 영지 침공과 점령에 대해 반발이 덜했지만, 왕국 정벌은 애초에 '타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복 이후의 상황이 더 어려웠다.

왕국 정벌 이후 식민지 제독을 겸하게 된 내가 오랜 기간 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었다.

원래 계획은 내가 정벌을 하는 동안 에베 공작이 잡고 있는 제국 남부에서 인원들을 왕국 땅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아직 남부에는 나나 에베 공작에 반감을 가지는 영주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들의 세력을 찢어 놓고, 또한 왕국과 제국의 융화책을 시행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에베 공작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남부에서 병력을 긁어모은 상태, 이쪽으로 사람을 보내기 위해 다시 한번 사람을 모았다가는 남부의 생산력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었다.

에베 공작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네펠타 3세는 유약한 왕이기에 큰 걱정이 되지 않았으나, 툴리앗에 남겨 둘 주둔군이 대부분 남부에서 징발해 온 군이라는 것과 툴리앗 곳곳에 이르기에는 수가 적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것이 일부러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하고 압제의 해방자라는 세칭에 더 신경을 썼던 이유였다.

비록 침략자지만 기존에 있던 놈보다는 더 낫다는 인식을 심어 줘야 했다.

아무리 잘 대해 준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반(反)제국파는 생긴다.

그렇다면 친(親)제국파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힘을 소모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전 삶에서 뼈가 시리도록 느낀 것이었다.

'그때는 왕국들이 분리 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정말 뒤가 없이 가혹하게 대했지.'

따라서 점령한 왕국들 곳곳에서 봉기와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제법 시간이 지나고 제국을 옹호하는 세력이 여러 왕국에 생기기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조금씩 안정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가혹하고 거대한 악보다는 그 악을 옹호하는 존재를 욕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길이기에 왕국들의 내부는 각자의 진영을 욕하고 비방하는 소리가 들끓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왕국들의 저력은 서로 분열하는 데 쓰여 소모되었다.

그렇게 나는 악독하고 잔혹한 사실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단합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을 통치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번 삶은 지난 삶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시행한 정책들은 손대지 않았으면 해."

네펠타 3세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지더니 이내 예의 그 비굴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국의 국력 역시 분열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가 점령한 왕국의 지역들도 결국에는 다시 네펠타 3세의 치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들은 나로 인해 줄어든 세금과 자유를 맛본 상태.

내가 떠난 뒤에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린다면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또한 정말로 네펠타 3세가 그곳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부족한 세수(稅收)를 메우기 위해 다른 지역을 쥐어짜려 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었다.

툴리앗에서 신과 같은 존재인 왕에게 감히 불만을 품을 수는 없을 것이니, 아마 왕 아래의 다른 신하들에게 화살이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지역별, 계급별 분열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 우둔한 왕은 앞으로도 뒤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충 들었지만 1황자가 그쪽에 제시한 동맹의 조건이 뭐지?"

"그것은…… 내전이 수습된 이후 엘리자벳 황녀를 제게 시집보내 왕국을 부마국(駙馬國)의 지위로 승격하는 것입니다."

위샤인 부녀를 생포하면서 들은 것과는 다른 내용이 튀어나왔다.

지난 삶에서도 외교를 위해 다른 왕국으로 팔려 가듯 혼인을 한 1황녀는 이번 삶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고달픈 운명에 매여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그 안에 들어 있는 초대 황제를 생각하자 등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건?"

이번엔 제국 남부 일부를 할양받고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시와르 왕국의 멸망 및 그 영토를 흡수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아마 1황자가 나시와르 쪽에 제안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 나시와르와 툴리앗의 이름만 바뀌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타우 황제라는 얘기는 앞으로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아주 싫어하시거든."

네펠타 3세의 입에서 어눌한 발음으로 '타우'라는 말이 나왔다.

그가 지레 흠칫 놀라서 말을 정정했다.

통역관은 타우라는 말을 빼고 자연스레 1황자라는 말로 바꿔 내게 전해 주었다.

세간에서 생귀니엘 서비어와 바그안트 서비어를 타우 황제와 수도 황제로 부른다는 사실은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제국 역사상 2명의 황제가 존재했던 적이 있던가.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내 지분이 상당히 컸지만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 판이었다.

"그런 시시한 호칭은 알아서 정정하도록 해. 그리고 몇 가지를 더 부탁하고 싶은데."

부탁의 탈을 쓴 내 요구를 들은 네펠타 3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나는 툴리앗의 말을 잘 모르지만 저 정도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런 표정인데?

몇 번이고 느끼는 건데, 이 녀석도 눈치는 참 빠른 편이었다.

***

다음 날 저비스가 나를 찾아왔다.

"가면 전량 회수 확인했습니다."

"확실해?"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전사한 시체에서도 가면만은 가져왔으니 틀림없습니다."

"그건 말이 좀 심하네. 전사한 사람에게."

내 지적에 저비스가 재빠르게 자신의 실언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신경 써. 너는 병사나 기사가 아니라 잘 공감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저들은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야."

"생각이 짧았습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전투가 끝나면 아군 시체를 최대한 수습해서 개별로 화장한 다음 유골 가루와 유품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주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죽은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옳았다.

"그래, 게다가 우리는 귀족이잖아. 괜한 반감 불러일으킬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런데 검은 늑대 기사단 말고 다른 기사단에도 보급한 지가 꽤 되었는데 기술 노출의 염려는 없는 건가?"

"페다의 세공법과 특수 반응을 분석해 내려면 몇 년은 걸릴 겁니다. 게다가 요즘은 아카데미와 제국 대학 학생들도 전장에 불려 나가 휴교 상태이지 않습니까? 연구를 제대로 진행할 시설도 몇 군데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비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시와르 왕국과의 강화 조약 조건 중 하나로 왕국 전역에 있는 마법 연구소와 마도 공방에 시찰단을 파견한다는 조건을 집어넣은 것이 이 가면의 유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저비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하지만 조심해 나쁠 것은 없었다.

"그래도 더욱 조심해. 그리고 툴리앗에 있는 페다 광산에서 비밀리에 페다를 매입하라는 지시를 내렸어. 누이론트 백작이 배를 가지고 근처의 항구로 올 거야. 페다를 가지고 카몰로 돌아가서 가면을 더 만들도록 해."

"툴리앗에서도 페다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랑베르트 공작령만큼의 질이 좋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들었어. 하지만 어쩌겠어, 전시 상황인걸. 이마저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데 각하께서는 이곳에 더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며칠 쉬어 병사들의 피로도 웬만큼 풀렸을 텐데 왜 움직이지 않고 계십니까?"

트리스트렘 점령 이후 도시 예산과 왕실 금고를 뜯어내다시피 해서 병사들을 두둑이 배불린 참이었다.

당장 육로와 해로 모두를 이용해서 제국으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궁금할 법도 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그때 로하나스가 들어왔다.

"각하, 툴리앗 왕이 보낸 사절입니다."

"들어오라고 해."

로하나스가 밖으로 나가 사람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땅딸막한 키, 배배꼰 수염과 머리카락, 드러난 팔에 보이는 탄탄한 근육.

저비스가 놀라 외쳤다.

"드워프?"

그러자 드워프가 자신들의 말을 거칠게 내뱉었다.

"땅의 아이 앞에서 드워프라는 말을 하다니. 망치로 머리를 빠개도 시원치 않을 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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