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약속 (2)
라카 가문은 드워프 의회의 중심인 다섯 가문 중 외교와 상업에 중심을 두고 있는 가문이었다.
다른 드워프들이 평생 불과 돌을 가까이하며 반짝이는 것과 대장 기술 말고는 관심이 거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드워프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자리에 위치한 가문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이 드워프의 이름은 잘란 라카, 툴리앗 왕국에 보내진 드워프 대사였다.
나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드워프들은 지독하리만치 은원에 집착하는 종족이었다.
은원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철저하게 관계를 계측하려 든다는 의미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들은 부부간에도 서로 믿지 않는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진위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겪어 본 드워프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이런 드워프 앞에서 괜히 경계심을 돋워 줄 필요는 없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군."
잘란이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전 삶에서 툴리앗을 점령하고 툴리앗 동부 경계 밖에 있는 사톨란 산맥에 있는 드워프와 꽤 장기간 교류할 일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오랜 기간 이들의 말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따라 하기조차 어려운 발성 구조와 발음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드워프의 말이었다.
잘란은 품에서 주먹만 한 검은 돌멩이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잘란의 뒤에 따라온 드워프 하나가 그들의 말로 주문을 외자 돌멩이의 표면에 그려진 문자가 빛났다.
"되었나?"
잘란의 말이 그대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역석(譯石), 만통석(萬通石) 등으로 불리는 암석이었다.
물론 암석만으로는 안 되고 드워프 마법사가 옆에서 마법을 걸어 주어야 했다.
엄격히 반출이 제한되고 있는 물건이기도 했고, 설령 반출되었다 하더라도 드워프 마법사의 수가 워낙 적어 아무나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대사 자격으로 나와 있는 드워프 정도만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대사들은 제국어가 기본 아닌가?"
내 말에 잘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툴리앗에서만 활동해서 제국어가 익숙하지 않아. 할 수는 있지만, 언어의 미숙함은 괜한 오해를 부르기 십상이지."
퉁명스러운 태도와 거친 말투와는 다르게 철저함이 묻어났다.
"저쪽 드워프 마법사는 두자람 가문인가?"
"드워프 중 마나의 축복을 받는 가문이 두자람 말고 또 있나?"
"왜, 고즐로나 마아지아 가문도 종종 마법사가 난다고 들었는데. 하긴 아무리 그래 봐야 의회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두자람만은 못하니 그쪽 말이 맞겠군."
"우리를 좀 아나? 재미있군."
말을 하면서 잘란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제국에도 수도를 비롯한 거대 도시들에 대사로 파견된 드워프들이 있긴 했지만, 제국인에게 이들은 그저 신기한 종족일 뿐 관심을 가진 제국인은 굉장히 소수였다.
그런 마당에 내 입에서 자신들의 가문 이름이 술술 나오니 신기할 만도 할 것이다.
"알다마다. 수염 땋은 형태를 보니 바로 알았지."
"허허, 거짓말! 인간이 수염으로 가문을 구별한다고? 그런 인간은 듣도 보도 못했어!"
"드워……. 아니, 누가 땅의 아이 아니랄까 봐 의심이 많군. 내기하겠나?"
"내기?"
잘란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 피어올랐다.
만사에 의심하는 것이 자신이 드워프임을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잘란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잘란이 답했다.
"시안 몬트라우, 여러 이름으로 불리더군. 카몰 후작, 수도 황제의 측근, 악마, 학살자, 식인종, 해방자, 혼란, 질서 등등."
"재밌네. 툴라앗의 왕도인 트리스트렘 앞에서 주툴리앗 대사인 그쪽을 만나는 지금 상황이 참 재미있어. 뭐 어찌 되었건 툴리앗 사람들에게 나는 침략자잖아? 그런데 툴리앗과 드……. 땅의 아이들이 서로 협력 관계라고 해서 그쪽까지 공격할 마음은 없단 말이지."
툴리앗 사람들은 자신들을 아주 오래전 사톨란 산맥에서 분리되어 나온 드워프 갈래 중 하나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을 산맥 밖으로 이끌고 왕의 자리에 앉은 남자가 사실은 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어져 내려오는 왕은 사실 신과 같다라는 믿음이 툴리앗 백성 사이에는 아주 견고히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진지한 개소리였다.
제국이나 나시와르 왕국 사람들에 비하면 체구가 작고 단단한 것이 툴리앗과 드워프 사이를 이어 주는 추측이라면 추측이었다.
드워프들은 그것에 대해 이렇다 할 의견이 없었지만, 그래도 국경을 접하고 있기도 했고 비슷한 놈들끼리 뭉친다고 툴리앗과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
실제로 툴리앗의 정예 부대인 산양 기병들에게 주어지는 도끼와 망치는 전부 드워프제였다.
툴리앗 왕국 전역에 퍼져 있는 산양 기병들의 전체 수가 1만이 넘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굉장한 숫자였다.
제국 황실 금고에 있는 드워프제 무기를 다 풀어도 1만의 기사를 무장시킬 양은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잘 지내고 싶어. 어찌 되었건 제국과도 교류를 하고 있으니까. 물론 툴리앗의 편을 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대가는 알아서들 책임지는 거고."
내 말을 들은 잘란의 얼굴이 한동안 굳어 있었다.
드워프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툴리앗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나의 말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얼마 뒤 잘란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정말 수염만으로 가문을 구별할 수 있나?"
우호적인 의사표시다.
내가 웃으며 답했다.
"웬만한 정도는 구분하지."
"좋아, 내기를 해 보자고."
잘란은 협박에 가까운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다.
제국에 있는 다른 드워프 대사들도 모두 라카 가문의 드워프들일 테니 그들에게서 내 얘기가 안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방향을 정하고 내게 온 걸 수도 있었다.
라카 가문의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잘 굴러갔다.
이들이 제국의 귀족이었다면 정계와 사교계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머리가 좋은데 의심이 많아, 대신 우직한 면모도 있고. 그래도 본인만 생각하는 인물은 아닌 것 같네. 의심이 많은 것에 비해 눈치가 아주 좋아. 의심 많은 것들은 눈치 없는 경우가 많은데, 복합적이야.
잘란을 훑은 투브의 평이었다.
내가 과거에 잘란과 만나고 느낀 감정과 아주 유사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좋은 자리에 빠지면 안 되는 것이 있지?"
로하나스를 시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을 가지고 들어오게 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병에 담긴 술이었다.
병 옆에 툴리앗 왕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고, 입구가 특이한 모양의 마개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마개의 모양이 산양의 머리를 닮아 있었다.
"오오!"
잘란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로하나스가 탁상에 올려놓은 것 앞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뿔 3개 달린 산양의 뼈를 걸러 만든 술! 툴리앗 왕에게만 진상되는 걸 어떻게! 툴리앗 생활 30년 동안 나도 두 번밖에 마셔 보지 못한 건데!"
나는 피식 웃고 질문에 답을 해 줬다.
"이거 봐, 나는 왕도 트리스트렘을 점령한 사람이야. 달라면 내놔야지. 안 그래?"
"이, 이 귀한 술을……."
"좋은 자리에서 재미있는 내기를 하는데 술이 빠지면 되나?"
"안 되지……. 안 될 말이지……."
나는 손을 뻗어 술병을 들었다.
넋이 나간 잘란의 눈은 내 손에 들려 있는 술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술병의 마개를 제거하려 했으나 뭔가 봉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 마개는 쉽게 제거되지 않았다.
"에라이!"
마나 소드를 만들어 병의 입구 부분을 잘라 내 버렸다.
알싸하면서도 진득한 주향이 확 퍼졌다.
"일단 마시고 시작하지."
***
"굉장하군! 굉장해!"
풀었다 꼬앗다를 반복해 수염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는 잘란이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정말 수염 매듭을 보고 가문들을 구별해 낼 줄이야! 자네 가계에 땅의 아이가 있었나? 볼수록 신통방통하군그래!"
잘란이 앞에 놓인 술을 쭉 들이켜고 답했다.
"그럴 리가, 나는 손재주가 아주 안 좋은 편이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와하하하하, 그렇지! 우리 피가 섞였다면 손재주가 안 좋을 수 없지! 그리고 자네는 키도 너무 커! 올려 보느라 목이 꺾일 지경이라고! 와하하하하!"
왕에게만 진상되는 술을 몇 병이나 비워 낸 잘란은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그러던 그가 수염에 대고 손을 몇 번 꼼지락거렸다.
"이건! 이건 못 맞히겠지!"
흘낏 본 내가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모르겠군. 전혀 본 적이 없어."
"역시! 이건 말이지. 사톨란산맥 깊은 곳에 사는……."
"깊은 곳에 사는 비라 가문의 수염 매듭과 흡사하지만 좌우가 바뀌었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든가 아니면 그대가 좌우를 헷갈렸다는 뜻이지."
잠시 고개를 숙여 눈을 꿈뻑이던 잘란이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그렇군! 내가 헷갈렸어! 대단한데!"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비라 가문은 아주 유명해."
"어째서? 비라 가문은 깊은 곳에서 맥주만 만드는 가문인데."
"교역품 중에 그 맥주가 있지 않나. 몇 통 안 들어오긴 하지만 맛이 기가 막히던데. 그 맥주통 위에 그 수염 매듭이 그려져 있으니 모를 리가 있나."
"이런! 그래도 자네만큼 우리 가문들에 빠삭한 제국인은 처음 보는군."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 덕에 상대적으로 쉽게 잘란에게 호감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번에 봤을 때는 나도 고압적으로 나간 터라 어찌나 꼬장꼬장하게 나오던지 이 잘란 하나 때문에 사톨란산맥을 공격할까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툴리앗까지 왔는데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잘란의 협력이 필수 불가결했다.
다행히 잘란이 먼저 말을 꺼내 주었다.
"즐기는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염이 흐트러져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영락없는 주정뱅이 드워프라고 생각할 수 있던 잘란의 눈빛이 바뀌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의심 가득한 눈빛까지는 아니었지만 흥미와 의심이 동시에 묻어 있는 시선이 내게 와닿았다.
"지금 그대의 기세로 봐서는 문서 하나만 달랑 보내도 내가 딱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나는 아무 말 없이 술이 담겨 있는 잔을 들었다.
앞에 앉아 있던 잘란이 잔을 들어 가볍게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가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잔을 탁상에 내릴 때 내가 말했다.
"랑운드가 툴리앗에 있지?"
잘란은 손을 들어 수염에 묻은 술을 정리하는 척했지만, 그것은 당황하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랑운드라는 이름은 충분히 잘란을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랑운드 디네베.
드워프 의회 다섯 가문 중 중심이라고 해도 좋은 디네베 가문 출신의 드워프로, 그의 손이 닿으면 이름 모를 병사의 검도 용사의 검으로 변한다고 할 정도로 실력 좋은 대장장이였다.
아니, 그냥 대장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상당히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었다.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명장을 넘어 신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까.
다만 대책 없는 성격과 기이한 여행 벽이 있어 행적을 아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의 행보 자체가 드워프 의회의 주요 관심거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 있는 드워프 대사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랑운드 추적과 감시이기도 했다.
물론 본인이 알게 되면 또다시 사라지므로 아주 비밀리에.
"나도 나름대로 정보망이 있어. 랑운드를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만나 보고 싶을 뿐이야."
드워프는 100에서 120살까지 사니 인간에 비해 장수하는 편이었다.
나는 이전 삶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제국을 돌아가기 전에 랑운드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는 약 90세.
노년의 문턱에 있는 그는 슬슬 흰머리가 생겨나던 당시의 내게 제법 흥미를 가졌었고, 우리는 제법 친근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그는 자신의 기술을 제대로 이을 드워프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었다.
나는 그에게 긴을 소개시켜 줄 요량이었다.
원래 랑운드까지는 고려 사항이 아니었으나 스와라가 툴리앗으로 향해 준 덕에 큰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반오러 물질이 확산되면 전장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부분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전장은 마법사와 일반병의 구도로 좁혀지게 되는데, 마법사는 워낙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잠시 뒤로 제쳐 놓으면 이제 일반병의 양과 질로 승부를 보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니 가볍고 튼튼한 무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정말 그것이 전부인가?"
"불러올 필요도 없어. 내가 직접 갈게."
"어떻게 그분을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의회에 물어봐야……."
"잠깐, 잠깐."
잘란을 제지했다.
"괜히 위에 보고되면 복잡해지고 머리 아파 질 것 뻔한데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나? 실무 차원의 일, 이런 이유 많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랬다가는 나중에 사실이 알려지고 내게 무슨 문책이 올 줄 알고."
"그럼 나랑 랑운드가 만났다는 사실 이상의 공적이 있으면 되는 거네?"
"무슨……."
이어지는 내 말에 잘란이 작은 체구를 일으켜 탁상을 쾅 치는 바람에 술병이 엎어졌다.
얼른 술병을 일으켜 세웠지만 제법 많은 술이 쏟아져 버린 뒤였다.
"에헤이, 귀한 술 다 버리네!"
귀한 술이 쏟아지는 것도 내가 타박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잘란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말! 거짓말이 아니겠지? 약속의 행방을 안다고?"